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영 '죽유집' 통해 고향 완주를 노래하다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구영(具塋, 1584~1663) 선생의 문집 '죽유집(竹牖集)'은 완주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장소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구영은 조선 중후기의 학자로, 인조반정 이후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면서 안정과 개혁을 추구한 인물이다.
구영의 시 216수와 만사, 제문 등을 수록하여 1668년에 간행된 시집 및 문집입니다. 그의 학문적 견해와 생활상, 당시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완주군 고산 백현리 출신으로, 작품에 고향 이야기가 등장한다.
구영이 1626년 활인서 별좌가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게 되었을 때 읊은 '병인년 활인서 별좌로 부임하는 아침에 전별하는 자리에서 차운하다(丙寅以活人暑別坐赴朝餞席次韻)'이다.
세상 구제하는 일 내가 어찌 감히 하리오
작은 관직인 확인서가 알맞네
숨어 살던 곳을 물러나 하직하고
느즈막에 한나라 조정 신하가 되네
濟世吾何敢
微官稱活人
却辭棲隱處
晚作漢廷臣
죽유는 기본적으로 고향 완주 고산을 은거하는 곳인 '서은처(棲隱處)’로 인식하고 있었다.
서은처는 시끄러운 세상살이에서 한발 물러나 은거한다는 표현으로, 벼슬길에 나가기 직전 죽유에게 고향은 숨어 살던 곳 '서은처' 정도의 심상을 가진 곳이었다.
그러다가 한양이라는 낯선 타향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면서 죽유는 타향에서의 장소감을 확인하고 고향을 근원적인 그리움의 장소로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는 벼슬살이를 위해서 고향을 떠나 있었던 시기에 고향에 대한 다수의 시를 남겼다.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다(見鄕書)'
수각교 근처 꿈
삼기정가에서 나네
오늘 아침 고향에서 소식 있으니
천리 밖에서 관복을 보냈네
水橋橋邊夢
三奇亭畔飛
今朝有鄕信
千里寄朝衣
수각교(水閣橋)는 현재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한양 남대문 근처이며, '삼기정(三亭)'은 고향인 완주 고산 지역에 있는 정자이다.
구영은 꿈속에서 삼기정가를 나는 장면을 통해 고향을 그리워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삼기정은 냇물, 돌, 소나무 세 가지 기이한 것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으로, 구영에게는 고향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의 하나이다.
현실 세계에서 화자 구영의 몸은 수각교에 있지만 꿈속에서도 그리며 날아가고 싶은 장소는 삼기정이다.
고향에 대한 죽음의 그리움이 고향의 가족에게도 이심전심으로 닿았는지 죽유가 삼기정을 나는 꿈을 꾼 날 아침에 고향에서 편지(鄕信)와 함께 관복을 지어 보내온다.
이 시는 1구 '수각교'를 제외하고, 시 전체가 온통 고향이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어휘들로 채워져 있다. 2구의 '삼기정', 3구의 '고향 소식', 4구의 '천리밖'이나 '관복'이 모두 고향을 직간접적으로 지칭하거나 은유하고 있다.
관복은 언뜻 보면 관직 생활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선시대 남편이 고향집을 떠나 한양이나 기타 지역에서 벼슬 생활을 하는 경우, 고향에서 아내가 관복을 지어 보낸다.
따라서 '관복'은 고향과 고향의 아내를 은유하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권대업의 시에 차운하여(權大業韻)'
삶은 미나리 먹을 수 없고
보리밥 지어 먹으니 이전의 살이 빠지네
온갖 일 제치고서 베개 높이 베고 쉴 뿐이니
산바람에 비가 사립문에 가득하네
煮芹無可口
炊麥失前肥
萬事惟高枕
山風雨滿扉
고향 고산은 보리밥을 지어 먹어야 하는 곳으로, 곤궁함으로 인해 살이 빠지는 곳이며, '산풍(山風)과 비가 사립문에 가득한 곳'이지만 '베개 높이 베고 쉬는' 생활이 가능한 곳이다.
넉넉하지 않은 변방의 벽촌이지만 어떤 공간 안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다는 것은 그곳을 안식처로 여기기 때문에 가능하다.
객관적으로 그 장소가 보잘것없거나 혹은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 처한 곳일지라도 '베개 높이 베고 쉴 수 있는 곳'은 원주민으로서 무의식적으로 빠져들 수 있는 장소이다.
그곳과 완전하게 동일시되어 실존적 내부성을 경험하는 장소다.
