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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조선시대 '조수삼'을 통해 전주 역사를 다시 만나다.

조선시대 '조수삼'을 통해 전주 역사를 다시 만나다.

△ 조수삼의 완산팔경(完山八景)

 전주팔경을 이야기한 인물로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1762~1849)을 꼽을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조수삼은 말년(74세경,1835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2년 동안 호남지방에 머물렀다. 

그 당시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들 가운데 현재의 전주팔경과 부합하는 작품들이 그의 문집 '추재집' 3권과 4권에 들어 있다.

조수삼은 중인 신분으로, 여든세 살에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됐다. 여섯 차례나 중국을 여행하여 청나라의 이름난 선비들과 교유했고 중국에까지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젊어서는 삶의 진솔한 이야기나 자연을 소재로 시를 썼고, 나중에는 사회 현실을 묘사한 시를 많이 썼다. 저잣거리에서 보고 들은 사람들을 쓴 연작시가 '추재집'에 전한다.

이경민의 '희조일사(熙朝軼事)'에 조수삼이
실려 있다.

조선 말기의 화원(畫員)인 조중묵(趙重默)은 그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죽림야우(竹林夜雨)

 비 내리는 대숲은 밤새 울어대니
 대소리가 가까우니 빗소리 멀어지네
 악공 수천 명으로 하여금
 녹옥피리 다투어 부는 듯

雨入竹中鳴達宵
竹聲相近雨聲遙
伶人百隊人千口
口口爭吹綠玉簫

죽림(竹林)은 완주군 상관면 만덕산 아래인 현재의 죽림온천 지역으로 추정된다. 

전주 인근은 예전에 대나무 숲이 우거졌고,특히 상관면 일대는 매우 무성해서 ‘죽음리(竹陰里)’라고 하였다고 한다.

소상팔경의 첫수인 소상야우를 본 딴 ‘죽림야우’는 ‘죽림(竹林)+야우(夜雨)’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밤에 대숲에 내리는 빗소리는 낮에 듣는 빗소리와 달리 매우 뚜렷하고 크게 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전구와 결구에서 수백 수천의 악공들이 다투어 피리를 분다고 표현했다.

덕진채련(德津採蓮)

 채련곡 노래 소리 높아질 때 배를 끌고 나서니
 물오리 놀라 일어나니 연잎이 맑도다
 놀이배를 타고 점점 꽃밭 속에 들어가니
 온통 붉은 속에 사람은 보이지 않네

蓮唱初高刺掉頻
水禽驚起綠粼粼
畵舫漸入花深處
一色紅粧不見人

덕진연못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방위를 위해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고려 때 이미 호수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조선조에는 풍수적으로 보아 북쪽에 산이 없는 전주의 지형상, 북서쪽으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막기 위해 건지산과 가련산을 이어 제방을 만들어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덕진연못의 절반 가량을 채우고 연꽃은 가장 큰 볼거리로, 오월 단오를 맞아 피기 시작하여 한 달 가까이 꽃이 피고 진다.

단오가 되면 전주 시내의 아낙네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기 위해 덕진 연못을 찾아 나서곤 했다.

놀잇배를 끌고서 우거진 연밭 속으로 들어가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온통 여기저기온통 붉게 피어 있는 연꽃만 보이게 된다.

조수삼은 이러한 절경을 팔경의 하나로 노래했다.

동포귀범(東浦歸帆)

 강마을에는 물고기와 쌀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넓은 해구와 긴 강줄기를 따라 날마다 바꾸어 가네
 잠깐 남쪽 봉우리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멀리 수 많은 돛단배가 푸른 하늘가에 떠 있네

江鄕魚米不論錢
巨口長腰日貿遷
試向南峯高處望
遠帆無數入靑天 

동포귀범의 동포(東浦)는 ‘동지포(東之浦,혹은 東止浦)’의 줄임말이다.

여기서 동지포는 곧 만경강의 청하면 동지산(東之山, 혹은 東止山)리에 있는 옛 포구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조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주의 관할은 서쪽으로 옥구 임피현 경계까지였다.

