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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스미의 미술산책

<새전북신문 연재물> [김스미의 미술산책] 〈8〉 이응노의 ‘3.1 운동’



스케치하듯 빠른 필선으로 그려 생동감이 화면 가득
시대 정신과 삶의 방향까지 제시할 수 있으면 명작



동양과 서양의 미의식은 표현 방법부터 다르다. 역사와 문화가 다르고 산천의 모양새가 다르니 그 차이는 당연하다. 이 땅의 여성을 그리면서 아그리파의 표현기법을 따르니 그림 속 여인은 국적 불명 눈동자의 여성이 되는 것이다. 한국화의 침체는 서양 우위 사대주의 교육 풍조의 암묵적 폐해다.
“우리가 쓰는 말과 문자, 흰옷을 입는 기상 등 고상하고 착한 우리 민족성을 그리고 싶다.” 했다. 지극히 한국적인 그림으로 승부를 걸고 동양과 서양. 현대예술을 묶어 연구한 민족예술의 선구자, 현대 문자 추상의 대가 고암 이응노(1904-1989)다.
19살에 고향 홍성을 떠나 서울로 간 이응노는 스승 해강 김규진 선생을 만나 한국화를 완성 시켰다. 이는 끊임없는 예술 탐구의 시작이었다. 일본에 유학 가기 전 전주 중앙동에서 ‘개척사’라는 간판점을 운영했던 이응노의 이야기는 당시 함께 했던 하반영 화백의 에스키스가 남아있다.
그는 1967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조작되어 옥고를 치른다. 옥살이 중에도 도시락통, 밥, 간장, 고추장 등 모든 재료를 사용해 만든 300여 점의 작품을 가지고 나온다. 그에게 그림은 삶이자, 영혼의 자유 그 자체였으니 그의 예술 언어는 그 어떤 구속의 이유를 달지 못했다.
1977년 북한 관련 사건으로 한국귀국이 금지되고 낙인찍혀 미술계에 그의 그림이 사라진다. 이것이 이응노가 한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다. 한국 현대미술계의 엄청난 실조다. 이데올로기의 그물에 걸려 그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12년이 흐르지만, 그의 뿌리는 한국이기에 그의 작품의 근원은 한국인의 이념이자 정신세계다.
지면의 ‘3.1 운동’은 1945년 전통 서화 정신을 되찾고자 했던 시기 작품이다. ‘군상’은 해방기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도상이다. 그도 관념에서 벗어나 삶의 풍경을 진솔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들불처럼 번진 독립투쟁 정신을 이응노는 스케치 하듯 빠른 필선으로 그려 생동감이 가득하다. 국권이 없는 상황에서 주체는 없다. 작은 그림이지만 수많은 유관순 누나와 형들의 함성이 화면 가득 울려 퍼진다. 쪽빛 치마, 하얀 저고리, 백의민족의 분노 곡괭이가 총칼로 무장한 서슬 퍼런 군인도 두렵지 않다. 붉은 황토 빛깔 대지는 이 땅의 상징이다. 민중의 목소리는 정의를 대변한다. 민족의 한 맺힌 절규가 튀어나올 듯 생생하다.
우리 중에 과연 미래에도 확실하게 남을 만한 화가가 있을까?
한국 서화에서 수묵 추상으로 세계적인 민족예술의 완성인 문자 추상까지 수없는 노력과 변신을 통해 시대와 현실을 담은 이응노의 예술적 주장은 늘 깨어있었다. 대전에 있는 이응노 미술관에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심정적으로 길고도 멀었다. 미술관을 나서면서도 가슴 답답한 목마름은 풀리지 않았다. ‘군상’을 통해 민초의 심정을 대변하는 그의 그림이 나를 짓누르는 모양이다.
한지의 여백에 다양한 인간의 움직임이 주는 확고한 언어는 이응노를 만나 민중이라는 강렬한 힘으로 부활했다. 예술에서 우연이란 건 없다. 그림 안에서 하나하나 존재의 구성은 오차 없이 계산된 사이언스다. 데생의 실수로 보이는 어떤 것들은 어쩌면 중요한 것을 부각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예술작품의 완벽한 디테일에 감동하는 이유다. 추상 작품은 더욱 철저히 구조화된 인간의 언어로서 기호다. 거기에 시대 정신과 삶의 방향까지 제시할 수 있으면 명작 탄생이다./화가 김스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