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이야기 38> '와사등'의 시인 김광균 작품에 군산 최초의 성당 ‘둔율성당’ 나온다
“한낮이 겨운 하늘에서 성당의 낮 종이 굴러 내리자/ 붉은 노트를 낀 소녀 서넛이/ 새파란 꽃다발을 떨어트리며/ 햇빛이 퍼붓는 돈대 밑으로 사라지고”
'와사등의 시인' 김광균(金光均·1914년~1993년)이 1936년 4월 발표한 ‘산상정(山上町)’이다. 당시 개복정은 개복·창성동, 약송정은 개복·선양동, 산상정은 선양동, 둔율정은 둔율동·둔뱀이가 속했다. 산상정은 1930년대 군산에 있던 지명으로, 현재 선양동을 말한다. 그의 시 중 유일하게 군산 지명이 나오는 시다.
시 속 성당은 군산 최초의 성당 ‘둔율성당’이다. 돈대(墩臺)란 평지보다 높직하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 성당에서 걸어서 8분 거리에 있는 선양동 해돋이 공원에서 성당을 바라보면,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 성당이 눈부시게 빛난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김광균이 1938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와사등(瓦斯燈)’이다. '와사등'은 당시 가로등으로 쓰던 가스등. 그런데 시인은 왜 이 거리가 낯설고 눈물겹다고 했을까.
1914년 개성에서 태어나 1993년 서울에서 눈을 감은 그는 가장 빛났던 청춘, 열여덟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 군산에서 살았다.
'설야', '외인촌' 등 수많은 작품이 여기서 나왔다. 당시 군산은 국내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였다. 개성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육 남매의 장남, 즉 가장이 된 그가 돈을 벌러 떠나온 곳이 군산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김광균의 손자인 김성수(48) 안디나 와인 대표다. 그래서일까. 김광균 시에는 군산의 많은 장면들이 녹아있다.
시인 김광균은 원래 ‘개성상인’이었다. 1914년 개성 선죽교 부근의 포목 도매상집에서 태어난 그는 개성상고(옛 개성상업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친이 별세하는 바람에 빚더미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함께 셋방을 전전하며 장사의 원리를 몸으로 터득했다.
개성상고 1학년 때인 1926년에는 누나를 잃었다. 그때 쓴 시 ‘가신 누님’이 중외일보에 실려 만 12세에 소년 문사(文士)가 됐다. 고교 졸업 후에는 경성고무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해 전북 군산지사에서 7년간 기업 실무를 익혔다. 그러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계속했고,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설야(雪夜)’가 당선됐다. 그해 서울 용산의 본사로 옮기고 다음해 첫 시집 '와사등(瓦斯燈)'을 출간했다.
‘와사등’의 와사(瓦斯)는 가스의 일본식 한자음으로 가스등을 가리킨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고교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작품이다. 당시 가스등은 근대를 상징하는 빛이었다. 그에게는 개성과 군산에서 체험한 문명의 발광체(發光體)이기도 했다. 그는 8세 때 개성에 처음 전기가 들어온 날을 회고하면서 ‘십촉짜리 전등불은 신화같이 밝아 불빛이 안마당에서 헛간까지 비쳐 우리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놀랐다’고 표현했다.
군산에서 일하던 김광균이 서울로 발령이 나서 상경한 때가 1938년이었다. 이 무렵 김광균은 조선일보 기자를 하던 시인 김기림을 통해 여러 화가를 소개받았다. 김만형, 최재덕, 이쾌대, 유영국, 김환기, 이중섭 등이 그의 친구였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회사를 중견기업으로 탄탄하게 키운 그는 1960년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을 맡아 ‘수출보국(輸出報國)’에 진력했고, 1970년대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이사까지 지냈다.
1987년 KS물산 사장을 끝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시집 '추풍귀우'와 '임진화'를 펴내며 ‘시의 세계’로 돌아왔다. 이후 생활이 어려운 문인들을 남몰래 돕고, 작고 문인들의 문학비를 세워주며 문단의 또 다른 가로등 역할을 하던 그는 79세인 1993년 11월 23일 조용히 하늘로 떠났다. 그의 시 ‘설야’ 속 풍경처럼 첫눈이 내린 다음날이었다.
경성고무는 군산 근대화의 상징물과 같은 회사였다. 고무신 하나로 전국적인 기업으로 성장, 약 60년 동안 지역과 애환을 같이한 향토 기업이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회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현대세솔아파트가 우뚝 서있다. 미원광장에 있는 3.5m 높이의 검정고무신 조형물 만이 이곳이 고무신 공장이었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3층의 근대생활관에는 일제 수탈의 역사와 민중의 생활상이 실감나게 재현돼 있었다. 인력거꾼들이 손님을 기다리던 차방(車房), 당시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던 경성고무의 만월표 고무신을 판매하던 군산의 형제고무신방 등 재밌는 공간이 많았다.