‘거구’는 ‘입이 큰 농어’라고 하고,장요미(長腰米)는 모양이 좁다 랗고 길쭉한 쌀의 일종으로 전자(箭子)라고도 하며, 한수(漢水)가에서 산출되는 절품(絶品)으로 꼽힌다.

하지만 짧은 절구의 형식에서 기구에 물고기와 쌀을 이야기하고, 승구에서 다시 ‘거구’, '장요’라는 말로 풀이를 하는 것은 언어의 경제적 측면에서 큰 낭비라고 할 수 있다.

즉, 승구의 ‘거구’와 ‘장요’는 농어나 쌀 대신에 동지포 일대의 경치를 묘사한 것으로 풀이해야 풍경이 풍부해진다. 

이에 ‘넓은 강어귀’와 ‘긴 강줄기’로 해석했다. 전구의 ‘남봉(南峰)’은 청하면 신창진 뒤쪽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의 지명이다. 

만경강이 신창진을 돌아 서해 바다와 마주하는 곳에 이르면 남봉보다 높은 곳이 없다. 그래서 남봉에 올라가면 신창진 앞으로 왔다갔다하는 배들을 볼 수 있다.

인봉토월(麟峯吐月)

 기린봉 두 봉우리 푸르게 우뚝 솟고
 가을 달빛은 멀리서 하얗게 일렁이네
 오목대 앞의 노란잎은 다 하고
 남천교 위에는 취한 사람이 많네

麟峯雙䯻碧嵯峨
秋月迢迢漾素波
五木臺前黃葉盡
南川橋上醉人多

'인봉토월'은 기린봉 위로 달이 떠 오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현재의 기린토월에 해당한다.

인봉토월은 달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계절인 가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봉토월에서는 다른 시들에 비해서 지명이 많이 사용됐다. 기구의 ‘인봉(麟峰)’은 전주부 동쪽에 위치한 기린봉을 말한다.

전구의 ‘오목대(五木臺,梧木臺의 誤記)’는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를 황산벌에서 토벌하고 전주에 이르러 잔치를 했다는 곳이고, 결구의 ‘남천교(南川橋)’는 전주천에 걸쳐 있는 다리이다.

기구, 전구, 결구에서 ‘인봉, 오목, 남천’이란 지명이 사용됐다면, 승구에 쓰인 ‘추월’의 경우도 지명일 가능성이 많지만, 이에 해당하는 지명은 찾지 못했다.

한벽청연(寒碧晴烟)

 멀리서 보면 아득하고 가까이 보니 텅 비었는데
 전주천 가의 한벽당은 흐릿하게 일렁이네
 건너 마을에는 석양 아래 서너 그루 나무들
 다만 옅게 붓질한 듯 앉아 있네

遠視迷離近卽空
一川寒碧漾冥濛
隔村多少斜陽樹
只坐輕籠淺抹中

한벽당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7~8차례의 중수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숙종때 관찰사 이사명(李師命)은 별도로 여러 층의 누각을 창건하고 화려하게 단청했다. 

완주부성 지도와 규장각 지도에 나타난 것을 참조하면, 이 때 지어진 한벽당은 비탈면을 따라서 4동의 건물이 일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벽청연의 시간적 배경은 해질 무렵이다.

해가 뜨기 직전의 시간과,해가 지고 난 직후 완전히 어두워지기까지는 하루 중에서 가장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이 시간에 사물은 흐릿하게 보여서 물건을 똑바로 보기 매우 어렵다.

기구와 승구는 초저녁 시간대에 밖에서 본 한벽당의 모습이다. 전주 천변에 세워진 한벽당은 뒤편에 발산 자락이 자리하고 있어 더욱 어둡게 보이기 마련이다.

건너 마을에 석양이 지는 가운데,서너 그루의 나무들은 수묵화에서 옅게 붓질한 듯 서 있다.

