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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전주 남천교를 지나며

<이종근의 역사 문화 이야기5 > 전주 남천교를 지나며


완산 남천교를 지나며(過完山南川橋)

삼의당 김씨 (三宜堂 金氏)

호남 제일성 풍패의 고을에
수양버들 그날 속에 무지개 다리가 걸렸네.귀하신 풍류객이 서로 다퉈 나와서
맑은 바람 낡은 달 밤에 좋이 오가던 다리.

第一湖南豐沛邑 
垂楊影裏駕虹橋 
風流貴客爭相出
最好淸風明月宵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는 조선조 여류 작가다.

'백낙서(白樂瑞)란 자는 전주의 아전이다. 운현(雲峴, 흥선대원군)이 일찍이 전주에 놀러갔을 때 매우 곤궁했는데 백낙서가 후하게 대접했다. 갑자년 이후에 총애를 믿고 흉악한 짓을 일삼아 해독이 도(道) 전체에 끼쳤다. 엄세영(嚴世永)이 전라우도 암행어사로내려가서 민승호(閔升鎬)의 뜻을 받아 그를 죽였다. 그때 전주 남천(南川)의 돌다리가 붕괴되었는데 그의 재산을 적몰(籍沒)하여 그 다리를 고치는데 충당했다'

황현의 '매천야록' 1권 갑오 이전(1864~1887)에 기록, 이 무렵에 전주 남천이 붕괴됨을 알 수 있다. 아래로 남천교 이야기가 소개된다.

'기축(고종 26, 1889)년 정월에 이르러, 통인(通引) 노릇하는영리(營吏)의 어린 아들 하나가 늙은 관노한테 버릇없다고 꾸짖고 여러 사람이 있는데도 발길로 차 넘어뜨렸다. 이에 노비와 사령들은 의논하여 늙은이가 이러한 욕을 당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하고 죽음을 결심하고 그 통인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에 모든 아전들은 크게 두려움을 느껴 감사에게 아뢰고 군기를 내어 그들을 박살하기를 청했다. 당시 이헌직(李憲稙)이 감사로 있었는데, 마음이 약해서 제지하지 못하고 또한 권한이 아전들의 수중에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든 아전들은 각기 가족을 이끌고 가서 무기고를 부수고 군기를 내어 대적하고, 반석리(盤石里)를 불 질렀다. 이 동리는 남천교(南川橋) 남쪽에 있는 마을로 5백여 호나 되며 관노와 사령들이 살고 있었다. 횃불 한 개로 재를 만들었으며, 피살자가 수십 명이나 되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억울함을호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알려졌으나 아전들이 감사 이현직을 위협하여 관노와 사령들이 난을 음모했다고 속여 조정에 보고토록 했다. 조정에서는 비록 실제 상황을 조사한 바 마땅히 아전들에게 죄가 있음을 알았으나 아전배들이 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고, 또한 서울에 있는 권문 세도가의 극성을두려워하여 간략히 서둘러 마무리 짓고 주모자 몇 명을 유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반석리(盤石里)'는 전주 완산구 북쪽에 있던 마을. 관노와 사령들이 살던 집성촌 마을이다.

속칭 한지(韓紙) 골짜기라고도 불리는 흑석골 계곡은 전주교에서 완주군 구이면을 향해 가다보면 공수내 다리가 나오는데 이 공수내 다리에서 동쪽으로 뻗은 계곡을 올라가면 흑석골이 나온다.

흑석골은 바위가 반절 흙이 반절이라고 해서 반석리(半石里)라고도 했는데,  이 바위조차 모두 검은빛을 띄고 있어 속칭 흑석골(黑石谷)이라고도 했다. 검은색을 띈 바윗덩이인 흑석(黑石)은 일명 흑연(黑鉛)의 성질을 띈 돌덩이로 한 때는 이 곳의 돌을 캐어다가 감마제(減磨劑)나 차량의 도말용(塗抹用)의 원료인 흑연, 흑석이라고 하여 인기가 높기도 했다. 이 흑석골의 계곡물은 일년내내 마르지 않아 전주 특산물인 한지 생산공장이 들어서 한지골이라고도 했다.

