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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고흐 &최북의 자화상

 

네덜란드 출신의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독특한 화풍과 표현력으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화가다.

 예술가로서 가난과 좌절로 점철된 쓰라린 인생 여정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 반 고흐는 창작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독특한 화법과 내 면중심의 표현력으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가장 위대한 화가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영혼 구도적인 강렬한 작품으로 사후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다.

  10년의 화가 생활에 반 고흐가 남긴 유화작품은 약 880 여 점에 이른다. 대표작으로는 ‘자화상’, ‘아이리스’, ‘자화상’ , ‘감자 먹는 사람들’ , ‘해바라기’, ‘오베르 교회’가 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 이름과 예술 세계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사후 그의 영향력은 인상주의, 야수파와 추상주의, 표현주의에 걸쳐 거대한 것이었으며, 20세기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귀감이 되어 오고 있다.

 “형의 노고는 헛되지 않을 것이오... 난 미래 사람들이 형을 이해할 거라 확신하오. 문제는 그것이 언제냐 하는 것이오.” 동생 테오의 예언처럼, 21세기에도 그의 붓 터치 속에 살아 숨쉬는 듯한 예술정신이 현대인들의 감수성을 일깨우며, 그가 내뿜었던 광기의 불꽃은 꺼지지 않은 채 진정한 영웅으로서 반 고흐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고흐는 알아도 그보다 100년 전 이 땅에서 살단 간 조선의 애꾸눈 화가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 1712-1786, 경주출신 또는 무주출신)을 모른다면 문제다.

 반 고흐는 그 유명한 ‘자화상’을 그리고 두 달 뒤 권총자살로 37세의 생을 마감했고, 최북은 조선 숙종 때 태어나서 정조대까지 살다가 어느 겨울 밤 홑적삼 입은 몸으로 눈구덩이에서 얼어 죽었다.  반 고흐는 생존시에 단 한 폭의 그림을 달랑 400프랑에 팔았고, 최북은 아침 저녁 끼니를 때우기 위해 오두막집에서 하루 종일 산수화만을 그려야 했다.

 보통사람이 보기엔 이들이 거의 광인의 기질을 호진 것이 공통점을 갖고 있으나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 것과 최북이 자신의 눈을 찔러버린 것에는 그 동기가 완연하게 다르다. 고흐는 그냥 미친 짓으로 귀를 잘라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반면 최북이 자신의 눈을 찔러버린 동기는 분명하게 전해져 온다. 권력을 가진 세도가의 압력을 단연코 거부하고 반발한 점에선 당당한 기개마저 엿보인다.

 사실 우리나라 화가 중 최고의 기인 최북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김명국, 장승업과 함께 조선 3대 기인 화가로 꼽히며, ‘한국의 반 고흐’라 불리우는 최북은 조선 후기 자기만의 예술에 대한 끼와 꾼의 기질을 발휘, 회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한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능호관(凌壺館) 이인상(李麟祥, 1710-1760) 등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최북은 그의 가계와 문집이 전하는 바가 없으나 예술적 면모, 괴벽스러운 성격, 다양한 교우관계 등이 최북을 아낀 이들의 문집이나 일기 속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출신 성분이 낮았던 최북은 직업 화가였다. 그림 한 점을 그려서 팔아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고, 돈이 생기면 술과 기행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말년의 생활은 곤궁했고 비참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사대부 중심에서 일반 서민 사회로 변화하는 문예부흥기라고 말하지만 천민 출신인 화가가 서야 할 자리는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호생관’이란 호는 ‘붓(毫)으로 먹고 사는(生) 사람’이라는 뜻으로, ‘칠칠(七七)’이란 자는 이름의 ‘북(北)’자를 둘로 나누어 스스로 각각 지은 것이란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고도 했으며,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도 불렸다.