전구와 결구는 아침 저녁으로 안개가 자주 끼는 형상을 표현했다. 이로 보아 한벽청연은 남원쪽에서 들어오는 입구에서 한벽당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남고모종(南固暮鍾)

 성곽의 종소리 어디에서 들리나
 상방에 석양이 드니,문턱이 따뜻하네
 머리 돌려 다시 초지를 찾으려니
 텅 빈 산에는 흰구름만 보이네

城郭鍾聲何處聞
上方斜日下方曛
回頭更欲尋初地
惟見空山多白雲

남고모종은 남고산 남고사의 저녁 종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남고산성은 전주 남쪽의 고덕산과 천경대,만경대,억경대로 이어진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산성이다.

이 산성의 안쪽에 남고사가 있다. 불교에서 종을 치는 이유는 모든 중생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생겨나 악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있다.

상방(上方)은 관아의 우두머리가 거처하던 방을 이르던 말이고, 하방(下方)은 벽의 맨 아래쪽 기둥 사이를 가로지른 나무를 이른다.

초지(初地)는 십지(十地)의 처음 단계로, 번뇌를 끊고 마음속에 환희를 일으키는 경지로서 환희지(歡喜地) 라고도 한다.

저녁에 해가 지면서 절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듣고 초지를 찾으려고 했지만 산에는 무심히 흰 구름만 보이고, 찾고 싶은 초지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화자가 찾으려는 ‘환희지’는 ‘남고사’를 의미한다.전주 시내에서바라보는 남고사는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결구는 이런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위봉수폭(威鳳垂瀑)

 하얀 비단이 푸른 산에 걸린 듯
 빗줄기는 저녁노을에 물드네
 어느 누가 곧바로 칼을 가지고 가서
 맑은 가을 하늘아래 직녀가 짠 베를 잘라놓았나

白練垂垂掛翠微
雨絲霞線染餘暉
何人直把幷刀去
斷下淸秋織女機

위봉수폭은 위봉산 동문쪽에 있는 위봉폭포를 말한다.

위봉폭포는 높이가 60m로, 2단으로 물줄기가 쏟아진다.

물이 떨어지는 폭포 주변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절경을 형성한다.기구의 하얀 비단이 푸른 산에 걸린 듯한 것은 위봉폭포의 물이 떨어지는 모양을 표현했다.

위봉폭포는 태양을 등지고 있는 위봉폭포의 하얀 물줄기와 석양에 물드는 빛줄기가 묘한 대비를 형성한다.

위봉수폭은 기구부터 결구까지 모두 위봉폭포의 떨어지는 물줄기를 형상화하는데 주력했다.

하얀 비단,푸른 산,저녁노을에 물든 빗줄기, 그리고 맑은 가을 하늘은 백색,붉은 색, 푸른색이 서로 강렬한 색으로 대비되게 그리고 있다.

비정낙안(飛亭落雁)

 비비정 아래 가을 기러기 내려앉은
 물 맑고 모래 고운 명사십리길
 북쪽 서울 집은 어느 곳이던가
 편지는 쉽게도 남주에 이르네

飛飛亭下雁飛秋
水碧沙明十里洲
北望京華何處是
家書容易到南州

비정낙안은 평사낙안에 해당하는 시다.

비정(飛亭)은 비비정의 줄임말로, 삼례를 지나는 만경강가에 서 있다.

그 밑으로는 하얀 모래밭이 십리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고 해서 '명사십리'라고도 한다.

정자는 선조 6년(1573)에 무인 최영길이 건립하였으며 몇 차례 쇠락을 거듭하면서 현재 자리에 서 있게 됐다.

최영길의 손자 최양이 우암 송시열에게 부탁하여 지은 비비정기(飛飛亭記)에서 송시열은 ‘비비’라는 말의 뜻을 “지명에서 연유하였다기보단 익덕 장비(張飛)의 '신(信)과 용(勇)',악비(岳飛)의 '충(忠)과 효(孝)'를 본따서” 비비(飛飛)라고 했을 것이라고 했다.(전주 팔경시의 형성과정 및 특성 연구, 정훈 전북대 참조)

△ 전주기생 한섬과 양대운

조수삼이 지은 ‘추재기이(秋齋紀異)’을 보면, 기생이 3명 등장한다. 

제주도 기생 만덕과 정인을 따라 죽은 기생 금성월, 그리고 전주 기생 한섬(寒蟾)이다.

