건축에 적용된 수(數)의 상징성
수(數)는 저마다 다른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수가 지닌 상징적 의미는 시대와 지역, 그리고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변화해왔다.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수에 대한 관념을 형성해 왔으며, 그러한 수의 상징성이 건축에 적용된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우주는 수직으로는 하늘과 지상과 지중의 삼계로 나뉘는가 하면, 하늘과 땅과 사람은 삼재(三才)로 구분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횡적으로 우주 공간은 사방 아니면 오방으로 구획되어 있다. 공간만이 아니다. 시간도 결정적으로 수다. 24시의 하루는 다시 또 삼시(三時) 삼 때로 구분되어 있다. 우주 구성도 시간도 하나같이 수로 잡혀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도 그 육신이 곧 수다. 사대육신(四大六身)이 곧 우리들 몸통이고 그것은 또 사지(四肢)를 갖추고 있다. 이 경우, 사대(四大)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요소인데, 그런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기는 우주나 사람이나 다를 것 없는 셈이다.
그런 네 가지 요소로 우리들 인간의 육신(六身), 곧 머리, 몸통, 각각 둘씩의 팔과 다리가 이루어져 있다고들 믿어 왔다. 뿐만 아니다. 인체를 두고는 오장육부(五臟六腑)라고 했으니, 그래서도 인간 몸뚱이는 숫자다.
온 인류를 통틀어서 볼 때, 1, 3, 5, 7, 9 등의 홀수는 신성하고 거룩한 숫자다. 그것은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로, 가령, 전통적인 명절이 으레 홀수 날짜에 들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1월 1일의 설, 3월 3일의 삼질, 5월 5일의 단오, 7월 7일의 칠석, 9월 9일의 중구절 등이 그것으로, 가령, 단오 때면 여인네가 널뛰고 그네 타고 하면서 축제를 화려하게 벌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2를 비롯한 짝수는 세속적인 숫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점은 단군신화와 오늘의 한국의 ‘유아 통과의례’에서나 추호도 다를 바 없다. 뿐만 아니다.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신에게서 백날 동안 햇빛 보지 말고 굴 속에서 근신하며 사람이 될 것이라는 가르침도 받고 있다. 그러나 웅녀는 세이레를 근신하고는 소원을 이룩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誌) 옥사(屋舍)’조에는 신라의 골품제도에 따른 가사규제 조항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 집의 규모에 대해 4두품과 백성의 집은 실(室)의 길이와 너비가 15자를 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어 신분이 높아짐에 따라 5두품은 18자, 6두품은 21자, 진골은 24자를 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신분에 따라 각각 3자씩의 차등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수치는 3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4두품과 백성의 집은 15자로 규정되어 있다. 15는 3과 5의 결합(곱)으로 생겨난 수라고 볼 수 있다. 동양적인 사고에서 ‘3’은 우주(宇宙)를 의미한다. 음양설에 의하면 ‘1’은 최초의 양수(陽數)로 다른 수와는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양수이다. 다음의 ‘2’는 최초의 음수(陰數)로 순음(純陰)에 해당한다. ‘3’은 순양인 ‘1’과 순음인 ‘2’가 결합하여 나타나는 최초의 변화된 양수로 우주의 탄생을 의미한다.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사상에 의해서도 ‘3’은 우주를 의미한다.
오행사상에 의하면 ‘5’는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원소가 완벽히 갖추어진 것을 의미한다. 또한 5는 사람의 상징적인 평균 신장, 즉 눈높이를 의미하는 수로 해석할 수 있다.
건축에 양수(陽數;기수, 홀수)와 음수(陰數;우수, 짝수)의 개념이 적용되기도 한다. 음양설에 의하면 살아있는 사람의 집은 양택(陽宅)이라 하고 죽은 사람의 집인 무덤은 음택(陰宅)으로 구분하는데, 양택에는 양수를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단위 건물의 도리통은 1칸, 3칸, 5칸, 7칸 등과 같이 양수 칸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양수 칸으로 만들 때 빈 공간으로 이루어진 정간(正間)이 생겨나게 됨으로써 건물에 중심을 부여할 수 있다. 또한 용마루나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구성할 때에도 적새의 단수(段數)를 3단, 5단, 7단 또는 9단과 같이 홀수로 만들었다.
사찰의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다는 점에서 음택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건축이라는 점에서 양택의 의미가 더욱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층수를 홀수로 만들기도 했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이처럼 양택(陽宅)에는 양수(陽數)를 적용했다. 특별한 의미에서 건축에 특정한 수의 개념을 쓰기도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황룡사지의 9층 목탑은 9개 이웃 나라의 재앙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9층으로 만들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濊貊)을 의미한다.
