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열이 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란 소설을 읽고 전율했던 적이 있다. 유년시절 학교 주변을 어쩌면 저리도 잘 묘사해 냈을까 하고 탄복을 했다. 시골 초등학교 5, 6학년 교실을 중심으로 ‘엄석대’라는 한 가공 인물의 권력 형성과 몰락을 실감나게 그려낸 이 소설은 영웅부재의 이 시대, ‘지금 우리들에게 일그러진 영웅이라도 남아 있는가’ 하는 의문은 지금도 계속된다.
어린 시절 접했던 나폴레옹, 링컨, 간디, 이순신, 강감찬, 세종대왕 등의 역사적 인물들은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영웅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영웅들은 과거 역사속에서만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지을 수 없다.
이는 아마도 1인 독재의 험난한 세월을 경험한 뒤 민주적 제도와 가치관이 보편화되고, 실증적인 연구가 축적되어 정보의 성역이 무너짐에 따라 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위엄이 상실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특히 국가의 통치자들은 더 이상 우리의 영웅이 아니다. 하지만 영웅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허전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스타를 영웅처럼 숭배하곤 한다. 이제는 예전처럼 우리의 영웅이 대정치가나 장군이 아니라,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되어버렸다.
이처럼 세상이 많이 바뀌어 우리 모두는 좀더 현실적인 희망을 갖게되었지만 여전히 영웅이라는 단어속에는 아련한 향수와 삶에 대한 의욕을 느끼게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우리가 시대를 초월해 영웅 이야기에 계속 끌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다수가 영웅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유년시절의 순수를 쉽게 잃어버리고, 세상살이의 허상과 권모술수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 까닭이다. 어린 시절 흠모했던 고관대작을 지낸 인사도, 수천 억원을 주무르는 재벌 회장도 더 이상 추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영웅 부재의 시대란 수사가 자꾸 소란스러워지기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들 모두는 영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민선 자치시대 이후 난세를 극복하는 영웅, 특히 인물 선양 프로젝트가 지체별로 멀미가 생길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영웅이 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희망이 영웅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을 대상으로 하는 축제가 전국적으로 7곳이나 진행되고 있으며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아 차별화와 지역적 색체가 더욱 요구된다.
민선시대 이후의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하루에도 몇 개씩 생기는 축제, 그리고 대동소이한 드라마세트장이 아닐까 한다.
특히 문화관광자원을 둘러싼 지방자치단체들간의 다툼이 치열해지고 있다. 재정 확충을 위해 다양한 명목의 축제와 관광 상품을 경쟁적으로 개발, 유무형의 지역 문화자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지자체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이들 지자체는 불상 등 문화유산, 반딧불이 등 자연자원, 홍길동이나 심청, 흥부 등 설화나 전설속 주인공에 대한 지역연고 ‘원조(元祖) 다툼’이 치열하다.
서로가 자기 고장 출신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관련 기념사업까지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일부 자치단체들은 선점 효과를 높이기 위해 무리하게 예산을 투입, 과잉 중복 투자에 따른 예산낭비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지자체간 원조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역사의 상품화를 통해 돈벌이가 가능한데다 중앙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런는지.
실제로, 역사인물 캐릭터 상표의 경우, 대부분 지역연고가 있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직접 출원하여 등록된 것으로 고장을 알리는 홍보 상징 및 지역 특산품에 적극 활용하여 지역도 알리고, 돈도 버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남 장성군과 강원도 강릉시는 최초의 한글 소설속의 주인공인 ‘홍길동’을 둘러싸고 ‘원조논쟁’을 벌이고 있다.
강릉시는 지난 1998년 자체 개발한 홍길동 캐릭터를 특허청에 상표 등록했다. 이듬해 등록한 장성군에 비해 원조격이라는 게 논리 개발의 까닭이다.
현재 전남 장성군은 옛 문헌 등을 제시하며 8만여 평 규모의 테마파크 건립을 추진중이다.이에 강원도 강릉시는 홍길동의 작가(허균)가 소설을 집필했던 곳이 연고 지역이라며 캐릭터를 개발, 상표등록까지 마쳤다.
심청전의 무대를 둘러싸고 전남 곡성군과 인천시 옹진군의 줄다리기도 치열하다. 곡성군은 최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함께 국내.외 현장조사와 관련 사료의 분석을 통해 효녀 심청은 1천7백년전 이 지역의 실존 인물이며 몸을 던진 인당수는 전북 부안군 위도 해역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인천시 옹진군은 이미 30여 억원을 들여 영화, 판소리, 소설자료 등을 갖춘 심청각까지 군내에 건립해 놓고 있다.