'운제에서 백운사 혜원선사 시에 화답하다 (雲梯和白雲寺惠遠師詩)'
내가 고산 곳곳의 산을 사랑하나니
운제는 어찌 백운 한가로운 것과 닮아 있는지
운제에서 백운사 스님과 만나게 되어 백운의 가을날 차가움을 말하네
吾愛高山處處山
雲梯何似白雲閑
雲梯逢着白雲釋
却說白雲秋日寒
운제(雲梯)와 백운(白雲) 어휘가 반복되며 의미 맥락이 이어지는 시이다.
여기에서 운제는 고산의 별칭이다.
완주군 고산은 곳곳에 빼어난 산들이 있는 곳이다.
죽는 '고산 곳곳의 산'을 사랑한다고 선언하며 운제가 '백운(白雲) 한가로운 흰 구름과 닮아 있다'고 표현한다.
물론 절의 이름 '백운사'의 언어유희이기는 하지만, 죽유에게 고산은 백운처럼 한가롭고 평화로운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그런 백운이 있는 고산의 산들은 토포필리아적인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이규보는 고려 때 전주목 사록(司錄)을 하다 떠난 뒤 ‘운제현’에서 홍수가 났다는 말을 듣는다.
‘운제는 내가 전에 다스리던 완산(完山)의 속군(屬郡)이다. 그 고을이 암곡(巖谷) 사이에 있어 산이 높고 험하기로는 다른 군에 비하여 으뜸이고 또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지도 않았는데, 하루저녁 장맛비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소용돌이 쳐서 한 고을이 몽땅 떠내려갔으므로 죽은 이민(吏民)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나무 위에 올라가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이 열에 한둘 정도였다 한다. 완산의 옛 관리가 와서 나를 찾아보고 경위를 자세히 들어 말하고서 ‘이 고을에는 옛적부터 일찍이 이와 같은 피해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이런 일이 있으니, 이 무슨 재변입니까?’ 하므로, 내가 측은하게 감탄하면서 시를 지어 애도했다'
운제현(雲梯縣)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완주군 화산면, 운주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통치구역이다.
운주면은 옛 운제현의 동쪽이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대에 백제의 지벌지현(只伐只縣)을 바꾼 이름으로 고려시대에 운제현이라 불렸다. 1392년(태조1년)에 고산현에 통합됐다.
그는 칠월 삼일 ‘운제현’ 에 큰물이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었다.
‘한 나라가 일어난 지 삼십 년에 황하가 산조현에서 터졌고 그뒤 원광 연간에 이르러 또 호자에서 터져서 설상이 이미 떠내려갔고 동쪽의 회수와 사수로 쏟아져 들어가니 긴 대나무와 돌들이 재앙을 당했고 스스로 백성만 번거롭혔을 뿐이었지 이는 비록 옛날의 차탄하던 바였지만 또한 하수가에 살았기 때문이었네 내가 일찍이 운제를 보니 바로 산 속에 있었네 산은 백 길이나 높았으며 흙탕물이 닿지 않는 곳이요 곁에는 한 가닥 냇물도 없었는데 큰 물이 어디로부터 밀어닥쳤을까 설사 하늘에까지 창일하는 수재가 있을지라도 산에 의지하면 오히려 피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올해의 비는 평지에서도 겨우 한 자 남짓 했음에랴 강 곁의 여러 고을도 떠내려간 집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산 속 고을이 도리어 물고기 집으로 변하였는가 처음 듣고는 미덥지 못하여 혼자 마음으로 그럴 리가 없다 하였는데 오늘 아침 옛 관리 만나서야 자초 경위를 자세히 알았네 물이 산을 덮친 것이 아닌 산이 예측 밖의 물을 토하여 비유컨대 지붕에 물병을 세우고 아래로 쏟는 형세와 같아 중지시키기 어려웠다네. 어찌 가장 높은 봉우리에 나는 새가 앉을 만한 곳이 없었으랴마는 물이 산으로부터 쏟아졌으니 올라갈 길을 어느 겨를에 찾겠는가. 오직 오래된 고목나무 가지가 높아서 자못 믿을 만하여 빠른 사람은 가장 먼저 올라가 원숭이처럼 까마득히 매달려 있고 느린 사람은 올라가지 못한 채 물에 빠져 푸푸거리며 놀란 눈알 희번덕거렸으니 하물며 파리하고 약한 사람이랴 마름같이 떠서 물결따라 떠내려 가다가 돌에 받쳐 으깨어지기도 하고 뗏목따라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기도 하였네 비 그치고 물결 다시 마르니 그 혼란한 상황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그중에 교활한 아전들이야 비록 죽더라도 이치에 당연한 것이 평소에 그 얼마나 침탈하여 백성의 고혈로 제 몸 살찌웠던가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이야 무슨 죄인가 하늘의 뜻 참으로 모르겠네 우 임금 다시 나지 않으니 늙은이 부질없이 눈물만 흘리네’
옛날 신라가 백제를 이기고 이 땅을 점령 ‘운제현(雲梯縣)’이라 한데서 비롯하니 1,300년을 이어 온다.
