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천년만년을 살 수는 없겠지만 죽는다는 것은 언제나 슬픈 일인 것 같다. 무병장수는 중국 진시황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꿈과 희망의 로또복권이다.
백성들의 피를 빨아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만들어 놓은 그는 삼천 궁녀를 거느린 채 천하를 주유하면서 천년만년 살고자 하였지만 결국 참담하게 죽게 되었고, 백전백승 초패왕은 오강에서 자결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서도 보통 사람의 처량함이 없던 단 한사람 장자. 죽음을 자연의 변화로 본 장자는 그래서 “노상에서 죽은 해골을 보고 슬퍼하지만, 정작 해골은 죽음이 나쁘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는가”라고 반박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하며, 유한으로 무한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게 그의 가르침이다. 결단코 우리의 언어, 인식 등은 자신의 관점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스스로 내린 결론이 모든 것에 대해 동등하게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장자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은 없고, 칠백 년을 살았다는 팽조는 일찍 죽은 자일 뿐이란다. 900년을 넘게 살았다는 성경 속 전설적인 인물 무드셀라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장자는 아내가 죽자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장자는 그 일화에서 울지만 않았다 뿐 아내의 죽음에 슬퍼했다.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단지 꺼이꺼이 울고 곡하는 것만이 슬픔의 표현은 아닐 터.
무병장수의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욕심을 버리고, 편함을 찾지 않으며, 늘 움직이고, 낙관적으로 사는 데에 있다.
금도끼로 찍어낸 계수나무로 집을 짓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우리는 오늘도 애오라지 무병장수의 꿈을 꾼다.
암스트롱이 첫발을 내디딘 달나라. 그곳은 이야기가 있고 신비가 있으며, 우리와 똑같은 삶이 있다.
우리의 생명은 고요 속에서 탄생되었고, 그 삶은 종착역에서 새벽 첫차를 기다리고, 모든 것이 끝난 굿판에서도 뒤풀이로 새 삶을 일구어 낸다.
보름달을 자세히 살펴보면 계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바로 그 옆에는 옥토끼 한마리가 쉬지 않고 방아를 찧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참으로 슬프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옥토끼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신선의 도를 닦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해 활활 타는 불속에 제 몸을 던져 스스로 먹을 것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의 주인공이란다.
그러므로 불사의 약을 상징하는 달나라의 계수나무로 만든 초가삼간은 부-자-손이 천년만년 함께 살아가는 ‘삼세동당(三世同堂)’의 오랜 한국인의 꿈이요, 여망이다. 물질의 충족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꿈을 채우려는 더 큰 욕망인 셈이다.
신윤복의 풍속도첩 ‘월하정인(月下情人)’처럼 달빛은 쓰개치마를 머리에 쓴 밀회의 아리따운 여인을 감싸주고 있으니 우리의 정서인 셈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빗자루를 탄 마녀들이 보름달을 등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 둥근 달 속의 실루엣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필버그의 영화 'ET'의 한 장면도 바로 그런 이미지에서 나온 것이다.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남원 광한루. 광한루원은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을 상징하는 광한루와 지상의 낙원인 삼신산이 함께 어울려 있는 아득한 우주관을 표현하고 있다.
광한루의 호수는 곧 하늘의 은하수가 된다.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데 썼다고 하는 지기석을 호수 속에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너 직녀를 만날 때 사용한 배를 상한사라 이름하여 호수에 띄워놓았는데, 이것은 바로 견우와 직녀의 오작교 전설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적303호로 지정되어 있는 광한루원의 광한루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커다란 자라돌(거북돌, 이하 같음)이 있다.
이것은 삼신산(영주산. 봉래산. 방장산)과 함께 광한루원이 천체를 상징하는 구성 요소중 하나로, 이것을 지칭하는 이름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 자라돌(石鰲, 석오)이며 다른 명칭은 거북돌(石龜, 석구)이다.
광한루 기둥 위에는 토끼를 업은 거북이 장식되어 있으며, 광한루 앞편에는 큰 돌 거북 한 마리가 못으로 뛰어 들어 가려는 듯한 자세를 볼 수 있으니 용궁 세계를 향한 염원을 머금고 있다. 용궁은 이상향이자 선계이지만 갈 수 없는 곳인 만큼 정원 속에 상징물들을 배치하여 현실 세계에 용궁을 구현했던 것이다.
즉, 용궁까지도 염두에 두고 조성된 정원이라는 것을 그 거북 석상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광한루 기둥 곳곳에 장식된 거북 등에 올라 탄 토끼의 조각상들도 바로 그 선명한 증표들이다.
토끼와 거북이 형태의 광한루 화반(花盤)은 거북이의 등에 탄 토끼가 광한루를 용궁길로 인도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건물 정면 중앙칸 화반벽에 자라등 위에 토끼 모양을 조각하여 끼워졌다.
