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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아버지 유탁과 하반영화백의 인연 눈길

유인촌 문화체육부장관의 아버지 유탁은 1950년대 완주군 봉동읍에 살면서 그의 주도로 조진구, 이강천, 하반영과 자유극예술협회를 조직하고 이리에서 희곡을 쓰면서 왕성한 연극 활동을 한 기록이 있다.그렇게 보면 그는 분명한 전북인이다. 유장관 역시 전북인이다./편집자

새전북신문이 발굴한 하반영(1918-2015)화백이 ‘예술인 긴급복지 지원’ 1호 수혜자로 선정된 적이 있다. <단독 기사 2014년 4월 1일자, 2일자, 5월 1일자 등>

 

 2014년 3월 27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예술인을 적극 발굴해 지원한다는 취지로 ‘찾아가는 예술인 복지’사업 추진을 발표한 이후 이뤄진 첫 사례로, 새전북신문의 기사로 인해 현실화됐다.

 

‘한국의 피카소’로 통하는 하화백은 대한민국의 최고령 현역 작가로 매년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대장암 수술을 받은 후, 올해 초 암이 임파선으로 전이돼 항암치료가 절실한 상황으로 기초 노령연금만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같은 하화백의 안타까운 사연이 새전북신문 4월 2일자, ‘97세 화가의 쓸쓸한 노후’)에 실렸고, 소식을 접한 재단이 관계자를 군산으로 급파해 정확한 실태 조사와 특별 심사를 통해 ‘예술인 긴급복지지원’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하화백은 4월부터 11월까지 8개월간 매월 소정의 금액을 지원받게 됐다.

 

 하화백은 7세에 그림을 시작,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3회, 국전 입선 7회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예총 부회장, 한국 예총 전북지회 부지회장, 민전 목우회 전북 지회장, 상촌회 회장을 거쳤다. 그는 지난 1994년부터 사재를 털어 반영미술상을 제정, 후배 화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가운데 현재 군산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 최근엔 서울 평화화랑에서 ‘패션(PASSION)'을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이같은 본보 보도 후 하화백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매월 100만원씩을 한시적으로 지급받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 그의 나이 20대 초반엔 그림을 그릴 화구를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대전, 대구, 여수, 부산 등지를 돌며 극장 간판을 그렸다. 당시 쌀 한 가마에 3원, 장정 하루 품삯이 70전이었다. 그가 극장 간판을 그려주고 받은 돈은 2원. 마네킹 하나를 그려주고는 3-5원을 받았다. 한달 수입이 45원 정도, 꽤 큰 돈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번 돈은 식비를 제외하고는 미제 물감이나 붓을 구입하는데 사용했다. 캔버스는 광목천에 아교를 칠해 쓰기도 했다. 하루라도 그림을 안 그리면 못 견뎌 끼니도 잊고 수 삼일씩 그림에 매달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생계 따로 그림 따로 하다보니 어려움이 많았다.

하반영의 입에선 과거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곧잘 튀어나온다.

 

유장관은 하반영을 아버님이라 불렀다. 유탁과 하반영은 친이었기 때문이다. 하화백은 기자에게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장관이 돼 몰래 살짝 군산에 왔다 갔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려주었다. 하화백은 “유장관 아버지와 연극을 하면서 서로 친구로 잘 지냈다”면서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나 너무나도 아쉬웠는데 종종 유인촌을 만나면 그의 아버지 유탁을 만나는 것 같다”고 했다.
 유장관은 얼마 전, 모 신문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 함자는 외자로 탁(倬) 자를 쓰셨습니다. 전주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답니다. 유산을 물려받아 생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술가적 기질은 타고났는데, 그걸 직업으로 가질 수는 없었던 거죠.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시대적 배경도 그렇고. 제가 태어나자마자 솔가(率家)해서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이 무렵부터 가세(家勢)가 기울었던 건 아닌가, 그런 짐작이 들더군요”라고 했다.
 유장관에게 아버지는 예술의 다방면에 두루두루 능했던 분, 배낭 메고 훌쩍 집을 나서면 두어 달 지나서야 유랑을 마치고 현관문을 들어서던 이미지로 남아 있다.

 유장관은 아주 어려서 1년 정도 전북에 살았고 서울에서 초, 중, 고, 대학을 나왔다.
 한국전쟁 이후 하화백은 유탁의 도움으로 충무로 해군사령부 부근에 화실을 마련했다. 이 화실은 일제강점기 전주의 동광미술학원 출신들과 함께 사용했다. 고암 이응로선생과 김영창 선생이 그림을 지도하던 그 학원 말고는 조선에 미술대학이 없었다. 함흥 평양에서까지 그림을 배우러 학생들이 몰릴 정도로 최고의 권위를 누린 그 학원은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유로 강제 폐쇄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화실은 마련했지만 그림만 그려서는 생활이 안 돼 일종의 공업미술인 유리그림을 그렸죠. 혼례장롱에다 학이나 십장생 두 쌍을 그려주고 300원 정도 받았는데, 이 돈마저도 생활하랴, 화구 마련하랴 역부족이어서 미군부대 PX 근처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림 도구를 구하곤 했지요”

국내 최고령 현역작가이자 ‘동양의 피카소’로 불린 하화백이 2015년 1월 25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그에게 조화를 보냈다. 사망 며칠 전 하반영화백이 부른 사람은 이종근기자를 포함 5명 안팎이었다고 그가 별세하기 전까지 보필했던 신자영씨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오늘따라 하화백이 생각남은 왜 일까./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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