'남천교(南川橋)'는 전주 시내를 남쪽으로 돌아 흐르는 개천. 당시 남천교를 사이에 두고 아전 · 영리들이 살던 북쪽과 관노 · 사령들이 살던 남쪽이 구분되어 있었다.
한벽당(전북 유형문화재 제15호)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깍아 세운 누각으로 옛사람들이 한벽청연(寒碧晴烟)이라고 해서 완산8경의 하나로 꼽았다. 
슬치에서 시작된 상관계곡의 물은 의암, 공기, 은석등 크고 작은 많은 골짜기의 물이 합해지면서 만마, 죽림, 신리, 색장등 여러 동네 옆을 거쳐 흐르며 계속해 좁은목을 굽어들어 한벽당 바윗돌에 부딪쳐 흰옥처럼 물살이 부서지면서 남천으로 흘러갔다.
전주부성은 호남에서 가장 도시였으며,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며, 또한 영호남의 중요한 통로로서 교통이 번화한 곳으로 인물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그래서 전주천에는 예로부터 전주 인근지역으로 왕래하기 위해 남천교, 싸전다리(현 전주교) 서천교, 그리고 완산교 등의 의 다리가 만들어졌다.
전주에서 임실 남원 순창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천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오래 전부터 다리가 놓여졌다. 남천교는 현 전주교 상류 170미터 지점 강암서예관을 못미친 자리에 위치했다고 한다. 이 다리는 1753년 유실되었다가 정조대인 1790년 김응록, 박사덕 등이 복구사업을 시작 1만 4,000냥의 돈을 모아 1791년 8월 공사를 시작해 12월 완공했다. 이때 다시 만든 다리 모양을 보고 안경다리(眼鏡橋), 오룡교(五龍橋)라고도 불렀다. 다섯 개의 창을 가진 무지개 모양의 다리였다. 각 창 머리에는 용머리를 새겨 놓은 바, 승암산이 화기(火氣)을 머금은 형세여서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다시 무너 진 1901년 관찰사 조한국이 개축했지만 1907년 수해를 입어 부서지자 같은 해 백남선의 후원으로 재수축하였으나 3년후 홍수로 유실돼 현존하지 않는다.
바로 옆 남천교 개건비는 1791년 만들어진 남천교의 개건 경위를 기록한 비석으로 1794년에 세워졌다가, 1862에 다시 선보였다. 
원래는 현재의 전주교와 남천교 중간에 위치에 있었으나, 전주교대 교정에 위치한 후 새로 만들어진 후 최근에 지금의 남천교 옆으로 이전했다. 앞쪽에는 개수 내력과 공사에 힘쓴 자들의 명단이 기록됐고, 2면의 측면에는 건립 연대(동치 원년 임술; 1862)가 적혀 있고 후면에는 돈을 낸 지방 군현별 액수의 명단과 건륭(乾隆;청 고종) 58년(1794)의 명기가 새겨져 있다.
남천교 누각 ‘청연루’의 야간 경관조명이 아름다워진 모습으로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의 관문으로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남천교가 홍예(아치) 다리 위에 누각이 지어진 형태로 새로 만들어졌다.
2009년 12월 23일 전주시는 모두 125억원의 예산을 들여 2008년 1월 착공한 남천교를  2009년 12월 28일 완공했다. 
남천교는 길이 82.5m, 너비 25m 크기로 홍예 형식 위에 한옥 누각이 지어진 전통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남천교 위의 누각은 길이 27.5m, 폭 4.8m, 높이 6.5m 규모에 팔작지붕 형식이며, 기둥과 들보, 서까래 등을 모두 국내산 육송으로 만들었다. 남천교처럼 다리 위에 건물이 지어진 다리는 매우 드물며 신라 경주의 월정교, 브리튼 런던의 타워브리지,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다리, 베네치아의 일부 다리가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후 남천교는 6·25전쟁 이후인 1957년 12월 전주천 상류에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졌으나, 1996년 정밀안전진단 결과 안전에 우려가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전주시는 다리의 안전과 최근 교동 한옥마을 일대 관광객 방문이 늘어나는 점을 고려해 옛 콘크리트 다리를 철거하고 전통적 형식으로 새 남천교를 지었다. 이에 앞서 지난 11월16일에는 누각의 상량식을 열었다.
교동 한옥마을과 서학동을 이어주는 남천교 위에 세워진 청연루는 무엇보다도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청연루의 야경은 전동성당 야간 경관과 함께 또 다른 명소가 되고 있다. 답사 안내시 바로 이곳에서 풍욕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는 까닭이다. 더욱이 전주천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무더위로 지친 몸을 이끌고 나온 오늘에서는.
뭇별이 임금별을 싸고 돈다. 이런 상징성을 살려 임금은 북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남쪽에서 바라보는 신하를 마주한다. 나는 임금이 아니므로 남쪽이 있을 자리다.
김상용이 1934년 '문학'지 제2호에 발표한 '남쪽으로 창을 내겠소'란 시가 생각난다.
이는 소박한 전원 생활을 제재로 노래한 작품으로 자연 친화적인 삶의 자세가 드러난 전원시이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흙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남(南)'이 주는 밝고 건강한 이미지와 함께 시적 화자의 삶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원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삶의 태도, 훈훈한 인정, 달관의 모습을 넉넉하게 보여 주고 있다. 
작중 화자는 평화로운 전원적 삶에의 소망을 말한다. 해가 잘 드는 남쪽으로 창문을 내고 흙과 더불어 사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구름, 즉 헛된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 따위가 유혹한다(꼬인다) 해도 그는 가지 않으려 한다. 다만 너그럽게 자연을 즐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왜 사느냐고 묻지 말라. 이 평화로운 삶의 기쁨, 그것이 곧 삶의 여유가 아니겠는가? 해가 지고 달이 뜰 때 전주 한옥마을에서 소살소살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