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의선사와 전주 한벽당, 그리고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가 대흥사로 돌아가는 과정서 어려움, 정학연(丁學淵)이 전주 현감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되는 글
1858년 경,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한양에서 대흥사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곤란했던 경제적인 어려움은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1783~1859, 다산의 아들)이 전주 현감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되는 글을 통해 밝혀졌다.
'전주 아전(지금은 혹 퇴거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김재모(아전의 이름은 자주 바뀝니다. 반드시 자세히 물어 본신 후에야 그가 전에 쓰던 이름을 알 것 입니다 ), 자(字)가 가범이라는 사람이 해남 초의선사에게 제 선친의 필첩을 속여 취하여 서문에 사는 모씨(某姓)에게 팔아먹었다고 합니다.(그 사람의 이름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는) 선친의 도장을 칼로 긁어 동기창이라 써서 팔았다고 하더군요. 김 아전을 불러들여 엄히 분부하시면 그가 서문 안의 모처에서 (초의의 필첩을)찾아내 가져 올 것입니다. 곧 엄격히 색출하시어, 곧 초의에게 찾아 주심이 어떨지요. 초의는 호남지방의 이름난 승려인데, 일찍이 (그가) 어떤지를 듣지 못했습니까. 지금 초의 노인이 영하(營下)에 있으니 다행히 바로 불러 보시고 친히 그 사정을 물으신다면 상세히 알 수 있어서 이런저런 말이 없을 것입니다. 초의를 불러보신 후, 소략하게 그의 여비를 마련해 주실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만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작년 여름 병이 있는데도 한양에 온 것은 김정희를 조문하기 위한 것이고, 그의 선사 비각의 일 때문인데 일이 여의치 않아 가을에 돌아가지 못하고 추사 댁에서 겨울을 지내고, 지금 남쪽 해남으로 돌아가려합니다만 그의 행색으로는 돌아갈 여비가 한 푼도 없다고 합니다. 가련하고 염려됩니다. 겨우 3~4량의 비용이면 절에 돌아갈 수 있다더군요.
全州吏(今惑有退去之慮)金在謨(吏頻改名 必詳詢然後 知其前名) 字曰可範者 欺取鄙家先親筆帖於海南草衣禪師 賣食於西門內某姓人(其人姓名未詳云)而先人圖章刀刮以董其昌三字塡書賣之云 招入金吏嚴分付卽自可推出於西門內某處而來納 須卽日嚴速索出仍付草衣如何 草衣之爲湖南名僧 曾未聞知否 今草衣老人 方在營下 幸卽招入賜顔 親問其委折 則可諒得矣 不在多言耳 草衣招見後 略助其行費 則甚好甚好 未知如何 昨夏扶病上京者 一則弔秋史也 一則爲其先師碑刻事 而事不如意 秋間未歸 過冬於秋史宅 今始南歸 其行色囊乏一錢云 可憐可念 所以奉提 不過三四兩 可抵寺云耳)
이 편지는 당시 초의가 처한 어려움이 무엇이지를 소상히 드러낸다.
초의가 다산의 서첩을 전주 아전에게 속아서 빼앗긴 전 후 사정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어서 주목할 만 하다.
더구나 다산의 도장을 긁어내고 “동기창(董其昌)”이라 새겨 팔아먹었던 탐관오리의 부패상도 함께 밝혀져서 속된 풍속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동기창(1555~1636)은 명대의 명필가이다. 그의 친필은 조선 사람들에게 선호도가 높았던 예술품이었음도 함께 밝혀진 셈이다.
겨우 3~4량의 비용이면 대흥사에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방점을 찍어본다.
△ 초의선사, 한벽당 시 남겨
한벽당은 '옥같이 맑은 물이 차갑게 흐른다'는 의미로, 전주 8경 중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煙)'의 배경이 된 곳으로, 조선 후기 명필과 시인들의 발자취가 깃든 곳이다.
초의선사가 '등한벽당(登寒碧堂)'이란 시를 지었으니 한벽당을 방문한 것이리라.
‘시골 사람 옷차림으로 물가의 정자에 다다르니
이곳은 옛날 왕이 태어난 곳이라 하지.
고요한 계곡 새소리 은근하고
맑은 계곡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 그윽하기도 하여라.