 최북의 그림은 초기 남종화풍의 화풍에서 후기 조선의 고유색 진경산수화로 바뀐다. 천하에 놀기 좋아하고 구속받지 않으려는 자유분방한 기질 때문에 국내의 금강산, 가야산, 단양 등은 물론 일본, 중국까지도 다니면서,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숭상하는 당시의 경향을 비판하고 조선의 산천을 찾아 직접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삶의 각박한 현실에 대한 저항적 기질을 기행과 취벽 등의 일화로 남겼다. 그의 산수화는 물론 화훼, 영모, 괴석 등 모든 면에서 대담하고 파격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보였으며, 취미가 다양한 까닭에 시, 서, 화 삼절(三絶)의 화가였다. 아니, 최초의 직업 화가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북의 작고 연도는 정확치 않다. 1712년 출생하여 49세인 1760년 설과 75세인 1786년 설이 있다.

 200여년 전 사회의 변혁기에 그림이란 학문을 통해 진경산수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고자 했고, 가난하지만 자연과 함께 살아간 최북의 그림은 ‘표훈사도(表訓寺圖)’, ‘공산무인도(公山無人圖)’등이 있고 약 80여 점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 싫어 애꾸눈이 된 천재화가가 최북이었다. 어느 날, 권력자가 찾아 와서 산수화 하나를 그려 달라고 했다. 그리기 싫은 속내와는 달리, 권력에 못 이겨 억지로 작품을 만들었다. 물은 그리지 않고 산만 계속해서 그렸다. “아니 내가 산수화를 그려 달랬는데, 산만 그리고 왜 물은 그리지 않는가” 그랬더니 “그림 바깥은 다 물인지 아쇼”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그냥 그에게 줬다고 한다.

 또 언젠가도 권력자 한 사람이 찾아 와서 그림을 그려 달라고 졸라 댔다. 실랑이를 하다가 그냥 욱하고 받치니까 자기 문갑 위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 자기 눈을 딱 찌르고서는 “차라리 내 자신을 자해할 지언정 남에게 구속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애꾸가 되어 돋보기 안경 한 알만 샀다고 한다.

 최북이 죽고 난 후 신광하(申光河, 1719~1796)는 ‘최북가’를 지었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최북이가 눈 속에 죽은 것을. 담비 가죽 옷에 백마를 타는 이는 뉘 집 자손이냐. 너희들은 어찌 최북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고 득의양양 하는가. 최북은 비천하고 미미했으나 진실로 애닳도다. 최북은 사람됨이 굳세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호생관이라고 했다. 체구는 작달만하고 눈은 애꾸였지만 술 석잔만 들어가면 두려울 것 없고 거칠 것도 없었네. 최북은 북쪽으로 숙신까지 들어가 흑룡강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일본에 건너가 적안까지 갔었다네.

 (전략) 술을 찾아 미친 듯 노래하고 붓을 휘두를 적엔/큰 집 대낮에 산수풍경이 생겼다네/ 열흘 굶어 그림 한 폭 팔아서/취하여 돌아오다 성모퉁이에서 쓰러졌네//북망산 흙 속에 묻힌 만골에게 묻나니/어찌하여 최북이는 삼장설에 묻혔단 말인가/오호라! 최북이는 몸은 비록 얼어 죽었어도/그림 그리기 싫어 애꾸눈이 된 최북(崔北)!’


 그는 스스로 눈을 찔러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쓰고 여전히 그림을 그렸으며, 술을 즐겼고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했다. 주유 중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적도 있다.

 최북이 평양, 또는 동래 등지로 그림을 팔러 가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구하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한다. 말술을 즐긴 그는 말년에 남의 집 살이를 하다가 눈 오는 날, 만취해 성곽 구석에 쓰러져 얼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최북의 ‘자화상(종이에 수묵담채. 56*38.5, 18세기, 개인 소장)’은 그의 별칭(혹은 호, 자)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붓 하나로 운명을 건 비운의 아웃 사이더 화가. 그는 남아있는 한쪽 눈으로 속된 세계를 경멸하고 조롱했다. 그림을 잘 그려 명성을 얻은 최북은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굴욕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택한 지존의 화가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