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조 가야금과 신관용류
산조는 한국 전통음악에 속하는 기악 독주곡의 한 장르다. 19세기 말 김창조의 가야금산조를 시작으로 거문고산조, 대금산조, 해금산조, 피리산조, 아쟁산조 등으로 발전했다.
가야금산조의 시원으로 일컫는 악성(樂聖) 김창조(1856~1919). 그는 1917년 7월(음력) 김창조는 전주에서 회갑을 맞았다. 이 때 그가 양성한 후진 들은 스승을 위해 축하공연을 준비했는 데 주요 연주곡목은 역시 '가야금 산조' 였다.
김창조는 그때 자신이 창작한.장별제 산조가 짧은 기간에 대중화된 것을 목격 했다. 실제 산조가 굉범위한 연주 단계로 넘어간 것은 1920년대 이르러세다. 그것 은 곧 장별제의 확립에 크게 영향을 주 었다. 그리하여 재능 있는 흐계자들은 원 가락을 습득하는 단계로 쉽게 이행할 수 있게 되었고,점차 각 연주가의 개성에 따라 확대 발전하게 되어 후세에 많은 명인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창조가 전주에 머무는 시기는 그 의 생애에 있어서나 산조의 대중화에 있 어서 매우 의의있는 시기로 기록된다.
그러나 김창조의 전주에서 생활은 오 래 가지 못했다. 그가 전주를 떠난 것은 그의 뜻이 아니라 불합리하고 부담스러 운 외부의 환경 때문이었다. 즉 양반들에 게 아부하는 것을 거부하고 앙반들의 강 요와 횡포를 반박해 그곳을 떠났던 것이 다. 그후 그의 활동은 군산 나주 정읍 대 구 등을 거치며 이어졌고 한 지방에 안착하지 못했다.
김창조는 그의 나이 64세 (1919년) 때 지친 몸을 이끌고 광주로 돌아왔다.
김죽파
김죽파(金竹坡)[1911~1989]는 영암 출신으로, 본명은 김난초(金蘭草)이다. 가야금산조의 명인이자 처음으로 가야금 산조의 틀을 짰다고 일컬어지는 김창조(金昌祖)의 손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예명은 김운선(金雲仙)이다.
김죽파는 여덟 살 무렵부터 전주에서 기거하던 할아버지 김창조로부터 풍류 한바탕을 배웠다. 이때 배운 것이 잔령산부터 굿거리까지였다. 광주로 이사한 후에는 김창조가 타계할 때까지 풍류,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우며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라고 하는 김창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훗날 김죽파는 619가락의 산조를 재창조하는데, 그중 김창조의 가락이 112장단이나 들어 있다.
송화자
남원의 제성가야금회 송화자 대표가 2022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김죽파류)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시는 전북도로부터 전승능력과 전승환경, 전수활동 기여도가 탁월한 점을 인정받은 송화자 명인이 30일 간의 인정 예고기간과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가야금산조 보유자로 선정됐다고 19일 밝혔다.
‘동편제’ 판소리 가문에서 태어나 증조부 박만조, 외할아버지 박봉술, 어머니 박정례에게 한국의 민속음악을 배운 송화자 명인은 어린 나이에 자연스레 가야금에 입문한 후 국악고, 대학, 대학원을 진학하면서 가야금산조를 학습하게 됐다.
특히 그녀는 가야금산조의 시원으로 일컫는 악성(樂聖) 김창조(1856~1919)의 손녀인 김죽파 문하에 입문, 지난 40여년 동안 한국 민속음악 중 기악 독주곡인 가야금산조를 연주해 왔고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전북에도 주목을 받아온 가야금 산조가 있다. ‘신관용류 산조’다.
신관용류 산조는 김창조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영채 명인으로부터 이어진 가락이다. 신관용(1912~1961)은 김제 출신이다. 아버지는 피리와 장구 명인이었고 어머니는 무속인이었는데 열다섯 살에 가야금 명인 이영채를 만나 가야금 산조를 배웠다. 그러나 스승의 가락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 가락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완성한 가락으로 자신만의 산조를 구축했다. ‘이영채류’가 아닌 ‘신관용류’ 가야금산조가 이어지고 있는 이유다.
그는 스물일곱 살에 결혼했으나 아편에 빠져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권번에서 가야금을 가르치거나 잔칫날 초대받아 연주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게다가 타고난 기량으로 복잡한 기교와 강한 즉흥성을 즐겼던 그로부터 가야금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제자도 제대로 두지 못했다.
다행히 신관용류 가야금 산조는 강순영이 받아 가야금병창으로 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된 강정열에게 전해졌지만 그 전승의 맥은 여전히 불안하다. 신관용류 가야금산조가 갖는 의미와 가치에도 불구하고 무형문화재 지정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신관용은 김제 출신이다. 아버지는 피리와 장구 명인이었고 어머니는 무속인이었다. 그는 열다섯 살에 가야금 명인 이영채를 만나 가야금을 배웠으나 스승의 가락만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 연주했다.
‘어제 탔던 가락과 오늘 타는 가락이 다를 정도’로 즉흥성이 강하고, 슬프고 처연한 색깔로 자신만의 세계를 담아낸 신관용류 산조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오늘날 우리 전통음악 연주 무대에서 활발히 연주되고 있는 가야금 산조는 여럿이다. 그중 국가나 지방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산조는 김죽파 강태홍 신관용 성금련 김윤덕 김병호류다. 주목하게 되는 사실이 있다. 전북제 신관용류 가야금 산조의 행방이다. 특이하게도 신관용류는 전북이 아닌 경남 문화재다. 보유자는 남원 출신인 강순영 명인이다. 안숙선 명창의 이모이기도 한 강순영은 일찌감치 생활 터전을 진주로 옮겨 활동했다. 신관용류 산조가 경남 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다.
전북제 산조가 다른 곳에서라도 계승되고 있는 현실은 반가우면서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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