건축은 도형에 의해 형태가 만들어지므로 도형학의 발달은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동양에서 도형을 그리는 기술은 규구술(規矩術)이라 부른다. 규(規)는 원을 그리는 도구인 그레자를, 구(矩)는 직각을 그리는 도구인 곡자(曲尺,곱자, 직각자)를 각각 의미한다. 그러나 옛날의 작도법은 각도를 사용해 도형을 그리는 오늘날의 작도법과는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다각형은 모두 원과의 관계 속에서 그레자와 곡자를 이용하여 그린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각도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다양한 도형을 작도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6각형과 8각형은 물론 7각형과 9각형, 12각형, 19각형 등 다양한 다각형을 작도해서 건물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7각형의 사례는 ‘삼국사기 권제13 고구려본기 유리왕’조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동명성왕이 아들에게 남겨줄 증표를 숨긴 곳이 살던 집의 초석과 기둥 사이였는데, 초석을 칠릉석(七稜石), 즉 7각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초석이 정확히 정7각형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7각형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성산성과 공산성 등에서 발굴된 건물터에서는 8각형은 물론 9각형과 12각형을 사용한 예가 확인된다.
또한 통칭 석굴암으로 부르는 석불사(石佛寺) 석실금당의 주실(主室)은 원형의 평면이지만 엄격히는 19각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주실은 입구 부분과 그 양 옆의 돌을 제외하면 모두 같은 너비의 돌 15개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입구 부분으로 연장하면 4장의 돌이 더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다양한 다각형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더러는 하나의 건물에 여러 가지 도형을 복합적으로 사용한 경우도 보인다.
그 한 예로 창덕궁 후원의 청의정을 들 수 있다. 청의정은 바닥의 평면은 방형, 도리는 팔각형, 지붕은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또한 서까래는 의도적으로 방형으로 만들어 64개를 맞추었다. 도형학적으로 원형과 방형, 팔각형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원형과 그에 내접하는 방형 사이에는 8각형이 위치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사고, 즉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고는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많은 연못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인간이 위치하게 된다. 하늘은 원형, 땅은 방형으로 상징되는데, 도형학상 원과 방형 사이에 위치하는 팔각형이 인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원과 방형,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청의정은 천지인의 삼재, 즉 전통적인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다.
청의정의 64개 서까래는 64괘를 의미한다. 의미는 다를 수 있지만 원형과 방형, 팔각형을 조합하여 건축으로 표현한 예는 불국사의 다보탑, 석불사의 삼층석탑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도형과 수의 조화로 비례가 만들어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 올라갈수록 건축은 엄격한 비례체계로 만들어지며, 그러한 특성을 지닌 건축을 고전 건축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건축도 고대로 올라갈수록 엄격한 비례체계로 만들어졌다.
직각삼각형을 대표하는 특수 예인 3:4:5의 비례는 우리나라 건축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비례 중 하나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석불사 석실금당을 들 수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전실은 차치하고, 비교적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석불사 석실금당의 주실(主室)의 원형 평면의 직경은 당척(唐尺)으로 24자로 설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본존상을 모신 대좌의 중심은 주실의 전후를 연결하는 지름의 3/4 지점에 위치한다.
지름인 24자를 4등분하면 8자가 되는데, 8각형을 이룬 수미좌 형식의 대좌 중 한 부분은 지름 8자인 원에 내접한다. 이렇듯 평면에 사용된 기본 치수인 24자와 8자, 그리고 24자의 3/4 등의 수를 약분하면 3과 4의 수가 나오게 된다. 따라서 석불사 석실금당은 3:4의 비례체계로 설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봉정사 극락전의 단면 구성은 높고 낮은 두 개의 높이로 이루어지는 단을 반복해서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동일한 높이로 이루어지는 부재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러한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수학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동일한 높이로 이루어지는 단에 의해 단면을 구성하는 설계 방법은 점차 약화되어 조선시대로 오면서 사라지게 된다.
이밖에 경주 감은사지에는 등분법을 이용한 배치 방법이 사용됐다. 감은사 배치는 앞쪽의 중문과 뒤쪽의 강당 사이의 거리를 이등분한 곳에 금당을, 또한 양쪽 회랑 사이의 거리를 이등분한 곳에 금당을 각각 배치했다. 동서의 석탑은 중문 좌우 회랑과 강당 좌우 회랑 사이, 그리고 양쪽 회랑 사이를 각각 4등분 한 곳에 배치했다. 즉 감은사지의 배치는 전체를 방형으로 만든 다음 각 변을 4등분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건축에서 수와 도형, 그리고 그 조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비례를 적용한 다양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이는 일찍부터 발달한 도형학과 수학의 논리가 건축에 적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수학과 도형학은 천문학과 역학, 사상 등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이같은 관계 속에서 수와 도형은 각각의 상징성을 지니며, 그 상징을 건축에 포함시킴으로써 우리 선조들은 풍부한 내용과 다양성을 지닌 명품 건축을 만들었던 것 같다. (월간 문화재사, 강원대학교 건축학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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