바로 이러한 조각 형상은 수궁가에 나오는 자라와 토끼를 상징한다. 자라는 죽음을 무릅쓰고 토끼의 간을 구하러 육지로 나오는 충신의 상징이요, 토끼는 번득이는 기지로 용궁을 탈출한 지혜의 상징으로 암울했던 당시 사회상을 극복하려는 선조들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삼단(三段)의 층교(層橋)를 조성한 월랑(月廊)도 관심사다. 건물 북쪽 중앙에 삼단의 층계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점점 기우는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고종 때 만든 것이다.
월랑은 처음 두 계단을 올라서면 땅속, 다시 세 계단을 올라 인간세상, 마지막 네 계단을 올라 신선들의 세계에 이르는 형태로 되어 있다. 바로 이 월랑에는 코끼리를 조각해 두었는데, 이는 누각을 무너지지 않게 잘 짊어지도록 하기 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광한루 앞 오작교 입구에 화강암으로 곱게 깎아 만든 큰 자라돌은 삼신산(영주산, 봉래산, 방장산)을 바라보고 있다.
자라돌은 길이 2.4m, 폭1.2m, 높이1.2m다. 머리는 멀리, 지리산과 견두산(남원시 수지면 고평리)을 향하고 있으며, 이곳에 자라돌의 위치를 정한 까닭과 자라돌을 두게 된 연유는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남원지’의 기록에는 석오를 자라로 보느냐 거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른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온다고 되어 있다.
그 하나는 광한루원이 우주를 상징하는 정원으로 꾸민 신선사상에 연유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원의 풍수지리와 연관된 것이다.
전자의 연유를 살펴보면, 하늘의 태을이 내려와 노니는 곳을 삼신산이라 한다. 이 삼신산은 동해에 사는 어마어마하게 큰 자라가 등에 업고 있다는 신선사상의 이상적인 전설에 따라 만들어진 자라돌이다.
또 다른 전설은 이 석오를 자라가 아닌, 거북으로 보기도 한다. 지리산은 남원에서 바라보면 동남방에 위치한 셈인데 예로부터 지리산에 동남풍만 불어오면 천재지변이 잦았다 한다.
이따금씩 나쁜 유행병이 퍼져 인명이 상하거나 화재, 홍수 등의 재앙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오행설에 의하면 이러한 동남풍을 제압하려면 동해에 사는 거북의 힘밖에 없다하여 광한루에 이 거북상을 만들었다. 그후부터는 동남풍으로 인한 천재지변이 없어졌다고 한다.
호석(虎石, 호랑이 돌)은 완월정 뒷편(서문쪽)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광한루원 경내에 있지 않았으나 1986년 확장공사시 편입되었다고 한다.
이 호석은 조선조 영조때 전라감사 이서구의 명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석오와 비슷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수지면 고평리에 있는 견두산은 속칭 개머리산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이름은 호두산이었으나 이 호석이 설치된 후부터 견두산이라 했다.
옛날 이 호두산에는 들개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어 이곳의 개들이 한바탕 짖어대면 그때마다 남원부중에 호환이 일거나 큰 화재가 일어나 많은 익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는 괴변이 일어났다.
바로 이러한 호환을 막기 위해 호두산을 견두산으로 개명했음은 물론 부중에 호랑이를 깎아 만들어 놓으면 호두산의 들개 짖는 소리와 호환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전라감사 이서구는 남원부사에 명하여 호석을 설치토록 했는데, 그 후로 호환과 재난이 씻은듯이 없어졌다고 한다.
광한루원 경역이 확장되기 전에는 이 호석은 남원시장에 있었으며 호석이 있던 자리를 호석거리라고 불렀다.
언제부터인가, 이 호석을 광한루원 경내로 옮겼는데, 또 다시 재난이 일어나 본래의 자리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남원시 수지면 고평리 마을회관 앞마당에도 이와 똑같은 호석이 견두산을 향해 놓여 있다.
미니 박스:소쇄원에도 오암(鼇巖)
오암(鼇巖)은 자라 혹은 거북모양의 바위이다. 48영의 제4영 ‘부산오암(負山鼇巖)’은 ‘첩첩 청산을 등에 지고 푸른 계류를 향하여 머리를 돌렸네. 긴긴 세월 자리 잡혀 놀지 않으니 대각(臺閣)이 영주(瀛州)보다 오히려 낫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뒷산인 청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의 계곡 물을 바라보는 위치를 짐작케 한다.
소쇄원 오곡문 담장 바로 밖에 있는 약 20m 가량 되는 큰 바위를 지칭하는 게 오암이다. 자라처럼 누웠으며, 그 위로 계곡물이 흐르고 뒷산을 지고 있는 형국이다.
오암에는 석간수 우물이 있으며, ‘오암(鼇巖)’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으나 1970년대에 글씨는 훼손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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