1922년 자본금 규모 50만 원(현재가치 약 50억 원)의 주식회사로 커진 대륙고무는 9월부터 광고공세를 편다.
‘이왕 전하(순종)께서 어용하심에 황공 감격함을 비롯해 각 궁가의 사용하심을 받들며, 여관 각위의 애용을 받으며…’
라면서 왕가에서 신는 고무신임을 내세웠다. 그러자 만월표 고무신은
‘이강 전하(의친왕)가 손수 고르셔서 신고 계시는’
신발이라고 맞불을 놓았다. 고종의 둘째 왕자이자 순종의 아우로, 반일 의식이 강했던 의친왕을 모델 삼아 민족감정에 호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이만수 사장이 설립한 경성고무공업사는 한국인 기업가에 의해 설립된 유일한 중소기업이었다고 한다. 경성고무는 해방 이후 '만월표' 고무신을 생산하였는데, '만월표'가 최고 인기 제품이었다. 이때 주 생산품은 '깜둥이 신발'로 알려진 검정 고무신이었다. 동그라미 안에 ‘만월(滿月)’이라고 새겨진 만월표 고무신을 생산했다. 전국 각지에 특매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검정 고무신은 주로 짚새기를 신고 다니던 일반 한국 서민들에게 대단한 제품이었고, 그 인기는 시들 줄 몰랐다고 한다. 경성고무는 점차 기술 수준을 높여 제품을 다양화해 나갔는데, 나중에는 표백 기술을 적용해 흰 고무신을 생산했고, 검정 운동화에 이어 하얀 운동화도 생산했다고 한다.
고베에서 군산에 온 것 중의 하나가 신발산업이었다. 1920년대 무렵, 서울에서 친척 찾아 군산에 내려온 이만수는 고무신 장사를 해서 큰 돈을 벌었다. 조선의 산물인 가죽신, 나막신, 짚신에 비해 고무신은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비올 때나 눈올 때도 상관없이 신을 수 있었고, 잘 헤어지지도 않았다. 장사가 잘되니, 이만수의 신발가게는 날로 번창했다. 해방되면서 미군정청은 일제 기업을 한국인들에게 불하했다. 이만수는 미군정의 적산불하(敵産拂下) 당시 군산의 신발공장을 확보하게 되는 데, 바로 경성고무다.
경성고무는 만월표 신발을 생산, 크게 성장해 갔다. 하지만 경성고무는 화재 등으로 흔들렸고, 경영주의 의지 부족으로 표류했다. 결국 SK에 넘겨진 경성고무는 1983년 선경에 완전히 매각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경성고무가 자리잡았던 옛 군산역 앞 부지에는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뒤돌아 보면 아쉬운 일이다. 일제시대부터 군산과 함께 신발산업 중심지였던 부산과 경남에서는 아직도 신발기업들이 살아 지역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고, 신발 산업은 무한히 번창할 수 있는 생활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군산 미원광장에 검정 고무신 조형물이 설치돼 눈길을 끌고 있다. 고무신 조형물은 군산시 흥남동 소규모 도시재생사업 일환으로 옛 미원동에 위치했던 경성고무의 ‘만월표’ 고무신을 모티브로 과거 고무신을 만들었던 도시노동자와 고무신을 신고 야구 연습을 해온 남초등학교 야구부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조형물은 야구 홈베이스 위에 3.5m 높이로 검정 고무신 한 켤레를 형상화했다.
창업주인 이만수씨의 아들 이용일씨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초대 사무총장을 지내고 군산지역에 야구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 초등학교 4곳, 중학교 2곳, 고등학교 1곳에 야구부를 만들기도 하는 등 야구사랑이 대단했다.
지역 주민들과 화합하고 친목을 다지며 주민 주도로 이루어진 도시재생의 결과물을 볼 수 있어 뜻깊다.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해왔던 이곳 미원광장을 시민들이 많이 찾아와 옛 기억과 추억의 공간이다.
비가 올 때 신는 나막신도 두꺼운 버선을 신지 않으면 발이 아파 멀리 갈 수도 없었다. 또한 고무신 한 켤레 값이 짚신 다섯 켤레 값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도랑을 막아 물고기를 잡고, 운동장에서 고무신 멀리 차기놀이를 했으며 고무신이 닳으면 엿장수 아저씨에게 달려가 엿과 바꾸어 먹었던 검정고무신은 내 삶의 추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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