“한섬은 전주 기생인데 황교(黃橋) 이상서(李尙書)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 가무를 가르쳐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했다. 한섬이 나이가 들어 집으로 돌아간 지 한 해 남짓 지나 판서가 세상을 떴다. 한섬이 즉시 말을 달려 판서의 묘에 이르러 한 번 곡하고 술 한 잔 따르고 술 한 잔 마시고 노래 한 곡 불렀다. 다시 두 번째 곡하고 두 번째 잔을 따르고 두 번째 잔을 마시고 두 번째 노래를 불렀다. 이렇듯이 하루 종일 돌려가며 한 뒤 자리를 떴다”

나이가 든 전주 기생 한섬이 자신을 뛰어난 예인으로 길러준 후원자가 죽자 극진한 예를 다해 추모했다는 사연이다. 

조수삼의 시에 

'울다가, 노래 부르다가, 술 한잔 따르다가
그렇게 하루 종일 술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울다가, 
노래 부르다가 술 한 잔 따르다가 했다 했네
연로하던 어르신 이미 세상 떠났건만 
늙을 때까지 스승으로 모실 것이라고 하는데
오늘 유달리 강남 옥피리 소리 애달픈 이유를 누가 알까’

라고 소개한다.

“전주 기생 한섬은 침선비(針線婢)로 뽑혀 서울에서 노닐었다. 뒷날 용모도 추레해지고 의지할 데가 없어지자 이정보 판서께서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살게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관계를 맺지 않고 잘 대우했다가 만년에 재물을 많이 딸려서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이 판서가 죽은 뒤 소식을 들은 기생이 술을 싣고 판서의 무덤을 찾아갔다. 무덤에 이르러 술을 따라 무덤에 뿌리고 다시 큰 술잔에 술을 따라 스스로 마시고는 ‘대감께서 평생 술을 즐기시고 노래를 즐기셨지요!’라고 말한 뒤 마침내 노래를 길게 뽑았다. 노래를 마치고 통곡하고 곡을 마치고서 다시 술을 따라 무덤에 뿌렸다. 술이 다 떨어지자 애통해하다 기절하여 묘 앞에 거꾸러졌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바로 떠나갔다”

위와 같은 ‘시필’(試筆)이란 책에 실린 비슷한 사연을 보면 왜 그런지 다소 의문이 풀린다고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말했다.

이의무(李宜茂,1449-1507)의 ‘연헌잡고(蓮軒雜稿)’엔 

‘전주에 양대운(陽臺雲)이라는 기생이 있는데 천침(薦枕)을 하려고 해서 시를 지어 거절했다.(全州妓有名陽臺雲薦枕。以詩却之)고 했다.

‘일찍이 양왕(襄王)은 꿈 속에서 무산 신녀와 정을 나눴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신녀는 양대(陽臺) 아래에 머물면서 아침 저녁으로 그대만을 그리워 하겠노라 말했다지요.노년의 풍미(風味)란 정말 우습구려. 마음 내맡겼건만 내 몸은 재처럼 싸늘히 식었구려.

曾向襄王夢裏廻。
朝朝暮暮自陽臺。
老年風味眞堪笑。
一任襟懷冷似灰)'

이 시를 통해 그녀는 궁중향연에서 악기를 잘 다루는 기녀이었음에 분명하지만 더 많은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조선해어화’에 기록된 연대와 전북 기생 이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종(明宗, 1545~1567)때는 황주기생 유지(柳枝), 평양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전주기생 금개(今介), 선조(宣祖, 1567~1608)때는 부안기생으로 시와 노래와 거문고에 뛰어난 계생(桂生, 매창 梅窓), 의기(義妓)가 있는 진주 기생 논개(論介), 광해군(光海君, 1608~1623)때는 금산에서 한양으로 올라온 용모와 가무가 당대에 독보적인 기생 일타홍(一朶紅), 영조(英祖, 1694~1776)때는 서화에 능한 부안기생 복개(福介), 남원기생 춘섬(春蟾)이 보인다.

‘진연의궤(進宴儀軌)’(1744) 기록엔 정재의 종목과 참가할 기생의 명단이 있다.

 전주기생 옥섬(玉纖), 전주기생 양대운(陽臺雲)이 보인다. 

