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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1924년 군산 이입량의 50%를 상권에 반출했다. ‘음식조선’ 통해 일제 시대 전북을 바로 보다



군산 쌀이 서일본으로 반출되는 동안 조선 내의 쌀 공급에는 제한이 걸려 많은 조선인이 다른 곡물과 감자를 대신 먹어야 했다. 1인당 열량 지수는 1920년에서 1945년까지 절반 가까이 떨어졌고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1.5㎝ 작아졌다. 일본 식료 제국은 근대 시장 원리에 따라 푸드 시스템을 운영했으나, 그 중심은 항상 일본 내지였다.
조선 쌀의 생산과 소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산미 증식 계획이 시행되고, 일본 지주가 농장주로 조선에 진출하면서 조선 내에서 벼농사의 일본화가 실현됐다. 그러나 쌀 생산량 증가는 조선인 복리에 이바지하지 못했다. 조선 내 쌀 소비를 억제하고, 대체 곡물(보리, 콩, 조, 감자, 고구마 등) 소비를 촉진하는 등 수출을 중심으로 소비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1930년대까지 조선 내 쌀 소비량은 오히려 떨어졌고, 조선인의 1인당 소비 열량 저하도 꾸준했다. 그 결과,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920년대 중반부터 1945년까지 약 1∼1.5㎝나 작아졌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까지 중반에 걸쳐 총수확량의 40% 이상이 최종 소비지인 일본으로 수송됐다. 대구가 3만6,025톤으로 가장 많았다. 곡창지대인 전북의 쌀은 김제 2만2,288톤, 군산 1만3,164톤, 정읍1만899톤 등이었다.
‘군산항에서의 미곡 적출 장면(조선흥업주식회사 편, ‘조선흥업주식회사 30주년 기념지’(1936)’이 예사롭지 않는 까닭이다.
쌀의 경우 식민지 시대에 ‘비료에 고반응하는 벼 품종’이 개발돼 조선·대만·만주에도 보급됐으며, 일부 일본 학자는 당시 제국일본판 ‘녹색혁명’이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은이는 당시 조선과 일본의 생산성 격차가 커서 녹색혁명은 한정적 의미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한일 격차는 1971년 한국에서 통일벼가 나오면서 해소됐다는 설명이다. 참고로 밥맛이 떨어지는 통일벼는 1992년 정부 수매 중단으로 더 이상 재배되지 않는다.
소 사육은 서선, 북선 등 함경도와 강원, 경북, 경남 진주, 전북 금산 등이 대표지역이었다. 1926년 평안북도가 19만3,598마리로 가장 많았으며, 전북, 충남, 충북 등 3도는 사유 두수가 적었다.
전선신식소주연맹회는 주정의 원료로 제주도에 고구마를 경작하는 것 외에 평남, 황해, 전북 등에 경작을 장려했다.
전북엔 각 맥주회사의 특약점이 자리했다.
대일본맥주(삿포로,아사히)는 군산 등에, 제국맥주(사쿠라)는 이리, 전주, 군산 등에, 기린맥주(기린)는 전주, 이리 등에, 일영양조(캐스케이드)는 군산 등에 있있다. 1924년의 경우 군산은 2,563상자를 기록, 해마다 증가하던 가운데 이입량의 50%를 군산 상권에 반출했다.
1944년 조선 내에 경작되던 엽연초는 전매국에 의해 수매됐다. 담매 제조공장은 경성 2곳, 전주 2곳, 대구 1곳, 평양 1곳 등 모두 6곳이 자리했다.
‘제국이 재편한 음식경제사-음식 조선(글쓴이 임채성 일본 릿쿄대학 교수, 옮긴이 임경택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펴낸 곳 돌베개)는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음식 문화를 어떻게 재편했는지 실증 연구를 바탕으로 고찰했다. 기존 쌀을 중심으로 한 연구에서 벗어나 홍삼, 우유, 사과, 명란젓, 소주, 맥주, 담배에 이르기까지 연구 범위를 넓혔다. 함경도 음식인 명란젓이 일본인의 기호 식품으로 변하는 과정이 흥미롭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