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02> '간재척독(艮齋尺牘):전우와 최병심 선생의 편지
'호남 3재(三齋)’는 간재(艮齋) 전우(1841-1922)의 제자로, 근·현대 호남 유학을 대표해온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74~1957),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1877~1960),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을 말합니다.
이들의 스승인 간재는 "금재는 나에 못지않은 학자이며, 그의 학문을 조선에서도 따를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최병심은 일제 식민지배 강화로 우리 정신과 문화적 유산이 말살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계승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전주 옥류동(玉流洞, 교동)에 ‘옥류정사(玉流精舍)'란 서당을 열고 자신이 강학하던 곳을 ‘염수당(念修堂)’이라 했습니다.
일제가 전라선 철로개설을 구실로 한벽당을 헐어버리려 하자 그는 이에 강력히 항거하며 한벽당을 지켜냈습니다.
그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보여주는 '염재야록'의 서문을 썼으며, 이로 인해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시경 대아(大雅)의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 그 덕을 닦으라 無念爾祖 聿修厥德'라 했듯이 '염수(念修)'는 '조상을 생각하고 덕을 닦으라'는 의미입니다.
최근들어 간재 전우와 금재 최병심이 오고간 편지를 적은 '간재척독(艮齋尺牘)
책독)' 복사본을 석운 김정석선생으로부터 무상으로 기증받았습니다.
전우선생이 1903년에 금재 최병심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태극(太極), 동정(動靜)과 관련하여 ‘기자이(機自爾)’의 기(機)’ 자가 지칭하는 것에 대해 논했습니다.
'기'는 그 작용이 다른 존재에 의해 사역(使役)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담연(淡然)한 기는 만물에 보편타당하여 그것이 엉기어 모이면 사물이 되고, 사물이 흩어지면 바로 그 본연의 기가 되어 선천의 담연한 기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1912년에 금재 최병심 선생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왜(倭)가 주는 이른바 '은사금(恩賜金)'과 작위(爵位)를 거리낌 없이 받는 인사들의 작태를 개탄했습니다.
척독을 보면 유학과 관련된 내용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책에 이들의 초상이 있었는데요. 석지 채용신의 것이 분명합니다.
최병심의 초상은 왼편에 채용신이 그렸음이 드러나며, 이때 최병심은 54세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조선시대 마지막 어용화사(임금의 어진을 그린 화가) 석지 채용신(蔡龍臣, 1850∼1941). 그는 무과출신 관료이면서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제작 총괄하는 우두머리화가인 주관화사를 역임했습니다. 그는 서울 출신이지만 선조들이 전북에서 살았으며, 그 역시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조상 대대로 전북 지역에서 생활했고, 낙향 후에도 전주와 익산, 정읍 등에서 화실을 열고 활동하며, 무수히 많은 인물들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고종의 어진 제작 후, 직접 변산의 채석강에서 유래해 ‘석강(石江)’이라는 호를 선물했다고 하니, 채용신과 고종의 관계가 각별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짦은 편지 '척독(尺牘)'이 생각나는 가을입니다. 전북 고창의 유영선(柳永善. 1893∼1961)가에서 받은 한말 유학자 권순명(權純命. 1891~1974)의 간찰 즉 편지가 보입니다.
권순명은 한말 유학자로, 경술국치후 스승 간재 전우를 따라 서해의 군산도·왕등도·계화도 등지에서 15년 동안 학문에 몰두해 화도주석(華島柱石 : 중심되는 인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 뒤 스승의 문집·예설(禮說)·척독(尺牘) 등을 편집, 출간했습니다. 그는 1937년 47세 때 척독을 편집하기 위해 전국 팔도에 통문을 발송한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때 삭발을 강요당하자, 장도를 가지고 스스로 목을 찔러 피가 낭자하였으므로, 왜경들이 감복, 풀어주었습니다.
‘짧은 글’이라고 해서 간독(簡牘), 척독(尺牘), 간찰(簡札)이라고 불렀던 옛사람들의 편지글. 짧다 보니 말장난이나 기교를 부릴 틈이 없습니다. 용건이나 마음만 전하면 그뿐입니다. 손바닥 만한 토막글이 뭐 그리 대수일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월정사 성보박물관은 1948년부터 1953년 사이에 쓰인 한암스님과 탄허스님의 친필 서한문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들은 한암(漢巖, 1876~1951)스님과 탄허(呑虛, 1913 ~1983)스님이 조창환선생(전 강릉 사천초등학교장)에게 보낸 것으로, 유족들이 월정사에 기증한 것입니다.
편지는 한암스님 4통, 탄허스님 1통입니다. 탄허스님 서찰은 1953년 2월에 발송했습니다.
탄허는 승려이자 유불도(儒佛道)에 능통한 20세기 대석학입니다. 그는 1913년 독립운동가 김홍규(金洪奎)의 아들로 김제에서 출생해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화엄경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고 승가교육에 힘쓰다가 1983년 월정사 방산굴에서 세수 71세, 법랍 49세로 열반에 들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여러 선생님들께서 이곳을 다녀가셨는데 지금까지도 그 향기가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뜻밖에도 적막한 가운데 편지가 와서 펴 보니, 받은 은혜에 무어라 사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편지 받은 이후 초봄 추위가 여전히 매섭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육영(育英) 중에 편안하신지요...편지를 받으니 참으로 성대한 마음으로 타인들과 좋은 교류를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붓이 다 닳도록 써도 종이가 부족할 것 같습니다. 이만 쓰고 갖추지 못합니다'
조씨에게 보낸 답장 서신입니다.
편지에는 이전의 만남을 그리워하면서 상대의 안부를 상세히 묻는 자상함이 드러나 있습니다.
탄허스님은 편지 형식 대신 합죽선 선면에 진리를 담은 싯구를 써 전달했으니 '지풍(知風)'입니다.
이는 1980년대 초 작품으로 이전홍에게 주었습니다.
'지풍지자(知風之自, 바람이 일어나는 곳을 알고) 지미지현(知微之顯, 은미함 속에 드러남을 안다면) 가여입덕의(可與入德矣, 함께 덕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위이전홍선생 탄허(爲李全洪先生 呑虛)'
이는 '중용' 33장의 내용으로, 원인을 알고 미세함 속에 확연하게 드러난 것을 안다면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옛사람들은 진솔한 마음을 담은 한 줄 한 줄을 참글로 보았습니다. 문집을 내면서 간찰을 빠뜨리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짧은 편지라고 해서 안부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의 삶의 철학이나 시국관을 드러내 보이기도 합니다. 한 장의 간찰에는 선인들의 진솔한 마음뿐 아니라 서정과 여유, 기개와 절조 등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은 문장 하나에도 도(道)를 담아야 했을 정도로 감정 표현에 엄격한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록물이었던 편지는 우리가 ‘고고하다’고만 생각했던 선비의 다양한 감정과 함께 인간적인 면모를 담고 있습니다.
‘척독’은 오늘날의 ‘SNS’ 와도 같은 것 아니었을까 싶다. 길지 않은 문장에 생각을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형식이 SNS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따라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생각납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로 시작하는 이 곡은 후렴에서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요.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 같이'로 끝맺음합니다.
과거 선비들과의 현대인들의 끊임없는 소통의 장 마련을 기대하면서 SNS가 진정과 소통을 담기 바랍니다.
편지 한 통이 그리운 이 가을날, 비바람을 대지에 흠뻑 뿌려주고 있습니다. 척독같은 편지를 보내줄 사람이 주변에 몇명이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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