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02> 전북의 김유신사당

0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02> 전북의 김유신사당

후백제의 왕도이며 백제문화권이던 전주 한 복판에 김유신장군 사당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전주시 서완산동에 위치한 완산사(完山祠)는 신라 김유신 장군(595~673)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가락전라북도종친회는 1934년 김해 김 가(家), 인천 이 가(家), 김해·태인 허 가(家) 등이 구성한 종친모임.
김유신 장군은 김해김씨의 중시조로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사후인 835년(흥덕왕 10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됐다. 

1924년 김해 김 가의 일가들로 이루어진 화수회가 조직됐고 화수회가 규모를 확대한 것이 바로 가락전라북도종친회다.
화수회가 결성된지 10년만인 1934년 완산사가 건립됐다. 문중이 중시조를 배향하기 위해 전주에 사당을 짓게 된 것이다.

도내에는 전주 완산사 외에도 부안 보령원이 김유신장군의 사당이 있으며, 매년 봄(4월 10일)·가을(10월 10일)에 제향이 열리고 있다.

현재 고창 남산사를 비롯, 전북 도내에 김유신유적이 6곳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국에서 세번째로 많은 수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일규 연구원은 '김유신 관련 유적의 분포와 특징'이란 논문을 통해 충북 19곳, 경북 17곳, 전북 6곳, 강원 4곳, 충남 3곳, 경남 3곳, 경기 2곳 등으로 확인됐다는 연구 결과다.

충북은 19곳에 김유신 관련 유적이 남아 있고 진천은 16곳, 제천 2곳, 영동 1곳이다.
진천은 8곳인 경주보다도 두 배나 많아 김유신 탄생지에 걸맞았다.

진천의 김유신 관련 유적은 유형별로 보면 사적 414호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연보정(蓮寶井·삼국시대 우물), 태령산성 등 삶 관련 유적 3곳을 비롯, 길상사(吉祥祠·충북도 기념물 1호), 서발한사당터(舒發翰祠堂터), 용화사 불상(충북도 유형문화재 138호), 죽계사(竹溪祠) 터 등 숭모 유적 4곳, 도당산성(都唐山城), 사곡리 장사굴, 화랑벌, 말탄터, 치마대(馳馬臺), 병무관(兵武館) 등 수련 유적 6곳 등이다.

진천은 김유신의 주요 활동지였던 경주의 2곳보다 숭모 유적이 6곳으로 3배나 많아 숭모 열기가 가장 활발했다.
현재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는 김유신의 탄생지와 태실이 있고, 이곳은 아버지 김서현이 재임했던 관아가 있던 곳이라고 전한다.
김유신이 아버지 김서현(金舒玄)과 어머니 만명(萬明) 사이에서 태어난 만노군(萬弩郡)이 지금의 진천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진천현 사묘(祠廟) 조에는 김유신사(金庾信祠)가 길상산에 있고 신라 때 사우(祠宇)를 지어 고려 때까지 봄·가을로 향과 축을 내려 제사를 지내다가 조선 태종 8년(1408)에 관원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적혀 있다.

이후 전란 등으로 폐허가 됐다가 1927년 진천읍 문진로 1411-38(벽암리 508)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짓고서 길상사라 했다.

이 길상사는 6·25전쟁 때 불에 타 1959년 개축한 데 이어 1975년 전면 신축했다.

전북은 백제의 땅이지만 김유신장군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타 지역보다 결코 적지 않다. 

고창 남산사는 김유신, 김축, 김두남, 김지남을 향사하는 사당이며, 군산 설림사는 김유신 위패를 모신 사당, 김제 벽성서원은 김유신, 최치원, 김보, 김선, 김극일, 허주, 김종직 등을 배향하는 곳이다. 

또 무주 라제통문은 삼국통일 때 김유신이 왕래했던 문, 무주 무산성은 삼국통일 때 김유신 전장, 부안 우금산성은 김유신이 소정방을 만난 곳으로 기록됐다.부안의 보령원에 사당이 있다.

