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외로운 날, 좁은 과수원 길을 따라 팔공산 기슭으로 접어든다. 구멍가게도 식당도 하나 없는 작은 마을, 커다란 회화나무 두 그루만이 울창하다. 마을사람들은 수령 350년의 이 나무에 처음 마을을 세운 이의 이름을 따 '최동집 나무'라고 이름붙여줬다고 한다. 경주 최씨 종택이 있는 대구시 동구 둔산동 입구의 풍경이다. 이곳 옻골마을은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인위적으로 조성한 민속촌도 아니고 체험 프로그램으로 수선떨지 않으므로 특별한 볼거리나 즐길거리도 없다. 복원되지 않아 더욱 아름다운 곳, 그래서 옛사람의 삶의 철학을 그대로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봄이 완연한 이맘때 석파랑(서울시 종로구 홍지동)은 복숭아, 벚꽃, 목련 등 봄꽃들의 호사스러운 잔치가 벌어진다. 흥선대원군이 유난히 애착을 가지고 별장으로 이용한 석파랑의 담장은 다양한 문양과 무늬들로 흡사 '꽃담 백화점'을 방불케 한다. 석파랑의 꽃담은 경계나 단절이 아닌 친숙하고 정감어린 자연의 일부로 축조돼 흥미롭다. 인간세계와 자연을 담으로 단절시키지 않고, 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교감할 수 있도록 한 축조자의 철학이 느껴진다. 기품있고 정숙하며, 가지런하며 여백이 있는 이 건물은 안타깝게도 지금은 개인 소유다. 인왕산과 북악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석파랑은 예약하여 정해진 날에만 방문할 수 있다.
흙담은 예로부터 우리네 삶과 함께 한 친근한 존재였다. 마을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담장의 이야기가 함께 있었다. 담장길 아래 어딘가에서 동네아이들의 비석치기와 딱지치기 소리가 들려왔다. 가로등이 켜지면 개짖는 소리와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즈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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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 지음/유연준 사진/생각의나무/336쪽/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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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애착을 가졌던 석파랑은 다양한 꽃담을 가지고 있어 흡사 꽃담백화점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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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키와, 수키와를 맞대어 꽃잎을 새긴 전주 한옥마을 최부잣집 흙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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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금아(亞)' '부자부(富)' '태극문양' 등이 리듬감 있게 그려진 전라도 녹천재의 흙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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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느티나무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증언하는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 앞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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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길 위로 고사리나 취나물 혹은 깨끗하게 빤 운동화가 널려 있었다. 떡을 하거나 부침개를 부친 날이면 돌담 위로 이웃집 아낙에게 정이 가득 담긴 소쿠리가 오가기도 했다.
이 책은 전국 구석구석에 있는 아름다운 옛집과 꽃담을 발로 뛰며 기록한 산물이다. 저자가 10여년 동안 전국에 흩어진 꽃담을 직접 답사하여, 담과 굴뚝 등에 새겨진 무늬가 지닌 다양한 상징을 읽어내고, 그 안에 숨겨진 의미와 가치를 글로 승화시켰다. 창덕궁 대조전, 운현궁과 석파랑, 전등사, 이남규 고택, 김기응 가옥, 임실 영모재, 이돈희 가옥, 소쇄원,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 도동서원, 범어사 등 전국 곳곳에 숨어있는 한국의 옛집과 꽃담을 망라했다. 요란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정갈하게 발화하는 한국의 옛집들, 그곳에서 살았던 이름모를 이들의 그윽한 숨결, 아직도 꾸준하게 살아 숨쉬는 이야기들이 생명력 있게 전해진다.
저자는 "안보다 밖을 먼저 생각한 우리네 집과 담은 삶의 여유이며, 타인을 위한 배려의 소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스쳐 지나가면 그저 벽일 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미처 몰랐던 우리문화의 멋과 흥이 숨어있다고 역설한다.
전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이종철씨는 "꽃담은 주인의 지혜와 마을목수, 장안목수의 기원과 상징이 피어나는 글자꼴, 문자 난장과 꽃 그림, 색채 모자이크로 장식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설치미술"이라면서 "조상의 흙냄새와 어머니의 젖내가 풍기는 구수함과 정감이 담겨 있어 건축가, 디자이너 뿐만 아니라 우리문화의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고자 하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일반인에게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고 추천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