그런데 아전의 ‘행위’가 나빴기 때문에 행장을 숨겨야 했지만 그대로 썼다. 그는 ‘남행월일기’를 통해서도 운제현 사연을 적었다.
마령과 진안 사람들은 얼굴이 잔나비 같고, 꾸짖거나 나무라면 놀란 사슴처럼 금방 달아날 듯 사람됨이 질박(質朴)하여 꾸밈이 없고, 술상이나 음식은 문화가 뒤떨어진 야만적인 풍모기 엿보인다고 했다.
산을 감돌아 운제까지 갔고, 운제를 지나 고산까지 가는 데는 길이 좁고 고개가 만 길이나 높이 솟아 있어 말을 타고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가 고향으로 완전히 귀향한 후 고산 근처에 있는 화암사를 방든하고 읊은 시로, 장소적 특징을 잘 살려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
'화암사에서 노닐다(遊花巖寺)'
아스라이 먼 화암사
부여잡고 오른 느낌의 여운
때는 동지 지난 후고
자취는 눈이 막 갠 처음이네
돌은 이끼 무늬 끼어 미끄럽고
창은 구름 그림자 머금어 텅 비었네
상방에는 장로 없는데
밝은 달빛은 뜰에 가득하네
迢遞花巖寺
臍攀感遇餘
時當冬至後
跡趁雪晴初
石戴苔紋滑
窓含雲影虛
上房無長老
明月滿庭除
이 시에는 화암사의 장소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아스라이 먼 곳에 있는 화암사는, 부여잡고 오를 만큼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시인이 방문한 때는 동지가 지난 후이고, 눈이 막 갠 뒤 시인이 그 눈을 처음 밟는다.
화암사의 돌은 이끼가 끼어 미끄럽고 창문에는 구름 그림자가 머물러 있는데 상방에는 스님은 없고 밝은 달빛만 뜰에 가득하다.
장소의 경관을 묘사하듯, 형상화하고 있는데, 거기에 시인의 장소 경험이 고스란히 경관과 함께 배치되어 있다.
'부여잡고 오른 느낌의 여운(臍攀感遇餘)'이라는 구절 속에 아득히 높은 곳에 올라 화암사에 도착한 뒤에 느끼는 시인의 감흥이 한껏 전달된다.
'나는 화암사를 사랑한다'는 식의 언급은 없지만, 이 시 속에는 화암사에 대한 화자의 감동과 애정이 느껴진다.
죽유의 고향 시들을 정리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구체적인 지명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고향의 풍광을 읊은 시가 대단히 많다.
미나리, 보리밥, 산바람, 사립문, 비, 개구리 울음소리, 뱀, 길어지는 해, 치자나무꽃, 도리화, 봄추위, 매화, 초당, 제비, 토끼, 꾀꼬리, 푸른 산, 매미, 뽕잎주, 서리, 섬돌, 가을, 봄 등 구영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 또는 그 공간 주변의 풍광들을 생동하게 하여 그곳의 실제성을 증거한다.
한편 실제 지명을 언급하며 구체적인 장소를 노래하고 있는 시들도 상당히 많다.
삼기정(三奇亭, 고산면에 있는 정자), 운산(雲山, 완주 화산면 지명), 운제(雲梯, 고산의 별칭), 백운사(白雲寺, 고산에 있는 절), 주홀헌(柱笏軒, 완주객사), 완주 용계, 화산, 정안당(靜安堂), 화암사, 안심사 적설루, 백현사 등이 시제로 쓰이고 있다.
이밖에 주변 지역인 익산 용화산, 전주의 견훤고성 등도 등장한다.
삼기정이나 정안당, 화암사, 안심사, 백현사 등은 현재에도 남아 있는 등 바로 이같은 시들을 통해 조선시대 고산의 장소성을 살펴보는 데 용이하다(이종근의 글과 김영미(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의 '구영의 죽유집에 나타난 완주의 장소성'연구(전북학연구 16집) 참조해 정리, 작성)
죽유집
죽유집
삼기정(강암 송성용 선생 휘호)
삼기정유허비
삼기정
화암사
화암사
화암사 우화루(상), 목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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