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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무주 서벽정과 송병선, 문화적 콘텐츠 사업 발굴해야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선생은 우암 송시열의 9세손으로, 일평생을 학문 연구와 강학 ·저술 활동을 통해서 세도(世道)를 지탱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거유이자 우국지사다. 아우인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1839~1912)과 함께 연재학파를 창시·공유했던 송병선은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5적의 처단을 건의하기 위해 고종을 청대(請對)한 직후에 회덕의 석촌정사(石邨精舍)에서 순도(殉道)함으로써 향년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김종수 세명대학교 강사는 ‘전북학 연구’ 제9집에 ‘연재 송병선의 자정노선(自靖路線)과 무주 서벽정(棲碧亭) 영건(營建)’이란 논문을 통해 ‘서벽정’에 서린 역사적 혼을 호출해낼 만한 문화적 콘텐츠 사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송병선은 1886년 무주 무이봉 아래에 강당형 건물인 ‘서벽정’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송병선이 택한 자정노선의 심화 국면을 상징하는 ‘서벽정’ 영건은 예기치 못한 화재로 인해 1892년에 중건을 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지만, 독서와 강학·저술 활동 및 음풍영월로 점철된 자정노선은 득의한 결실로 이어지게 된다. 그는 '서벽정'에서 ‘근사속록’에 대한 교정 작업을 진행했고, 주저인 ‘무계만집’과 ‘동감강목’을 완성함과 동시에 ‘무계시첩’을 남기기도 했다. 송병순과 공동으로 춘추 강회를 개최하고, 계 조직을 통해서 학단을 이끌기도 했다. 송병선이 ‘서벽정’에서 남긴 마지막 행적은 1903년(68세)에서 ‘송자대전·습유’를 정서(淨書)한 기록이나, 차후 송병순 주도하에 문인들에 의해 연재집의 간역(刊役)이 착수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송병선에 의한 ‘서벽정’ 경영은 70세의 나이로 1905년에 순도(殉道)를 감행하기 이전 시기에 이행한 자정노선을 상징하는 역사적·문화적 공간임을 이해하게 된다.
송병선은 ‘서벽정’을 중건한 후에 지은 기문인 ‘서벽정기’(1891)를 통해 아래처럼 진중한 결의를 재차 다져 보이기도 했음이 눈길을 끌게 한다.“아! 무명 옷에 갈포(葛布)로 만든 두건을 쓰고, 이곳에서 소요(逍遙)하노니, 무릇 세간의 영고성쇠(升沈)며 이익과 손해, 이 모든 것들이 심경(心境)에 들지 못하여, 때때로 거문고를 안고 달과 마주하여, ‘감군은(感君恩)’ 한 곡(曲)을 불러 마치노라. 저 천명(天命)을 즐기어 내 생을 마친다면, 거의 서벽정(棲碧)에서 다진 초심(初心)을 저버리지 않으리!”
1886년에 창작한 시 작품인 ‘서벽정’과 짝을 이루는 위의 기문은 송병선이 이곳에서 영위한 서벽정 경영(經營)이 득의한 결실로 이어졌음을 확인시켜준다. 그런데 서벽정은 창건한 지 불과 5년 만인 1891년 봄에 “홀연히 울수(鬱攸,화마)의 재앙을 입게” 되는 비상한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송병선은 ‘서벽정’을 다시 중건하게 된 과정과 함께, 새로 지은 건물을 이전의 그것과 비교해서 아래처럼 기록해 두었다 “(이에) 원근의 오랜 친구들이 그 (건물이) 황폐해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 재물을 출연하고 서로 도와서, 하여금 건물을 이루게 되었다. 마침내 옛터의 왼쪽 위로 10여 보쯤에, 평평한 산등성이를 베개 삼아서 얼개를 만들었으되, 이전의 제도(舊制)에 비해서 또한 확장(增)된 바가 있으니, 진실로 걸음을 옮김에 형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4칸에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집으로 이뤄진 새 건물은 “동당과 서루에, 가운데는 온돌방을 두어, 합쳐서 3 칸살(架)이고, 집 위에 또 층(層) 집을 일으킨” 옛 건물보다 확장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에 송병선은 서벽정 중건 공사에 임한 동지들의 협조에 감사를 표하는 가운데 “맑은 술과 두툼한 희생(犧牲)”을 차려서 두 번 다시 재액(灾厄)이 발생하지 않기를 신불(神佛)에게 간절하게 기원하는 의식(齋)을 거행하기도 했다
