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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피아골 단풍

피아골 단풍

제48회 지리산 피아골 단풍축제가  26일 전남 구례군 지리산 피아골 일대에서 열렸다. 축제는 기존 연곡사 대형주차장 대신 직전마을부터 삼홍소 일원까지를 주 행사장으로 마련해 관광객이 붉게 물든 단풍을 더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반공 휴머니즘 대표작이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이다.

'피아골'은 1954년 전주에서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당시 전북경찰국 공보과 근무중인 김종환이 아직도 지리산을 근거지로 활동중인 빨치산 얘기를 이강천 감독에 들려주며 아울러 귀순한 빨치산이 지니고 있던 일기 메모첩 등도 보여줬다. 

영화 소재로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린 이강천은 가제를 ‘빨치산’으로 정하고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고, 탈고 후 ‘피아골’로 제목을 바꿨다. 이 시나리오는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활판인쇄를 했다

전주극장 김병기는 ‘피아골’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했다. 
이 작품은 적대적인 이념 갈등으로서 한국전쟁에 접근하기보다는 휴머니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본다. 

또, 극적 세계에 국군 또는 경찰을 등장시키지 않고 오직 빨치산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인물 각자의 인간적인 욕망과 갈등을 드러낸다. 그래서인지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 죄목으로 상영이 금지된 최초의 영화로 기록된다. 다행히 마지막 장면에 홀로 하산하는 빨치산 여전사를 배경으로 태극기를 전면에 배치하면서 영화는 재상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강천은 이 작품으로 ‘제1회 금룡상’에서 감독상까지 받았다.

'남부군', '태백산맥' 등 빨치산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1990년대 들어오면서 많이 만들어질 정도로 ‘빨치산’ 같은 소재는 반공이 국시였던 한국사회에서는 터부의 목록에서 상위에 올려지는 소재였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빨치산’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당연히 그 주제는 극단적인 반공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게다. 영화 '피아골'도 ‘반공’을 테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반공영화(!)’는 당시 용공성 시비에 휘말려 결국 마지막 장면이 수정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주인공인 빨치산 여대원 노경희가 어딘가를 향해 모래밭을 걸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을 두고 그 모습이 귀순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 산으로 돌아가는 것인지를 놓고 검열에서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장면에 태극기를 오버랩시키는 의도하지 않았던 엉뚱한 표현으로 바꾸어야 했다고 한다.

'피아골'은 그럼에도 빨치산들의 인간적인 갈등과 고뇌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뛰어난 리얼리즘 작품이다. 또한, 1960년대를 풍미했던 김진규, 허장강, 이예춘 등 명배우들의 데뷔 초기 모습을 확인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1999년 당시 우석대의 장명수총장이 이강천 감독의 영화 '피아골'의 제명을 딴 ‘피아골영화제’를 제안했고, 지역의 문화계 원로들도 영화제 기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처음 제안된 피아골영화제는 제1회 ‘전북영화상’처럼 시상식 형식의 소규모 영화제였다. 장 전 총장은 영화제 기획을 전주시에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은 지역 문화계 인사들의 간곡한 요청을 수용키로 결정했다. 

시는 영화제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서 공청회를 열고 자문을 구하는 등 절차를 밟았다. 문화계 인사들과 전문가들이 참석한 수차례의 공청회와 세미나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했다. 그 결과, 지방에서 성공하기 힘든 시상식보다는 국제영화제가 시와 지역민들에게 좀더 가치 있고 의미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러한 영화제 방향 전환에 김소영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등의 노고가 컸다. 1999년 전주시 지원으로 전주에서 국제영화제가 개최되는 것이 확정됐다.

그러나 시가 국제영화제를 목표로 상향 책정된 당시 예산은 9억 7,000만원으로 최소 19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분석 결과엔 훨씬 못 미쳤다. 그럼에도 우선 창립 준비를 서둘렀다. 곧바로 이사회가 구성되고 초대 집행위원장으로 최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을 선출하고, 민성욱 교수가 사무국장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영화제의 핵심인 프로그래머는 김소영 교수와 정성일 영화평론가(당시 'KINO' 편집장)가 공동으로 맡게 됐다.
그들은 영화제 명칭을 ‘전주 얼터너티브 국제영화제’로 내세웠으나 필자는 완강히 반대했다. 당시에 부천의 ‘판타스틱’도 낯설어하는데 ‘얼터너티브’(alternative)는 충무로 영화인들에게도 개념이 익숙지 않을 터이고, 대중에겐 친근감도 떨어지고 와닿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개최지가 전주이니 ‘전주국제영화제’로 쉽게 가자는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의 제안에 만장일치로 명칭이 결정됐다.

전남 구례군 지리산 피아골은 '삼홍(三紅)'으로 유명한 곳으로, 이 곳에서 열리는 단풍 축제를 통해 가을의 절정을 만끽할 수 있다. 

삼홍소

흰 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이 나를 위해 뫼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남명 조식 선생이 지리산 피아골 직전계곡 '삼홍소(三紅沼)' 경치를 예찬하며 읊은 시이다.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에서 딴 이름이 바로 '삼홍소'이다. 

산이 붉게 물들어 '산홍(山紅)'이고, 맑은 물에 비친 붉은 단풍이 '수홍(水紅)'이며, 계곡에 있는 사람까지 붉게 물들어 '인홍(人紅)'이다.

피아골에는 가슴 아픈 유래가 있다. 한편에서는 "전쟁의 역사 속에 죽은 이의 피가 골짜기를 물들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조정래도 소설 '태백산맥'에서 피아골 단풍을 역사의 비극과 연결 지어 묘사했다.

 '피아골 단풍이 핏빛으로 고운 것은, 옛날부터 그 골짜기에서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이 그렇게 피어난 것'이라고.

 다른 쪽에서는 "직전마을에서 오곡 중의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도 한다. '피밭골'이 '피아골'로 변했다고도 한다.

어쨌거나 아름다운 단풍만큼이나 아름다운 역사로 남길 바라본다.

지리산의 단풍은 핏빛으로 표현될 만큼 붉다. 그중 피아골 단풍은 뱀사골 단풍과 함께 지리산 단풍의 쌍벽을 이룬다.

하지만 붉고 곱기로는 피아골 단풍을 친다. 
계곡은 피아골 보다 뱀사골이 길다. 뱀사골단풍은 9km의 긴 계곡 따라 노란색이 많은 오색단풍이 계곡과 어우러진다. 

 아름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곳이다.
피아골 단풍의 출발지는 연곡사다. 절 마당에 서서 올려다보는 지리산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장관을 이룬다. 단풍 산행은 연곡사부터 주릉으로 향하는 코스가 잘 알려져 있다.

산으로 간다. 울창한 숲그늘이 한 올의 햇볕도 허락하지 않는 지리산이다. 그 중에서도 무더위를 피하기에 좋은 피아골이다. 피아골은 장쾌한 물소리만으로도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금세 시원하게 해준다. 귓속은 물론 뼛속까지 서늘하게 해준다.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이원규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중) 

안치환은 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어 놓았다. 이동 중 한 번 들어보라.

계곡의 비경과 선홍빛 단풍을 렌즈에 담다 보면 훨씬 더 걸릴 수도 있다. 고개를 들면 핏빛 단풍이 물들어 있고, 머리를 숙이면 맑은 계곡물이 수줍은 듯 단풍빛을 토해내는 절경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피아골 단풍은 알록달록한 티가 없이 그냥 붉다. 그래서 핏빛 단풍이라 불린다. 기암절벽을 울긋불긋 뒤덮는 화려함이 어우러져 마치 화엄의 세계를 방불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