무주 구천동(茂朱九千洞)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국 시대에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경계였다는 말에 따라 ‘나제통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삼국은 통일 전쟁 무렵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드나들었다 하여 ‘통일문(通一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동굴 양쪽에 위치한 자연 마을인 무주군 무풍면 방면의 이남 마을과 무주읍 방면의 새말[新村]은 1㎞ 정도 떨어져 행정 구역으로는 모두 설천면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고 통혼(通婚)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풍속과 전통이 각기 다르게 유지되어 왔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원수와 은혜의 성'은 의자왕의 딸 비화가 신라 무열왕(武烈王)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다가 그르친 실패한 복수담이며, 무열왕은 자신을 죽이려던 비화를 용서하여 나제통문(羅濟通門)까지 배웅해 준다는 용서담이다.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신두 마을에 나제통문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기세가 등등했던 무렵의 일이다. 나제통문 부근의 산성에 신라의 병사들이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말을 탄 아름다운 여인이 나제통문 부근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신라 병사들이 창칼로 위협하며 누구인지 물어도 전혀 겁먹지 않았다. 신라 병사들의 거듭되는 위협에 자신은 백제의 궁녀인 단이라고 하는데, 신라의 서울 서라벌로 가서 신라 임금을 즐겁게 하는 궁인이 되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 당시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김유신과 신하들을 이끌고 백제의 서울 부여로 가는 중이었는데, 백제 백성들의 공격과 백제 장군 진무(振武)가 이끄는 의병들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진무장군의 용맹함을 높이 산 무열왕은 진무 장군을 죽이지 말라고 명했지만 전쟁에 위협적인 존재인 진무 장군을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됐다. 진무장군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때여서 경계가 심했는데, 이때 신라의 병사들이 단을 무열왕 앞으로 데려왔다. 김유신 장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단이라는 백제의 궁녀를 경계하라고 왕에게 말했지만 무열왕은 모든 신하를 내보내고 단과 둘이 남았다. 

단은 자신은 의자왕의 딸 비화라는 공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왔다고 설명했다. 무열왕은 자신의 딸 소랑이 의자왕에게 죽은 이야기를 하며 비화에게 원수 갚는 일을 멈추고 자신의 딸이 되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비화는 품 안의 칼을 꺼내어 무열왕을 공격했다. 비화의 복수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무열왕은 비화를 용서했다. 그리고 비화가 밖에서 칼을 들고 기다리던 김유신 장군과 왕자 풍에게 해를 입지 않게 나제통문까지 배웅해 주었다.

 '원수와 은혜의 성'은 삼국 통일 전쟁 때,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적진에 용감하게 뛰어든 여성 인물 비화의 용맹함과, 자신에게 칼을 겨눈 자객 비화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신라 무열왕의 인물됨이 복수 모티프를 통해 대칭적으로 드러나 있다.

무풍고성(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문평 마을의 신라시대 무산현의 읍성 터)은 현존하지 않는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제5권을 보면, 647년 진덕왕(眞德王) 원년 동 10월에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신라 땅이었던 무산과 감물(甘勿)[함안], 동잠(桐岑)[김천]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신라 왕이 김유신으로 하여금 보병·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치열한 전투를 하게 하여 적의 머리 3,000여 두를 베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현재 문평 마을 일원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뿐만 아니라 마을이 들어서 있어서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성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문평 마을 앞쪽에 남-북 방향으로 소하천이 흐르고 있고 배후에 해발 581.1m의 높은 산이 우뚝 서 있는 지형을 고려한다면 평지성일 것으로 추측된다. 

무풍고성은 삼국 시대 신라 무산현의 치소지로서 백제와 접경지를 이루면서 신라군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후백제의 견훤, 계백장군 등을 모시는 사당이 전북에 몇곳이나 있는가.

완산사 제사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49793

김유신 관련 유적의 분포와 특징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4854

<사진> 

전주 완산사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충북도 기념물 1호인 길상사는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관련 유적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