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전주서 거주한 한국화가 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 1904-1989)화백의 삶과 예술을 살펴볼 수 있는 ‘이응노 미술관’이 3일 오후 3시 박성효 대전광역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대전 서구 만년동에서 개관식을 가졌다.
지난 2005년 9월 착공, 모두 57억원이 투입된 이응노 미술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 연면적 1650㎡ 규모로, 프랑스 건축가 로랑 보두앵이 설계, 백색 콘크리트를 이용해 지은 건물이다. 미술관은 현재 고암의 부인 박인경(82)여사(명예관장)로부터 기증받은 2백 여 점의 작품을 소장, 앞으로도 추가로 계속 기증받을 예정이다.
개관 기념으로 오는 8월 26일까지 ‘고암, 예술의 숲을 거닐다-파리에서 대전으로’라는 주제의 특별전을 연다. 문자(文字)추상과 ‘군상(群像)’ 등의 회화를 포함, 조각, 세라믹 등 고암의 작품 48점이 선보이고 있다.
이응노는 충남 홍성으로 해강 김규진에게 사사, 홍성, 예산, 전주를 거쳐 일본의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홍익대학, 서라벌예술 대학의 동양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1958년 파리로 건너가 정착한 후 ‘문자추상’과 ‘춤추는 인간 군상’ 연작을 발표했다.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1964년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세워 서예와 문인화 등을 가르쳤다. 폴 화게티 갤러리(Galley Paul Facchetti) 등 프랑스의 저명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박명예관장은 고암이 생전에 동백림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는 등 대전과의 인연을 강조하면서 “이화백의 고향인 홍성과도 가깝고 교통 요충지로 많은 사람이 관람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명예관장은 1958년 프랑스로 넘어가 고암 이응로 화백과 함께 ‘동양미술학교’를 설립,서양인들에게 동양화의 세계를 알려왔으며, 고암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지속하고 있다. 박명예관장이 서울 평창동에서 운영하던 이응노미술관은 2년 전, 문을 닫은 바 있다. 문의 (042) 602-3270-4.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2.이응노와 전주 생활
고암이 전주에 정착한 때는 1928년으로 24세의 청년이었다. 전주시 중앙동 4가 25번지에서 ‘개척사(開拓社)’란 점방을 열고 간판을 그리는 한편 건물을 도장(塗裝)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신사구락부’란 모임도 조직했었다고 전한다.
당시 그는 틈만 생기면 효산(曉山) 이광렬(李光烈, 1885-1966)댁에 드나들었다. 효산은 고암보다 19세 연상으로, 서예와 사군자로 조선 예단(藝壇)의 중견 작가였으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고암은 효산으로부터 예술에 대한 조예를 쌓는 한편 사사로운 일에 있어서도 친숙한 사이로 지내왔다. 제3회 선전 사군자부 입선에 이어, 전주에서 출품한 작품으로, 1930년 제9회 선전 사군자부에서 ‘풍죽(風竹)’과 ‘청죽(晴竹)’이 입선됐다.
1931년 제10회 선전에는 ‘대죽(大竹)’과 ‘풍죽(風竹)’, ‘청죽(晴竹)’, ‘분죽(盆竹)’, ‘매(梅)’ 등 네 폭의 작품이 한꺼번에 입선되고, 특선으로 이왕직(李王職)의 상을 받기도 했다. 이때 고암은 ‘죽사(竹史)’란 호를 가지고 출품했는데, 효산이 지어준 호로 알려져 있다. 전주에서 여덟 해를 보낸 고암은 1935년 일본에 건너가 동경본향회연구소 서양학과에 들어갔다.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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