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북스토리

순창양씨 '남원양(楊)'씨를 빛나게 한 집’. [휘양관(輝楊館)'과 '만수탄 종호8경'을 알아보니] 순창 동계 구미마을에 보물 등 다양한 문화재 전시


'휘양관'은 지난해 10월에 개관, ''남원양(楊)'씨를 빛나게 한 집'으로, 동계 구미마을과 관련된 문화재, 유적, 역사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한옥전시관이다. '우리 동네 작은 박물관 휘양관(輝楊館)' 현판 휘호 낙인은 동호 양상배라고 쓰였다. 26일 양청문 대한명인 현판서각장(대한명인 635호 대한명인회 전북지회 부회장)과 이곳을 방문했다. 편집자



순창군 동계면에 자리한 구미마을은 해발 580m 무량산 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거북바위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입구에 거북 모양의 약수만 보아도 친근한 마을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구미마을은 고려시대 강릉김씨가 이주한 터에 이태조가 즉위한 후 남원양씨가 새로 마을 터를 닦은 곳으로, 이후 600여 년간 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마을 앞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꼬리가 마을로 향해 있어 ‘구미’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입구엔 보호수와 ‘귀화정’이라 불리는 정자가 조성되어 있어 누구나 잠시 쉬어갈 수 있다. 대제학 양이시(楊以時)의 오언절구 한시 ‘제 평릉역정’이 걸려 있어 마을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편액은 양상배 서예가가 글씨를 쓰고, 양청문 서각작가가 은행나무 행자목에 글씨를 새겼다.

고려말 공민왕 때 대제학을 지낸 양이시는 평릉역 정자에 올라 당시 혼란스럽던 나라를 걱정하면서 시를 지었다.



제 평릉역정(題 平陵驛亭)



벼꽃은 바람결에 희어지고

콩꼬투리는 비온 뒤에 푸르다

만물은 제자리를 얻었는데

나는 시냇가 정자에서 노래하네



도화풍제백(稻花風除白)

두협우여청(豆莢雨餘靑)

물물득기소(物物得基所)

아가계상정(我歌溪上亭)



귀화정 아래엔 ‘고려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려’ 비각이 있으며, 비각 옆에 ‘열부숙인이씨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1377년 남편 양수생이 세상을 떠나자, 숙인이씨는 개가를 거절하고, 유복자 양사보를 등에 업고 시댁인 남원까지 천리 길을 내려갔다.

그녀의 부모는 당시 풍습대로 수년에 걸쳐 개가를 권유했지만, 그녀는 남편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열부 숙인이씨 정려는 조선 세조 때 남편을 잃고 네 자녀를 홀로 키우며 가난을 이겨낸 열녀인 숙인 이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숙인이씨의 행실은 세조의 귀에 들어가, 1467년 정려를 받았는데요, 정려는 충효를 닦은 사람에게 내려주는 칭호로, 당시에는 주로 부모를 봉양한 효자 열부에게만 내려졌던 터라 더 귀감이 되고 있다.

우리동네 작은 박물관 ‘휘양관’ 안내판이 보인다. 지난 10월 개관한 휘양관은 지상 1층 규모로 조성됐다.

동계 구미마을과 관련된 문화재, 유적, 역사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한옥 전시관이다.

무량산이 병풍처럼 둘러있어 더욱 멋스러운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휘양관’이라는 이름처럼 햇빛을 받아 더 빛이 난다.

양상춘 안내자는 "고즈넉한 풍경이 함께하는 구미리 한옥예촌 전시관은 남원 양씨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면서 "순창을 찾는 많은 분이 방문해 구미마을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남원양씨의 뿌리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고 했다.

구미마을은 순창군에 남아있는 남원양씨의 집성촌이다. 고려시대부터 남원양씨가 정착하여 살아온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남원양씨의 거주지 중 가장 큰 마을로 성장했다. 1960년대 구미초등학교가 설립되었을 때는 학생 모두가 남원양씨로 전국에서 유일한 씨족 학교로 알려졌다. 장수마을로도 알려진 구미마을의 마을의 역사와 변화 모습도 사진 자료로 살펴볼 수 있다.

돈암이 위치한 만수탄은 순창군 내의 섬진강 구간에서 가장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전시관에 소개된 '만수탄 종호8경'을 읽어보면 그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할 수 있다. 순창 군민들은 순창지역 섬진강 구간을 적성강(赤城江)이라고 불렀다. 그중에서도 취암산 동쪽, 무량산 아래를 흐르는 적성강 지역을 특별히 만수탄(萬水灘)이라 했다.

이 일대는 섬진강 물줄기가 호남정맥을 넘나들며 빚어낸 기암괴석으로 섬진강 구간에서 자연경관이 가장 빼어난 곳이다. 무량산 너머로 벌동산(옛 취암산ㆍ587m)과 마주하며 북으로 용궐산(647.6m), 동으로 무량산(587.0m)이 에워싼 곳에 투구 모양의 돌섬들이 형성되어 있는 바, 이 일대 소(沼)를 ‘종호(鍾湖)’라 한다. 종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향유하고 풍류를 누린 대표적 인물이 초로(楚老) 양운거(楊雲擧ㆍ1613∼1672)였다. 그는 남원양씨 구미리 입향조인 양사보(楊思輔)의 9대손으로 조선시대 효종 때 사람이다. 산수를 사랑해 구미리 만수탄에서 지북까지 모두 9개의 정자를 세운 부호였다. 종호정(鍾湖亭)이라고도 불리는 육로정(六老亭)을 짓고 시주(詩酒)를 즐겼다.

