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은 전북 북서부에 위치하는 호남의 최북단 도시다. 익산시의 시가지 일대는 행정통합 이전의 명칭인 ‘이리’로 불린다. 본래 지명이 ‘솜리’, ‘솝리’였는데, 한자로 옮겨 쓰면서 이리(裡里)가 됐다. 만경평야에서 구릉이 져 멀리서 보면 속(솝)으로 들어간 마을이라는 뜻이다. 익산(益山)은 ‘산이 더해지다’란 뜻이지만 실제로는 왕궁터가 있는 미륵산이 가장 높고, 대부분 평지에 가까운 산들이 조끔씩 산재해있을 뿐이다. 익산시 낭산면은 해발고도 162m의 낭산산이 있을 뿐 온통 구릉과 평야로 펼쳐진 지형이어서 곡식과 과수재배가 주를 이룬다.
만경강과 금강 사이에 위치한 이리(里)는 과거 전라북도 북서부의 행정구역이자 현 익산시의 중심 시가지로, 현재는 지명으로 과거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1912년 호남선철도가 개통되며 이리역이 설립되었을 때, 이리는 전북 교통의 요충지이자 발전된 도시로 그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근대 식민지의 쓰라린 기억이 서린 장소이기도 하다. ‘호남보고 이리안내(지은이 야마시타 에이지, 역주 해설 양은용)’는 과거의 이리와 현재의 익산을 톺아보기 위한 귀한 자료다. 근대문화유산 연구 및 보호가 주목받는 지금, 당대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그 첫 발자국이 되어야 한다. 1915년에 펴낸 ‘호남보고 이리안내’는 지배와 수탈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의병투쟁과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자엔 ‘이리팔경(裡里八景)’이 소개된다. ‘요교(腰橋)의 낙안(落雁)’은 요교의 기러기. ‘배산(盃山)의 모설(暮雪)’은 배산의 겨울 꽃, ‘남당(南堂)의 야우(夜雨)’는 남당의 다섯 소나무, ‘수월(水月)의 추월(秋月)’은 수월의 가을 달, ‘만경강의 융희교(隆熙橋)’는 1908년 만경강의 목천포에 세워진 다리, ‘만경강의 주선(舟帆)’은 만경강의 돗대, ‘사강(事崗)의 청람(晴嵐)’은 사강의 고운 언덕, ‘이리의 효종(曉鐘)’은 이리의 종소리 등이다. '이리팔경에 부쳐(寄裡里八景)'는 고아쿠산인이 쓴 시다. 이리엔 3개의 못이 있었다고 한다. ‘고현리(古縣里, 현 모현동) 저수지’는 옛날 옥야현청(沃野縣廳, 社倉) 소재지인 유적으로, 제방 위에 노송이 흡사 승천하는 반룡(龍) 같았으며, ‘제내리(堤內里) 저수지’는 물이 연못에 다득 차 넘실거리는 상태이다. ‘월담(月潭)’은 달 밝은 밤은 절경으로 낚시꾼 혹은 달 구경 하는 손님이 많았다. 이리엔 ‘세 가지 기이한 것(三奇)도 잇었다. ‘부석(浮石)’은 금마면 서북쪽 1리 쯤에 형태가 마치 걸상과 같은 4~5평 정도의 큰 돌이 암반 위에 있다. ‘아생송(芽生松)’은 금마 일부의 땅에 사는 소나무는 다른 많은 잡목들처럼 한 차례 벌채해도 다시 새싹을 내는 기이함으로, 이리의 기이한 것의 하나이다. ‘삼도율(三度栗)’은 팔봉면 팔봉산에 사는 밤나무는 한 해에 세 번 꽃이 피고 결실을 맺는 진귀한 나무로, 이리의 기이한 것의 하나이다. 앞서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은 소세양이 중국 문인들에게 조선의 삼기(三奇), 즉 세 가지 기이한 물건이 있다고 자했다. 조선의 삼기는 베어 내도 베어 내도 움이 돋는 ‘움송’이란 소나무가 그 첫째이고, 둘째는 1년에 세 번씩이나 꽃이 피어 세 번이나 열매를 맺는 ‘삼율(三栗)’이라는 밤나무이고, 셋째는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 ‘빙교(氷橋)’라는 다리이다. 그러나 조선의 삼기는 소세양이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익산은 호남의 관문이다. 익산에 위치한 황등호수 이남을 호남이라 불러 왔다. 이 호수가 일제강점기(1933~1935)에 폐제개답(閉堤開畓)되는 변화를 거쳤다. 완주와 전주에서 시작되어 익산과 김제를 관통하며 군산 앞바다로 흘러가는 만경강이 매년 홍수로 범람하자 국가사업으로 직강 호안(直江護岸)공사(1925~1937)를 전개한 역시 일제강점기로, 호남평야의 도작문화(稻作文化)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익산시는 국가적으로 고도(古都)로 지정(2004)되고, 그 백제역사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15)됐다. 이런 시의 행정구역이 현재와 같이 획정된 것은 1914년이다. 군제(郡)의 폐합에 의해 종래의 익산·용안·함열·여산 4개 군이 익산군하나로 통합 개편된 것이다. 당시는 익산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던 시기였다. 1912년 호남선(湖南) 철도가 놓이며 이리역이 개설되고, 이라군산 간의 철로도 개통됐다. 이를 전후하여 1911년 금마에 소재하던 익산군청을 현재의 중앙동인 이리로 이전하고, 1914년에는 이전주 간의경편철도(輕便鐵道)까지 운행하게 됐다. 그야말로 한촌이었던 익산이 교통 요충지로거듭나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농장·공장·학교 등이 속속 들어서며, 도시화·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된 것이다. 익산의 번창을 기원한다.
'전북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남과 전라도 (0) | 2023.03.06 |
---|---|
평천김공순의비(平川金公殉義碑) (0) | 2023.02.28 |
솜리와 이리 (0) | 2023.02.21 |
[온누리] 태극 문양 (2) | 2023.02.20 |
육모정 (0) | 2023.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