'조선해어화'에 연대를 확인할 수 없는 없는 기생 이름은 남원기생 계월(桂月), 그리고 장구를 치며 육자배기 노래를 부른 전주기생 유섬섬(柳纖纖)이다. 

전주의 명기 양대운, 한섬 등 관련된 자료를 바탕으로 당대 뛰어났던 기생이나, 또 그들과 정신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누었던 문인들을 조사해 스토리텔링을 입혀 상품화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란다.

△조수삼이 전주 여관서 만난 유윤오

유윤오 (柳潤五)는 조수삼의 글에서 언급되는 인물이다. 

조수삼의 저서나 기록 중 '호남의 인재 유윤오 군'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수삼이 높이 평가했던 호남 지역의 인재였음을 알 수 있다. 

두 인물은 동시대에 활동하며 교류했거나, 적어도 조수삼이 유윤오의 존재와 재능을 알고 있었던 관계로 보인다. 

유윤오 개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조수삼에 비해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조수삼의 문집에 언급될 정도로 문학적 교류가 있었던 인물 같다.

'호남의 인재 유윤오

우리 호남 지방은 중국의 소주, 항주와 같아서 산천이 맑고 아름답다. 토지가 비옥하여 넉넉하고 맑은 기운이 수많은 물산에 나타나 있다. 유자, 석류, 생강, 참대 화살, 감, 소반, 삼, 가는 무명, 아름다운 목재, 좋은 쌀, 합죽선, 장지 종이 따위 특산물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서울에도 올라가고 온 나라 백성들이 호남의 생산품을 잘 이용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고장에는 슬기롭고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나서 문학의 기량이 이웃 나라에 알려지고 뒷세상에 전해질 만한 사람이 많이 있다. 지금 이 유윤오 군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내가 처음 호남 땅에 갔을 때 윤오 군은 나를 전주 여관으로 찾아와서 자기가 쓴 시를 보여 주었다. 
그때 나는 시에 깊은 맛이 있는 것을 기뻐하여 우정을 맺고 돌아왔다. 윤오 군이 또 나를 뒤따라 서울로 올라왔을 때 소매 안에 가득하게 가지고 온 것이 시였다. 
나는 윤오 군이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찾아온 뜻을 알기에 집에 간직해 두었던 두보의 시집한 질을 선물하면서 그의 시에서 지나치게 고운 면을 없애고 두보처럼 노련해질 것을 바랐다.
그 뒤에 다시 남쪽 고을에 내려갔을 때 다시 윤오 군과 더불어 밤낮으로 놀면서 수많은 시를 보았는데 지나치게 화려하던 것이 진실해지고 연약하던 것이 굳세어져, 말로 칭찬은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제 윤오 군이 네 해 만에 또다시 나를 찾아왔는데, 이번에는 시의 감흥이 더욱 풍부해지고 재간이 더욱 발전했다. 말이 세련되고 격이 새로워져, 깊고 노숙한 시풍이 이미 옛 선배들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고전 작품들을 방불케 한다.
높은 고개 위 큰 소나무도 군의 시보다 힘차지 못할 것이며 하늘을 나는 수리개(솔개)의 날개도 군의 시보다 굳세지 못할 것이다. 내 구구한 말솜씨로는 군의 시를 찬양할 수 없구나.
아, 윤오 군이 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 지극하다. 내가 윤오 군에게 준 선물이 빛이 나서 또한 다행스럽다. 
윤오 군의 시가 앞으로 호남의 특산물인 화살, 유자, 석류 들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서울에도 올라가서 사람마다 기뻐하고 집집마다 다 소장하게 될 것이다. 만일 윤오군의 시가 이렇게 발전한다면 몇 년 안에 반드시 남쪽 땅에서 크게 이름을 떨칠 것이며, 윤오 군을 우리나라 수백 년 역사에서 호남 땅이 낳은 걸출한 인재라 할 것이다.
윤오 군이 그렇게 성공하기를 기다려 마지않으므로 돌아갈 때 그 시집 첫머리에 이 글을 써 주노라.('유윤오의 시집에 부쳐', '추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