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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스미의 미술산책

[새전북신문 연재물] 김스미의 미술산책 <16〉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새전북신문 연재물] 김스미의 미술산책 <16〉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고독은 인간의 숙명이다. 외로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처절하게 고독해야만 탄생하는 아웃풋이 많다. 예술작품도 치열한 고독의 산물이다. 훌륭한 작가는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온 창문을 그리면서 칠흑 같은 어둠의 방에서 일어나는 슬픈 운명을 예감하게 한다.
행복한 순간에 흐르는 판타지의 유포리아도 정확하게 가슴으로 전달한다.

정작 작가는 평범한 단상을 그렸다 했다. 그림을 보는 이는 작품 속에서 소외된 도시의 외로운 소시민인 자기를 발견한다. 화가의 무의식적 감각의 흐름이 관객의 의식에 감정이입된 것이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는 20세기 미국 구상미술의 대가다.

그의 작품을 보면 어떤 순간이 멈춰진 듯 정적이 흐른다. ‘일요일 이른 아침’은 마치 유령이 된 도시처럼 극도의 적막감이 짙게 드리운다. 쇼윈도 간판 글씨조차 흐릿하게 뭉개 버렸다. 까맣게 필름이 끊긴 스크린처럼 깊은 침묵이다. 다양한 이민자의 풍요를 제공한 나라의 화가 그림이 왜 이토록 쓸쓸할까?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풍경은 어젯밤 우리 모습이다. 텅 빈 거리 심야 레스토랑 불빛에 노출된 네 사람의 삭막하고 으스스한 공간이다. 출입구도 없는 테이블에 움츠린 남자의 등에 밤의 고독이 흐른다. 남자와 여자는 부부 같아 보이나 각자의 생각에 잠겨 무표정이다. 붉은 원피스도 따뜻함은 없다. 불안정한 삼각 스탠드바에 갇힌 셰프의 시선도 창 너머다.

눈을 마주치는 이가 없다. 연극무대 세트장 같은 가공된 허무가 흐르는 스페이스다. 어딘가에 카페를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있다. 몬드리안의 꿈과 희망이 넘치는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와는 확연히 다른 뉴욕이다.

네덜란드 이민자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호퍼다. 12살 때 키가 194센티여서 친구들이 메뚜기라 불렀고 자연스럽게 외톨이로 성장했다. 작품 배경인 쓸쓸한 고독의 숨은 동기를 찾아내기엔 부족한 설명이다. 이 그림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끔찍한 전쟁에 대한 멘붕의 표현이라는 후문이다.

도시의 소외라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을 품은 작가와 관객의 한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방황이란 단어는 청춘의 전유물인 줄 알았다.

 

까닭 없이 슬프고 환장할 것 같은 불안으로 헤매는 것이 한 때의 객기 때문이라 착각했다.

전주 중앙동 큰길 2층에 비포장이라는 술집이 있다. 호퍼의 화면과 비슷한 공간이다. 비 오는 날이면 새우깡에 맥주 한잔 놓고 심금을 울리는 음악을 들었다.

개성 강한 주인은 관객의 행동엔 관심이 없다. 오래전 이야기다. 이제는 시끌벅적한 주막으로 옮겨 갔지만, 등 뒤에 걸린 고독의 존재는 현재진행형이다. 호퍼의 뉴욕이나 전주 사람이나 고독의 밥상은 모양이 같다.

그의 ‘나이트호크스’ 주연배우는 평범한 심연들의 행로다. 미국인들이 호퍼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리라. 그의 그림을 모사한 포스터를 벽에 붙이고 보고 또 보며 자신의 외로움을 작품 속 카페로 이동시켜 스스로 위로한다.

 

당신의 방안에는 어떤 그림이 있나요? 그림이 그대의 속마음을 보듬어 주나요? 천국으로 가기 위해 단테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어두운 숲에 들어간 것처럼 고독은 인간에게 필연이다. 고독이란 외로운 띠를 둘러매고 자기의 내면을 자주 들여다보는 인생은 깊이가 다르다. 삶의 고통을 견디고 버틴 사람의 고독은 향기가 진동하여 깊은 멋이 흘러넘친다./화가 김스미

△`Nighthawks',1942, 캔버스에 유채, 84.1×152.4cm, 시카고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