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빙고의 원리와 의의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한다는 뜻의 ‘동온하청(冬溫夏淸)’.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유물로, 여름의 조선시대의 돌냉장고 ‘석빙고’와 겨울의 ‘김장독(미륵사지 출토 대형 토기)’이 있다.
경남 밀양 얼음골 얼음의 비밀 덕분에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자신의 주검을 보존, 제자에게 해부의 기회를 줄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그 자연을 배워 한여름에도 불편 없이 얼음을 먹고 살았다. 석빙고는 지난 겨울의 얼음을 녹지 않게 보관했다가 한여름에 쓸 수 있게 한 인공의 얼음골이었다.
얼음을 저장할 공간을 땅 속에 설치, 서늘하게 하는 한편 지붕은 흙으로 덮고 교묘하게 환기구멍을 설치해 가을까지도 걱정없이 얼음을 보관했다. 삼국사기에는 505년(신라 지증왕 6년) 빙고전이란 관청을 둬 얼음을 저장해 쓰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 민족이 일찍부터 얼음 과학에 일가견이 있었음을 입증한다.
우리 유산 중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것으로 석빙고를 꼽을 수 있다. 석빙고의 외견은 단순한 고분 형태다.
빙실 공간이 주변 지반에 비해 절반은 지하에, 절반은 지상에 있는 구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석빙고에 무슨 대단한 과학이 들어있냐고 할 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석빙고의 유래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노례왕때 이미 얼음 창고를 지었으며,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에도 505년(지증왕 6년)에 얼음을 보관토록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석빙고가 놀라운 것은 얼음에 치명적인 습기와 물을 제거하기 위해 비스듬히 만든 배수로, 빗물 침수를 막기 위한 석회와 진흙 방수층, 얼음과 벽 천장 사이에 단열재 역할로 채워 넣는 밀짚, 태양의 복사열을 차단하기 위해 지붕 위에 심어놓은 잔디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허투루 만든 것이 없다.
규모는 대부분 30평 이상, 적은 경우에도 10평이 넘었다. 석빙고에 저장하는 얼음의 두께는 12㎝ 이상이 되어야만 했다. 빙고의 바닥은 흙 다짐이나 흙 다짐 위에 넓은 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 생긴 물이 자연 배수되게 했다.
빙고 구조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빙실 천장을 아치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형식은 전체를 아치로 만든 구름다리나 성문들과는 달리 일정 간격으로 세우고 이를 구조재로 해 그 사이를 석재로 쌓거나 판석을 얹었다.
석재는 화강석으로, 규격은 대체로 0.5톤 정도. 석빙고 건축 때 철물과 회를 많이 사용했다.
철물은 석재와 석재 사이가 서로 분리되지 않도록 삽입했다. 회를 많이 사용한 것은 봉토 조성 때 진흙과 함께 혼합해 외부에서 물이나 습기가 침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용도였다. 천장에는 빙실 규모에 따라 환기 구멍을 만들었다.
또 석빙고는 여름 더위에 의해 생긴 양기를 얼음으로 억누르게 해 국가를 보호하는 의미도 지녔다.
여름에 항상 얼음을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은 세계적으로 거의 유례가 없다는 것을 부연하면 우리 조상들의 슬기에 으쓱해질 수 있다.
대한민국의 석빙고
석빙고는 현재 6기가 남아 전하는데, 모두 18세기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청도 석빙고, 현풍 석빙고, 안동 석빙고, 경주 석빙고, 창녕 석빙고, 영산 석빙고가 그것이다.
경주 석빙고(보물 제66호)는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 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1738년(영조 14년)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 이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동 석빙고(보물 제305호)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1737년(영조 13년)에 지어졌다. 낙동강 기슭의 넓은 땅에 강줄기를 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으며, 입구는 특이하게 북쪽에 옆으로 내었다.
창녕 석빙고(보물 제310호)는 창녕군교육청 앞 개울 건너편에 언덕처럼 보이는 유물이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해 두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했다.
청도 석빙고(보물 제323호)는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아치 형태의 홍예가 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석빙고 가운데 경주 석빙고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쌓은 연대도 오래된 것이다.
동,서로 뻗은 긴 구조로, 서쪽에 문을 두었으며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바닥이 보인다. 가운데에는 물이 빠지는 길을 두고 동쪽에 구멍을 만들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했다.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 현풍 석빙고(보물 제673호)는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쪽에 마련된 남향 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 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4개 틀어 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얼음 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 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영산 석빙고(사적 제169호)는 화강석으로 쌓은 조선 중기의 얼음 창고이다. 들어가는 입구가 높고 뒤로 갈수록 낮은,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거칠게 다듬은 큰 돌로 쌓은 네모진 형태이다. 창고가 있는 곳에서 바라다보면 빙고 뒤쪽 끝으로 개울이 있는데 지금은 물이 말랐다.
이는 상류에 제방을 쌓았기 때문이며 옛날에는 수량이 풍부했다고 한다. 다른 석빙고에 비해 약간 작은 규모이지만 쌓은 수법은 같다.
미니 박스:진안 풍혈냉천
우리나라에서 얼음골로 알려진 곳은 밀양의 천황산 얼음골, 의성군 빙혈(氷穴), 진안군의 풍혈(風穴), 냉천(冷泉), 울릉도 나리분지의 에어컨굴 등 네 곳이다.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양화마을 대두산의 곳곳에서는 한여름에도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온다. 자연이 만든 냉장고인 셈이다.
'풍혈’은 한여름에 에어컨처럼 찬바람이 나오는 바위 구멍이고, ‘냉천’은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솟는 샘으로, 조선시대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20평 정도의 동굴인 풍혈은 예전에는 얼음이 얼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영상 4도 정도의 찬 공기만 스며 나온다. 풍혈을 찾은 사람들은 저마다 구멍을 차지하고 마치 모닥불을 쬐듯 냉기를 즐긴다. 여름철엔 마을 주민들이 김치저장고로 이용한다.
풍혈 옆 냉천에서는 돌 틈에서 사철 3도의 찬물이 나온다. ‘한국의 명수’로 꼽힐 정도로 맛이 좋고, 특히 허준이 약을 짓던 물이라고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샘물을 모아놓은 웅덩이에서는 2-3분 이상 손발을 담그기가 어렵다.
'한국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어를 알면 불교가 보인다 (0) | 2010.04.06 |
---|---|
범종 꼭대기에 용머리를 붙인 까닭 (0) | 2010.04.06 |
광한루의 토끼와 거북의 상징 (0) | 2010.04.06 |
숭례문 현판 옛 모습으로 거듭나다! (0) | 2009.07.03 |
흥미진진, 문화의 원조 전쟁 (0) | 2009.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