‘종호’ 바위글씨와 취암산(현재 벌동산) 자락에 ‘석문’ 바위글씨를 새겼으며, ‘종호바위 위에 술을 부어 놓고 마신 거사’로 알려져 있다. 국가에서 큰 부자에게 주는 칭호인 참봉 칭호를 들었던 인물로 '현종실록'에 흉년이 들자 쌀 수백 석을 내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와 함께 노닐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남원 사람들인 양진당(養眞堂) 하만리(河萬里), 최휘지(崔徽之)와 최유지(崔攸之) 형제, 유동연(柳東淵)과 유동달(柳東達) 형제였다. 이들을 여섯 명의 노선(老仙), 즉 육로(六老)라 불렀다. 양운거가 지었다는 9개의 정자는 소멸되었지만 '종호팔경운'(鍾湖八景韻ㆍ종호팔경 시 운자를 따서 짓다)이라는 시가 있어 옛 만수탄 종호의 경관과 풍류객들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다.

'종호팔경운'은 9편의 칠언절구로서 종호의 목가적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육로(六老) 일원이었던 하만리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그 후손들이 1911년에 간행한 시문집 '양진당유고(養眞堂遺稿)'에 실려 있다.



제1경은 '호중석서(湖中石嶼)'이다. 이는 '호수 안의 돌섬'을 말한다.



땅은 종호(鍾湖)를 숨겨두고 주인을 기다리는데

하늘이 돌섬을 만들어 놓으니 낚싯줄 드리우기 좋네

그대는 육로암에 새겨진 글자를 보았는가

물이 넘실거려 모래로 갈아도 물에 갈리지 않네



제1경은 강물 한가운데 배치된 풍류의 공간인 돌섬(石嶼ㆍ석서)들을 노래하고 있다. ‘종호암’(鍾湖巖)과 ‘육로암’(六老巖), ‘조대’(釣臺)라 새겨진 바위들이 펼쳐진다.



제2경은 암상와준(巖上窪樽)으로, '바위 위 웅덩이 술통(巖上窪樽)'이다.



하늘이 기이한 바위를 쪼아 술통을 만들었으니

병 같기도 하고 사발 같기도 하고 또 동이 같기도 하네

다만 아홉 웅덩이로 하여금 길이 마르지 않게 한다면

남들 비록 다음 산으로 갈지라도 나는 홀로 남아 있겠네



바위 위 ‘술을 담는 독’, 바위 모서리에 구준암(九樽巖)이란 글씨가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다. 이는 ‘아홉 개의 술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바위에 형성된 다수의 돌개구멍에서 유래된 같다.



양운거는 이 바위 위에서 벗들과 술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술 주전자가 너무 작아 거듭 술을 채워야 하는 것이 번거로워 바위 웅덩이에 술을 가득 채우고, 술로 목을 축여가며 시를 주고받으며 읊었다고 한다.



제3경은 '영축귀운(靈驚歸雲)'으로, '영취봉의 돌아가는 구름(靈驚歸雲)'이다,



집 뒤에는 취봉이 우뚝 솟아 있고

하늘가를 돌아보니 푸른 연꽃이 피었네

구름이 와서 장맛비 된다 한들 상관 않는

무심한 듯 태연한 네 모습을 사랑하노라



‘영험한 취암산을 돌아오는 구름’을 노래하고 있다. 취암산은 종호암 전면에 펼쳐진 산으로 만수탄을 중심으로 동서로 무량산과 대응하고 있다. 현재 명칭은 벌동산이다.



제4경은 '향로조일(香爐朝日)'로, '향로봉의 아침 해'를 말한다.



동쪽 봉우리에 아침 햇살이 구름 사이를 통과하니

따뜻한 기운이 왕성해 큰 산과 같네

주인은 술에 취해 아침 잠을 편히 자고

늦게 일어나 아이 불러 낚싯대를 드리우네



제5경은 '석문낙엽(石門落葉)'으로 '석문의 낙엽(石門落葉)'을 말한다.



산길 험한 곳에 돌로 문을 만들었고

늙은 회화나무는 구불구불 몇 년 된 뿌리인가?

가을 바람에 잎이 떨어져 다니는 자취를 덮으니

물의 근원을 다시 찾을 적에 헤맬까 미리 염려하네



제6경은 '탁탄수압'(濯灘睡鴨)'으로 '갓끈 씻는 여울에 졸고 있는 오리'를 말한다.



넘실대는 푸른 물결 바닥까지 맑고

강에 임하여 바로 적합한 곳이면 내 갓끈을 씻으리

아이에게 크게 노래하지 말라고 말을 전하는 것은

물가 모래톱에서 오리 놀랄까 두렵기 때문일세



제7경은 '전교목적(前郊牧笛)'이니 '앞들의 목동 피리소리'를 말한다.



