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천김공순의비(平川金公殉義碑)
대방(帶方 지금의 남원(南原)의 호산(湖山)은 절사(節士) 고(故) 평천(平川) 김공(金公)께서 순의(殉義)하신 땅이다. 17년이 지난 뒤에 문인과 친구들이 장차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려 하면서, 공의 장손인 효술(孝述)로 하여금 내게 비문(碑文)을 요청하게 했다. 내가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마침내 행장을 살펴보니, 이르기를 "공은 휘 상각(相玉)이니, 경주(慶州) 사람으로 고려 두문동(杜門洞)수은(樹隱)선생의 후손이다. 사람됨이 강개하고 걸출하여 가슴속에 충의(忠)가 가득하고, 시에 뛰어나 교유한 사람들이 모두 당세에 저명한 인사였다. 갑오년(1894, 고종31) 이후로는 재주를 감춘 채 숨어살면서 교유를 끊고, 매일〈이소경(離騷經)〉·〈애강남(哀江南)>.〈출사표(出師表)>를 읽으면서 오열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무오년(1918) 섣달에 고종황제의 부음(音)이 이르자 곧장 고을의 인사들과 집 뒤에 있는 산에 올라 망곡(望哭)하고, 이어서 각처에 있는 선대의 묘를 둘러보고 친척과 친구들을 일일이 방문하고는 돌아와서 유서를 썼으니, 대략에 이르기를 '아! 경술년(1910, 융희4)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내가 죽지 못했던 까닭은 우리 황제께서 살아계셨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대한(大韓)에 복을 내리지 않아 갑자기 황제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당하였으니 어찌 다시 살기를 바라겠는가. 성조(朝)에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서 어찌 차마 오랑캐의 세상에서 다시 구차하게 살겠는가.' 하였다. 또 절명시(絶命詩)를 짓고 백건(白巾)과 새 옷을 차려입고 북쪽을 바라보며 절하고 곡한 뒤에 독을마시고 돌아가시니 실로 기미년(1919) 1월 4일이었다."라고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선비나 백성은 임금에 대해서 비록 지킬 관직이나간할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의리'는 피할 데가없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왕기 (汪)의 죽음에 상례(禮)를 적용하지않으신 것이다'. 나라가 멸망하고 임금이 죽자 남은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 공의 죽음은 임금을 저버리지 않고 선조를 욕보이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고, 백이(伯夷)의 풍도를 들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 이 산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가리키면서그날의 일을 이야기하고 한숨을 쉬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공이 남긴 행적을 드러내 비를 세우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더욱더 공경하고 우러러보게 하여 백대의 먼 훗날에도 혹 망실됨이없을 것이니, 비석을 세우는 일을 또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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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杜門洞):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골짜기이다. 고려의 충신 72인이 조선왕조 섬기기를 거부하고 이곳에 들어와 세상과 격리되어 살면서 절의를 지켰다고 전해진다.
*애강남(江南):북주(北周)시대의 문인 유신(信)이 지은 <애강남부(江南賦)>를 말한다. 유신은 박학하고 문장이 화려하여 당시에 명성이 높았는데, 뒤에 난리를 만나 유랑하면서 어지러운 시국을 슬피 여겨 <애강남부>를 지었다.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의리: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아가기 때문에 부모와 스승과 임금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는 의리를 가리키는데,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와 통한다. 진(晉)나라의 대부 난공자(子)가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게 되었으니, 이분들을 섬기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 아버지는 나를 낳아 주시고 스승은 나를 가르쳐 주시고 임금은 나를 먹여 주신다."라고 한 말에서 왔다. 《國語 晉語》《小學集註 明倫》
平川 金公 殉義 碑
維 帶 方 之 湖 山 故 節 士 平 川金 公 殉 義 地 也 後 十 七 年 門人 知 舊
將 伐 石 以 識 之 使 其 冡 孫 孝 述 徵 文 於 余 辭 不 獲 逐 按 状曰 公 諱
相 珏 慶 川 人 高 麗 杜 門 洞 樹 隱 先 生 後 也 為人 慷 慨 峻 挺 忠 義 滿
腔 工 於 詩 所 與 遊 皆 當 世 知名 士 自 甲午 後 韜 晦 息 交 每 讀 離 騷
經 哀 江南 出 師 表 嗚 咽 不 自 勝 及 戊午 臘 月 先帝 諱 音 至 即 與
鄉 人士 望 哭 家 後 山 因 省 各處 先 墓 歷 訪 親 戚 知 舊 歸 艸 遺 書 略
日 嗚 呼 庚戌 之 變 尚 忍 言 哉 吾 所以 不死 以 吾 皇 在 天 不 祚 韓
奄 遭 弓 劍 痛 夫 復 何 望 生 無 涓 埃 答 聖 朝 忍 復 苟 活 夷 狄 世 又
作 絕 命 詩 白巾 衣 北 望 拜 哭 仰 藥 而 充 實 己 未 正 月 四 日 也 竊
惟 士民 於 國 君 離 曰 無 官 守 言 責 而 生 三 事 一 義 無 所 逃 故 聖 人
勿 殤 汪 琦 之 死 矣 團 滅 君.宛力 無可 圖 公 之一 宛 可 謂 不負 君 不
辱 先 而 聞 伯 夷 風 者 歟 自 後人 之 過 是 山 者 指 點 語 當日 事 為 之
歔 欷 不 能 去 然 則 今 日 所 以 表 揭 遺 跡 者 可使 人人 一倍 聳 瞻 雏
百世 之 遠 無 或 忘失 矣 碑 之 役 又 烏 可 已 乎
*43 성인께서…………것이다 :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동자(童子)인왕기(汪)가 제(齊)나라와 싸우다가 죽었는데, 사람들이 공자에게 "그에게 상례(禮)를 적용하지않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묻자 "미성년자이지만 국가를 위하여 죽었으니 상례를적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답하였다. 《禮記 檀弓下》상례(禮)는 미성년자의죽음에 대한 상례(喪禮)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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