한편 송병순은 ‘연보’를 통해서 1892년(고종 29) “7월에 서벽정을 중건하고, 주자(朱)·송(宋) 두 선생의 진상(眞像) 및 유서(遺書)를 함에 보관하였다”고 기록해 두었다. 매년 한창 더운 여름에 ‘서벽정’에서 한 철을 보냈고, 원고를 가다듬는 등 집중을 요하는 일이 있을 때면 수시로 이곳을 찾곤 했다.그런가 하면 송병선은 '서벽정' 경영에 착수한 지 4년 만에 일국 경제(經濟)에의 구상을 담은 ‘무계만집’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무렵에 송병선·병순 형제에 의해 연재학파가 공유된 상태임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또한 “호남·영남의 사이”에 자리한 ‘서벽정’ 경영과 송병선 형제에 의한 강학 활동이 정기적으로 펼쳐진 결과, 장흥(44명)에 이어 무주는 전라도에서 두 번째로 많은 40여 명의 문인이 ‘계산연원록’에 등록되어 있고, 경상우도의 거창(47명)과 삼가(42명) 지역도 장흥·무주를 상회하는 연재학단(淵齋學團)을 형성하게 됐다. 그런가 하면 송병선의 ‘서벽정’ 경영에는 영호남과 충청권 지역의 문인들이 함께 어우르진 화합의 장이기도 했다는 사실도 눈길을 끈다.
송병선·병순 형제는 1865년의 만동묘 훼철령으로 인해 과거를 단념하는 결단을 내린 데 이어서, 1884년에 취해진 갑신변복령을 지켜보면서 현실에서의 정책적 기여를 행하는 관여(關與)의 방식 대신에, “경전을 안고 심산에 접어드는” 은둔 속의 자정노선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이에 송병선은 중제인 송병순이 정착한 옥천의 활산 지역과 인 접한 원계로 이주를 단행하게 됐고, 이는 차후에 ‘계산연원록’으로 상징되는 연재학파의 출현을 예고하게 된다. 이에 원계에서 본격적인 강학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송병선은 56세 때 자정노선의 심화를 위한 방편상, 무주의 심산유곡에 별서(別墅)의 성격이 강한 강당형 건물인 서벽정을 건립하게 된다. 차후 송병선은 서벽정에서 ‘무계만집’과 ‘동감강목’ 및 ‘무계시첩(60세) 등의 저술을 순차적으로 선보이는 한편, 아우인 송병순과 더불어 계 조직을 활성화한 상태에서 춘추 강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함으로써, 독서와 저술·강학 활동 및 음풍영월로 점철된 은둔 일상을 이어나가게 된다. “호남·영남의 사이”에 터한 서벽정의 지리적 여건과 영향력 있는 강학 활동으로 인하여 무주·영동(41)과 거창·삼가 지역에서 만만치 않은 문인들이 ‘계산연원록’에 수록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송병선이 타계한 이후에 유집인 ‘연재집’ 간행을 위한 역사(役事)가 ‘서벽정’에서 삼가의 창계로 옮겨진 정황도, 송병선이 ‘서벽정’에서 펼친 강학 활동과 학문적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송병선은 1905년에 고종과 청대한 직후에 강제로 낙향을 당했고, 곧이어 향년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1886년에 창건했다가 화재로 인해 1892년에 중건한 ‘서벽정’은 어언 130년이 넘는 역사를 향유하고 있지만, 이 역사적·문화적 공간에 깃든 지난날의 구도적 열정과 우국충정은 휑한 유적으로만 남아 있다. 이제 전북과 무주군은 서벽정에 서린 역사적 혼을 호출해 낼 만한 문화적 콘텐츠 사업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편 전북 기념물 '서벽정'은 송병선이 무주에 내려와 구천동 물가에 지은 정자로, 선비들과 나라 일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지금 있는 정자는 불에 타 없어져 고종 28년(1891)에 다시 지은 것으로, 한국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머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