비 온 뒤 강물 흐르는 교외에는 작은 풀이 푸르고

목동의 피리는 새로운 소리를 연주하네

말등이 소등의 편안함만 못하니

은거하는 선인이 도를 깨달으면 이러한 한가한 심정이리.



제8경은 '고사신종(古寺晨鐘)'이니 옛 절의 청아한 새벽 종소리다.



절은 아득히 푸른 하늘에 가깝고

만 길 낭떠러지라 길이 통하지 못하네

늙은 스님 참선에 들었으니 누가 보리오

맑은 새벽에 오직 예불 종소리만 들리누나



옛 절에서 들리는 새벽 종소리를 노래하고 있다. 만수탄 인근에 있었던 취암사 또는 불암사의 타종 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만수탄 종호 일원에서 확인되는 바위글씨는 모두 9점이다. 첫 번째 종호 바위글씨는 구미리에서 육로정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병풍처럼 서있는 석벽(石壁)에 있다.

‘종호(鍾湖)’라는 대형 바위글씨 이외에 ‘종호화수계(鐘湖花樹稧)’라 적고 총 10명의 남원양씨 회원명이 나열되어 있다. 한편에는 '국판노미 처양복례 종부익사처(국판노미의 아내 양복례가 남편을 따라 빠 져죽은 곳)'이라 새겨져 있다. 종호 바위 글씨 두 번째는 현재 '육로정(六老亭)'이란 편액을 단 종호암에 종호1 글씨와 거의 같은 크기로 횡서되어 있다.

네 번째는 돌섬에서 100여 m 상류에 형성된 응회암에 종서로 새겨진 구준암(九樽巖ㆍ9개의 술통)이란 글씨다. 다섯 번째 ‘조대(釣臺ㆍ낚시질하는 곳)’라고 쓴 글씨다. 여섯 번째는 ‘육로암(六老巖)’이고, 일곱 번째는 ‘금암(琴巖)’라는 글씨다. 탄금(거문고와 가야금) 풍류가 행해졌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여덟 번째 종호암에서 직선거리로 1.6㎞, 북서쪽 적성 석산리 방향으로 내려오면 자연석에 ‘석문(石門)’이란 바위 글씨가 새겨 있다. 아홉 번째 종호팔경 제6경 강 건너 바위 위에 ‘산인동(散人洞)’이란 바위글씨가 종서와 횡서로 중복해 새겨져 있다.

이중 ‘종호’ 바위글씨는 ‘종호(鍾湖)’ 또는 ‘종호(鐘湖)’라는 다른 한자로 새긴 것을 볼 수 있는데, 후자(鐘)는 종을 뜻하는 반면에 전자(鍾)는 손잡이 없는 금속제 술잔을 의미한다.

‘종호’라는 지명의 유래는 '시객들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종소리처럼 메아리친다'는 의미에서 연유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육로 모임에서 풍류를 주도했던 양운거가 돌섬 밖에서 시주(詩酒)에 필요한 물품을 수급하기 위한 신호수단으로 종(鐘)을 이용했던 연유로 ‘종호’라 불리었다는 견해도 있다.

휘양관(輝楊館)엔 남원양씨 집성촌 이야기와 열부 숙인부인 이씨 정려비 탁본, 남원 양씨 문중과 관련된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16세기에 발간된 남원양씨 최초 족보를 비롯해 영조 28년 족보, 조선세조 13년인 1467년에 작성된 열부 숙인이씨 정려 기록도 살펴볼 수 있다. 남원양씨 최초 족보는 남원 양씨의 시조인 양백의 후손들의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조선시대 양씨 가문의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곳에는 국가보물 7점(홍패 2점, 교지 5점)과 전북유형문화재 등 다양한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다. 보물 제725호로 지정된 홍패 2점과 교지 5점은 조선시대 남원양씨의 공로를 인정받은 문서로, 남원양씨 가문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전시관 내부에 구미마을을 소개한 책자가 비치되어 있어 잠시 읽어볼 수 있다. 귀미마을은 고려시대부터 남원양씨의 집성촌으로, 조선시대에는 남원양씨의 거주지 중 가장 큰 마을로 성장했다.

조선 세조 때 남원양씨의 후손인 양성지가 마을에 정착, 마을을 발전시킨 이야기까지, 마을의 역사와 문화가 한 권의 책자에 담겨 있다.

현재 구미마을은 100여 가구의 남원양씨가 전통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동제를 지내고, 음력 9월 9일엔 열부 이씨 정려비를 참배하는 증 조상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휘양관의 우측으로는 남원양씨의 종중 사당인 ‘귀문각’이 자리하고 있다. 귀문각에는 남원양씨의 종중 문서와 유물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아직도 마을의 남원 양씨 후손들은 이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귀문각에 보관되어 있는 홍패는 고려 공민왕과 무왕 때의 양이시와 양수생 부자가 과거에 급제하여 받은 문서로 고려 후기의 공문서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