바쁜 장사치는 저문 길을 재촉하고
쫙쫙 내린 비에 씻긴 산뜻한 기운,
정말로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라
누각에 올랐으나 어찌 노래하랴’
田衣當水樹
云是故王州
谷靜禽聲遠
溪澄樹影幽
遞商催晩日
積雨洗新秋
信美皆吾土
登臨寧賦樓
한벽당은 초의선사, 추사와 창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이곳을 지나가는 대목이 나온다.
한벽당 바로 밑 바위에 ‘매화향기를 찾아 가는 작은 소로’라는 뜻의 '심매경(尋梅逕)'이란 암각서가 있다.
'심매경' 암각서를 보고 바람쐬는길을 따라 전주 전통의 향기를 찾아 구경 한 번 가보라.
'초의 의순(草衣意恂·1786~1866)은 나주 삼향(현재 무안군 삼향면) 사람이다. 교학(敎學)뿐 아니라 선리(禪理)에 밝았던 승려로, 선교융합(禪敎融合)을 중시했다.
△초의선사와 김기종의 인연, 훗날 김정희로 연결
전주 한벽당에서 열렸던 시회에서 처음 만난 초의선사와 김기종의 인연은 훗날 김정희로 연결됐다.
김기종이 타계하자 추사는 정성을 다해 김기종과 그의 부친 김복규의 정려비문을 비롯, 비각에 걸 수 있도록 현판의 글씨를 써주었다.
이처럼 이 효자비각에는 김기종과 초의, 추사와의 아름다운 인연이 얽혀 있다.
1815년 초가을, 전주 한벽당에서 시회가 열렸다. 한벽당은 전주8경의 하나로 전주천이 휘감아 도는 승암산 절벽 아래 자리해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는 명승지였다.
이 시회엔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을 비롯한 전주의 선비들, 그리고 초의선사가 참여했다.
초의는 승려 신분이었지만 강진에 유배 와있던 다산 정약용에게 유학과 시문을 배워 시에 능했다.
이 시회에 참석한 전주의 선비 중에 김기종(1783〜1850)이 있었다. 김기종과 초의선사는 이 시회에서 처음 만났다.
그렇지만 이 만남이 훗날 추사 김정희로 이어져 그의 멋진 글씨가 전주시 삼천동 상거마마을 정려각에 걸리게 됐다.
효엔 유자와 불자가 따로 없다.
김기종의 집안은 효자 가문으로 유명했다.
김기종의 부친 김복규는 16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묘지를 정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던 중 꿈에 나타난 도사가 일러준 대로 약을 구해 다려드리니 다시 깨어나 천수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순조 23년(1823)에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김기종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효자였다. 이렇게 효심이 강한 김기종이 한 인물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했다.
그 인물은 진묵(1562~1633)이라는 승려였다.
진묵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의 승려로 민초들의 아픈 삶을 보듬어 생불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출가한 승려신분이었지만 자신이 거처하던 아랫마을에 어머니를 모셔두고 정성을 다해 봉양했다.
외아들로 출가해서 대를 이을 후손이 없어 자신의 제사를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천년 동안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모친이 타계하자 손수 제문을 지어 애끊는 정을 표현하고, 유양산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에 장사지냈다.
이곳에서 향을 밝히면 풍년이 들고 가정이 평온해진다는 소문이 돌면서 참배객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진묵의 어머니 묘 앞에는 향불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진묵대사의 효성에 감동한 김기종은 그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내기로 결심했다.
당시 민초들 사이에서는 진묵의 수 많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었다.
설화들을 수집해 한벽당 시회에서 만났던 초의에게 집필을 부탁했다.
초의는 진묵의 행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대사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한사코 거절하다 결국 불가에서 출가한 후 부모자식 간에 인연을 끊는 세태의 잘못을 알려주기 위해 진묵의 소전을 쓰기로 했다.
초의는 집필을 마치고 제주도에 유배중인 절친 김정희(1786~1856)에게 보내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원고를 읽고 나서 ‘마디마디가 다 향이어서 수정할 곳이 없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이렇게 김기종과 초의선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인연의 고리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초의가 쓴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는 김기종 생전에 발간되지 못했다.
사후 7년이 흐른 1857년이 되어서야 완주군의 봉서사에서 간행되었다.
봉서사는 진묵이 일곱 살 때 출가했던 절이자 만년을 보낸 곳으로 이곳에는 현재 진묵의 영당과 부도가 남아있다.
