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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만암 이상진, 어떤 딸을 진안서 만나다 -

 

만암(晩庵) 이상진(李尙眞, 1614~169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현종과 숙종 대에 걸쳐 활동하며 우의정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그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전주부에서 태어났으나 진안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1614(광해군 6) 전라도 전주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진안읍 가림리 탄곡에서 동문들과 함께 수학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1645(인조 2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사헌부 지평, 이조판서, 대사간 등 여러 요직을 거쳐 결국 우의정에 올랐다.

 

그는 평생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으며, 임금의 불의에도 굽히지 않고 간언했다.

 

인현왕후 폐위 사건 당시, 숙종의 엄명을 어기면서까지 폐위의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다.

 

진안 출신 무신인 이만정(李萬禎)을 천거, 곡성현감에 제수되도록 하는 등 진안 지역 인물들과 교류했다.

 

젊었을 때 이상진은 집안이 가난해 끼니를 굶을 때가 허다했다.

 

한 번은 추석이 다가오자 노모(老母)를 위해 쌀자루를 들고 이웃 마을에 사는 전동흘(全東屹, 1610~1705)을 찾아갔더니 말하기를 비록 지금은 곤궁할지라도 장차 크게 부귀하실 것이니 조금도 걱정 말고 열심히 공부하시오하고 극진한 대우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 친분이 두터워진 그들은 전동흘이 이상진의 노모와 살림살이를 맡고, 이상진은 서울에 올라가서 과거 공부를 한 결과 마침내 대과에 급제,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이상진의 영달이 전동흘의 은덕이었다. 정승이 된 이상진은 진정으로 전동흘에게 벼슬하기를 권했다. 하지만 진동흘은 굳이 사양했다.

 

한 번은 이상진의 집에 경사가 있어 대신들이 모두 모였다.

 

그 자리에 전동흘을 불러 앉히고 이상진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며 은인인 전동흘이오. 비록 지금 벼슬자리는 없지만 지식과 재주가 뛰어나고 의리가 태산처럼 무거워서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인물이니 부디 모두 잊지 말아 주시오했다.

 

모든 대신들도 전동흘의 인물을 알아보았고 따라서 전동흘은 곧 무과로 나아가서 선전관을 거쳐 통제사까지 지냈다.

 

전동흘의 용맹함이 당시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의 눈에 띄어 중용된다. 평북 철산부사 등 여러 곳의 외직을 거쳐 황해도 및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총융사·포도대장 등 주요직을 역임한다.

 

전동흘의 묘는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들판 임정 뒷산에 있다. 그 후 성수면 좌산리 가수 마을 뒷산으로 이장하고 신도비를 세웠다. 그는 죽마고우 이상진과 익산 출신 소두산(16271693, 평안도병마절도사)과 함께 삼걸(三傑)로 불렸다.

 

이상진이 심은 회화나무가 전 교동사무소 건너편 아트샵 '하늘 물고기' 옆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후기 학자 홍지섭(1754~1822)이 남긴 유일본 '와운옹문견수기(臥雲翁聞隨記)' 이 있다.

 

홍지섭은 조선 후기 소론 강화학파에 속하면서 정조 시대에 탕평책을 지지한 노론 시파와 뜻을 함께한 인물이다.

 

책 제목은 구름 속에 누워있는 노인을 뜻하는 저자의 호()'와운옹'과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글을 의미하는 '문견수기'를 합성한 단어다.

 

책은 그가 보고 들은 사건과 인물에 대한 견해를 정리한 필사본이다. 서문, 본문, 필담, 부록 등으로 구성됐다.

 

이 책에 만암(晩庵) 이상진(李尙眞)이 어떤 딸을 진안서 만난 사연이 소개된다.

 

'정승 만암(晩庵) 이상진(李尙眞)의 선영(先塋)은 진안현(鎭安縣)에 있다. 병진년(1676) 이전에 판서(判書)가 진안현에 성묘하러 갔다가 묘비를 세울 일이 있어 촌가에 예닐곱 일을 머물렀다.

 

어떤 젊은 시골 여인이 식사때 마다 밥상을 올리고 옆에 가까이 있으면서 여러 번 말을 머뭇거렸다.

 

하루는 이공(李公)이 그 이유를 물으니, 여인이 대답했다.

"저는 마을의 아무 사내의 의붓딸입니다. 대감께서는 아무 사내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아무 사내는 바로 이공이 젊었을 때 우거하던 집의 주인이었다. 당시 그 사내가 어영군(御營軍)으로 상번(上番, 외방의 군인이 되어 서울로 번을 들러 올라가던 일)했는데, 이공이 마침내 그의 처와 사통을 해 임신을 했다.

 

이공이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이후는 서로 소식이 닿지 않았는데 이 여인이 실로 그의 소생이었다.

 

이공이 깜짝 놀라 즉시 그 여인의 어미를 불러 모으니, 어미가 하나하나 자세히 대답했다. 그제야 비로소 부모 자식의 인륜을 정했다.

 

여인은 당시 서른두 살로 양인에게 시집갔다. 그러므로 이공이 태수에게 말해 중인의 직임으로 올려주었다.

 

남쪽 선비들이 이 일을 전하자 전주의 문관 홍남립(洪南立. 1606~1679)이 근체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당시 딸 낳을 태몽 대수롭지 않았는데

이날 어린 꾀꼬리 같은 딸을 자세히 분간했네.

아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명성이 곽장군(한나라 곽거병 霍去病)을 이었을 것이네.

 

當時虺夢尋常記

此日鶯雛仔細分

若使阿兒非女子

聲名應繼霍將軍

 

이 사연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를 전파하면서 읊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