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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스미의 미술산책

[새전북신문 연재물] <김스미의 미술산책> 19. 앙리 마티스 ‘춤Ⅱ’

보이는 것이 다다. 단순함은 인간의 궁극적 삶의 로망이다. 삶이 무슨 불가사의하고 몽환적인 상황인 듯 큰 꿈을 꾼들, 허망한 판타지로 끝나는 시트콤이 대부분이다. 간결함의 의미는 깊지만, 그리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씩 비우면서 살라 한다. 뭘 비우는 건지 어떻게 비우는 건지 뜬구름 잡기는 마찬가지다.
서양화는 색으로 말한다. 농밀하고 원시적인 색감으로 20세기 초 화단을 평정한 프랑스 대표 화가 앙리 마티스(1869-1954)다. 행복과 순수, 기쁨과 환희, 말만 들어도 편안해지는 단어들이 확 떠오른다. 단순한 구도도 혁명적이다. 동시대 평론가들은 색채와 터치가 격렬하다고 야수파라 비난했다. 그는 야수파를 창시한 전설이다.
본 것을 그린다는 대상 재현 프레임을 벗어나 순수한 감정의 표출이다. 모든 예술가가 지금 하는 고민이다. 심플하게 흐르는 인체의 선, 자연풍광과 사물들은 그를 만나면 간단히 명료화된다. ‘식물은 초록이다’라는 관념을 허물고 자연의 색채마저 해방시켰다. 마티스는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안락함을 주고 싶었다. 순색을 활용하여 감각적인 삶의 순결한 속마음을 그렸다. 초대받은 관객은 작품 속 주연과 동일시되어 춤추고, 노래하고, 잠잔다. 극도의 한정된 색채의 침묵이 관객을 평안으로 이끈다. 가벼움을 지나 확실한 만족감을 선물한다.
‘춤Ⅱ’은 모스크바 수집가 세르게이 슈추킨의 주문작품으로 춤Ⅰ의 후속이다.
춤추는 사람의 기쁨과 에너지를 표현한 대작이다. 인체를 조악하게 드로잉하고 투시법도 원근법도 생략했다. 남프랑스의 푸른 하늘과 싱그러운 소나무, 분홍빛 몸이라 설명하지만, 파란색 평면을 하늘이라 생각한다면 인식의 한계다. 힘차게 춤추는 동작은 본능과 자연의 리드미컬한 언어다. 앞으로 고꾸라지고, 뛰어오르고, 발을 내밀고, 넘어지는 무희는 손을 잡으려고 온 힘을 다한다. 손을 놓치면 대열은 깨지고 균형은 해체된다. 지구는 둥글고 사회에서 격리된 인간은 위기라는 메시지다. 그러나 마티스의 춤은 경쾌한 몸동작일 뿐이다. 필사적으로 추는 즐거운 비명이다. 어릴 적 강강술래 놀이처럼.... 이 대형 그림의 색은 딱 4가지다. 동양적 선이 업그레이드 된 굵은 윤곽선의 무희는 시원하고 산뜻하다.
욕망이 배제된 즐거움은 순수를 독립시키고 보편성을 얻었다. 그림을 이해하려고 노심초사할 거 없다. 면밀한 전문지식도 가동할 필요 없다. 느낌 그대로 보면 된다. 작가의 의도다. 군더더기 없는 삶이 얼마나 풍성한지 그는 잘 알고 있다. 휘황찬란한 가구와 꽃밭, 완벽한 과일, 할 일 없이 노는 여인들, 작품의 주연도 그 순간을 즐긴다. 비용 같은 것은 생각 안 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사치다. 재벌 나오는 호화로운 드라마가 시청률이 높다. 현실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삶의 즐거움보다 이데올로기적 가치가 우위라고 말할 수 없다. 마티스의 회화와 디자인은 색이 형태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드러나게 하는 직관의 색이다. 색을 쓰는 세계의 독보적 존재인 이유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혀에 생생하고 향기마저 감미로운 행복의 맛이다. 신기루 같은 행복은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사용자다. 휴일 아침, 느지막에 일어나 라면 한 봉지 사 들고 터벅터벅 걷는데, 얼굴에 스치는 한 줄기 바람, 연둣빛 햇살, 충만한 무언가가 밀려온다. 마티스 그림을 본 듯.... 단순하고 소소한 순간이 켜켜이 쌓이면 살만한 인생이다. / 화가 김스미

 

 

'Dance Ⅱ', 1909-1910, 캔버스에 유채, 260×391cm, 에르미타주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