△ 김복규 김기종 정려각, 전주서 임실로 옮겨
전주시 삼천동 상거마마을에 있다가 재개발로 임실군 정월리로 이전한 김복규 김기종 정려각은 어떤 사연이 있나.
김기종은 부모상을 당해 3년간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며, 애통해하는 소리가 마치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았다고 하여 묘 앞에 있는 마을이름을 호동(虎洞)으로 바꾸어 부를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1850년 김기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지극한 효성이 알려져 1853년(철종 4)에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부자지간에 효자정려를 하사받은 가문의 경사를 맞아 1855년 김기종의 장남 영곤이 추사를 방문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추사에게 비문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유배와 2년간의 북청 유배를 끝내고 부친의 묘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고 있었다.
영곤은 정려비를 세울 커다란 빗돌을 마련해 두고 여기에 맞추어 가지고 온 한지를 추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추사는 정려비는 크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며 한지를 작게 잘라 비문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때 추사는 비각에 걸 수 있도록 현판의 글씨도 함께 써주었다.
효행의 덕으로 경사스러움이 넘치는 집이라는 ‘효덕연경지각(孝德衍慶之閣)’과 2세에 걸친 효자각이라는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이다.
이외에 추사는 편액 글씨 한 점과 비문 한 점을 더 써주었다.
편액은 ‘귀로재(歸老齋)’라는 힘이 넘치면서도 조형미가 뛰어난 현판 글씨이다.
귀로재는 임실 관촌에 있는 김기종의 재실이다. 그리고 김기종의 부인 전주 유씨의 묘비 또한 이때 글씨를 미리 받아 놓았다가 사후에 세웠다.
△김진태의 장편소설 ‘모악산'
김진태의 장편소설 ‘모악산푸른향기)’은 바로 이러한 모악산을 상징적인 배경으로 해 이의 기운을 받은 전주 사대부들이 조선왕조가 붕괴되는 시점에서, 긴 어둠의 터널을 걷듯 슬프고 아픈 그들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액자소설인 ‘갑오국’을 끼어 넣어 전주 사대부의 삶을, 본 소설에서는 전주사대부 후예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소년 금아를 중심으로 해방직후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인공치하에서 지주가 매를 맞는 등 조선시대였다면 감히 상상도 못할 상황들이 조선왕조의 마감과 함께 평민으로 전략해 버린 전주사대부 후예들의 암담하고 절망스런 모습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김 참판과 이 진사라는 두 출중한 가문을 중심으로 시대의 풍랑 속을 헤매는 후예들의 삶을 그렸다.
결국에는 격랑의 시대에 두 가문은 무너지게 되지만 한편 삶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들의 모습과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가족과의 유대감과 핏줄의 끈끈함을 엿볼 수 있다.
소설은 철부지 아홉 살 소년 금아의 모습에서 질통꾼을 하면서 어엿한 장남 노릇을 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사대부 후예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많은 장면들이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소설의 후반에서 금아가 다시 공부하게 되면서 누나와 풍금을 치며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전쟁 이후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할 만큼의 금아의 파란만장한 삶을 대변하는 장면으로 눈시울이 붉히운다.
‘임실 효충서원(임실읍 정월리) 내 정려각에 우뚝 서 있는 ‘김복규.김기종 효자정려비 및 정판’은 전북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조선 철종 때의 김복규, 김기종 부자의 효행을 기리고 있는 문화유산이다(하략)’
작가는 전주의 효자동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문화재 효자비각이 사정상 임실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저자는 효자비각이 제자리를 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기획했다고 했다.
개발을 이유로 문화재의 본뜻과 달리 엉뚱한 곳으로 옮겨 버린 나라의 행정이 어처구니없지만 이제라도 점잖은 양반문화가 융성했던 전주에 효자비각을 제자리에 세워 놓고 전주시의 긍지를 살렸으면 바람이다.
이 비가 임실로 시집살이를 간 것은 1981년 전주도시계획에 의거, 아파트가 지어지게 되자 당시 김해김씨 문중의 총무를 맡은 김재두(작고)씨가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그 곳을 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이들 문중 어르신들은 얘기 속 '호동(虎洞)' 마을을 소양과 용진 사이에 있는 예비군훈련장 인근으로 보고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종근이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서양화가이자 서예가인 곽산 김홍선 선생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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