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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문화

흥인지문(興仁之門)과 4자

 

흥인지문(興仁之門)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문이다.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완성하였고, 1453년(단종 1년) 보수와 문이 썩고 유지가 힘들어 1868년(고종 5년) 고쳐 지었다.
조선총독부가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겨
1934년에 보물 2호로 지정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본래 흥인지문은 동대문구에 속했으나, 수 차례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지금은 종로구 관할에 속한다.


명칭의 유래
사대문의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에서 따왔는데, 이에 따라 동서남북의 사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지(智)를 대신하여 정(靖)을 썼다)이다.(마지막 신은 고종 때 한양의 중심이었던 “보신각”의 이름에 쓰였다).

이때 다른 사대문의 이름이 석 자인데 반해 흥인지문만 넉 자인데, 이는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로 지었다고 한다.

 

한양은 동쪽이 약해 동쪽 방향에 있는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는다고 보았다. 이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닌

풍수적 목적에 의해서 옹성을 쌓았다. 또 현판인 `흥인지문(興仁之門)`도 다른 문은 모두 글자가 3자인데 4자로 한 것은

동쪽의 허함을 풍수적으로 보충해주기 위해서 `지(之)` 하나를 더 넣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다. 옹성이 무엇이냐? 하면,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둘러 축조한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말한다.

특징


화강석으로 된 홍예문의 축석 위에 지어졌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 다포계형식의 목재 중층건물이다.
숭례문이 조선 초기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되어 있어 서로 대비된다.

-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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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興仁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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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興仁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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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興仁之門)과 옹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