울산지역에서는 해맞이행사를 놓고 지자체간 경쟁이 치열하다. 북구는 정자해안, 동구는 울기공원(대왕암), 울주군은 간절곶이 각각 해맞이가 가장 아름답다거나, 해가 먼저 뜬다거나 하는 식으로 홍보하는 등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경남 거창, 산청, 함양군과 전북 순창군 등은 빨치산 유적지 사업을 경쟁적으로 펼치고 있다. 전북 무주군과 경기도 성남시, 양평군 등은 반딧불이사업을 두고 상표권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전북 장수군과 경남 진주시는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몸을 던진 논개의 연고권을 주장, 경쟁적으로 두 곳에서 각종 행사를 벌이고 있다.
장수군은 1996년부터 94억원을 들여 사당.생가를 복원하고 매년 음력 9월 3일 ‘논개 제전’을 여는 등 각종 행사를 벌인다. 이에 맞서 진주시 향토사학자들은 ‘논개의 고향은 진주’라며 그녀가 목숨을 잃은 음력 6월 29일에 논개 제향, 9월 9일엔 의암별제(기생들의 추모별제) 를 지낸다.
정력의 화신인 변강쇠를 놓고 전북 남원시와 경남 함안군이 벌이는 신경전도 팽팽하다. 전북 완주군과 김제시는 설화 ‘콩쥐 팥쥐’의 고향이 서로 자기 지역에 있다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완주군은 1919년 출간된 박건회의 소설 ‘대서두서’에 콩쥐 팥쥐의 고향이 ‘전주 서문 밖 30리’로 묘사돼 있는데 이곳이 이서면 앵곡마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김제시는 ‘전주 서문 밖 30리’는 금구면 둔산마을 일대라고 항변하고 있다.
‘별주부전’의 무대를 놓고도 경남 사천시는 서포면 비토섬, 충남 태안군은 남면 원청리라며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전북 익산시와 인접한 충남 부여군의 서동(백제 무왕) 쟁탈전도 치열하기만 하다.
그런데 역사 속의 인물 중에서 상표로 가장 선호되는 인물 캐릭터는 누구일까.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권력이나 학식이 높은 고결한 사람보다는 의적, 천한 신분의 사람, 풍류를 즐기는 사람을 선호하고, 마음씨 착하고 순한 사람보다는 욕심 많고 근성 있는 사람, 성적매력이 넘치는 사람,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한 사람 등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허청이 파악(2007년 기준)한 역사 속 실존 인물과 소설 속의 인물중 캐릭터 상표로 가장 많이 출원, 등록된 1위를 살펴보면 ‘역사 속 실존인물’의 경우, 탐관오리를 척살한 남성미 넘치는 의적 ‘임꺽정’으로 68건이 등록되었다. 소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 고향인 괴산군에서 52건, 임꺽정의 출생지인 양주시에서 16건을 등록했다.
또, ‘소설속 인물’ 1위는 의적 ‘홍길동’으로 152건이 등록됐다. 홍길동의 작가 허균의 고향인 강릉시와 홍길동의 출생지로 주장하는 장성군에서 각각 140건, 12건을 등록한 것.
한편 ‘역사 속 실존인물’ 2위는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로 84건을(논개가 왜장과 함께 투신한 남강이 있는 진주시에서 22건 등록, 논개의 출생지인 장수군에 62건 등록),
3위는 해상왕 ‘장보고’로 장보고의 해상활동 근거지인 완도군에서 15건을, 4위는 방랑시인‘김삿갓’으로 김삿갓의 묘지가 소재한 영월군에서 14건을, 5위는 ‘세종대왕’으로 세종대왕 능이 있는 여주군 및 여주농협 등에서 9건을 등록했다.
또, ‘소설속 인물’ 2위는 욕심 많고, 마음씨 나쁜 ‘놀부’로 63건이 등록된 반면 마음씨 착한 ‘흥부’는 흥부네로 3건이 등록되었을 뿐이다. 3위는 ‘변강쇠와 옹녀’로, 변강쇠와 옹녀의 지역연고가 있는 남원시와 함양군에서 각각 20건, 2건을 등록했다.
4위는 소설 토지의 주인공인 ‘서희와 길상’으로 하동군에서 21건을, 5위는 1년에 한 번 칠월칠석에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견우와 직녀’로 3건이 등록된 것으로 확인됐다.
춘향전 관련, 이몽룡은 3건, 성춘향은 2건, 변사또는 1건으로, 다른 역사 인물 캐릭터들은 주로 지차체가 등록을 한 반면 춘향전 관련 캐릭터들은 현재까지 사업가들이 등록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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