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철의 귀래정
풍속화에 담긴 조선 사회사람들은 기록에 익숙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엇이든 기록으로 남기는 시대입니다. 사진이라는 수단이 생기면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훗날 이런 기록들은 역사의 산물로 그것을 기록했던 시대를 회상하는 매개로 사용될 것입니다. 우리가 조선시대를 담았던 풍속화를 통해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터입니다. 일상을 담았습니다. 그 일상 속에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감정과 의지가 담겼습니다.
관인과 사인 풍속화를 통해 이제 까지 쉽게 접해 보지 못했던 임금을 비롯한 조선사회 관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기록한 관인 풍속화 , 선비와 양반사회의 운치 있는 삶과 오늘 날 까지도 전해지는 우리사회의 생활 풍속의 유래를 담은 사인 풍속화 , 그리고 조선 후기에 들어 풍속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해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서민들의 등장으로 조선 풍속화의 전형을 이룬 ‘서민 풍속화’까지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사회의 다양한 삶을 들여다보면 흥미를 더합니다.
조선시대 풍속화라고하면 김홍도와 신윤복 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옛사람들은 언제부터 기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요?
현재 남아있는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기녀 그림(기녀가 등장하는 그림)은 조선시대 연산군때인 1499년작 ‘십로계축도(十老契軸圖)’이라고 합니다.
고령(高靈) 신씨(申氏) 종중(宗中)에서 전주박물관에 기탁한 ‘십로계첩(十老契帖)’(전북유형문화재 제142호)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기녀 그림은 16세기 궁정연희 그림이었습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시중드는 여성이 궁정 기녀였습니다. 이후 기녀는 18세기 들어 풍속화의 소재로 많이 나타났습니다. 기녀를 즐겨 그린 화가는 신윤복이었습니다.
이 ‘십로계축도’는 노인 10명이 계모임을 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계회도(契會圖). 고령 신씨 문중에 전해오는 그림으로, 크기는 38×208㎝. 그림에는 별도로 38×100㎝ 크기의 서문이 붙어있습니다.
그림에는 노인 10명과 술 시중 드는 여인 6명이 등장하는데 이들 여성이 바로 기녀라는 것이다. 1499년작이라는 사실은 서문에 나옵니다.
그림 속의 계모임을 주재한 사람은 신숙주(1417~1475)의 동생인 문인관료 신말주(申末舟·1429∼1504).
그는 은퇴 이후 전북 순창 남산에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자연과 시를 벗삼아 살았습니다.
'벼슬 버리고 돌아온 것은 무슨 일인가/정자는 중앙에 자리 잡고 샘과 돌은 절경이기 때문이네/강물은 달리고 들은 멀리 퍼져 있으며/산은 작은 정자를 안고 높았네/대숲이 있으니 뜰이 고루 고요하고/어여쁜 꽃은 자리를 다시 아름답게 꾸몄네/마음은 애오라지 스스로를 즐김에 맡겼으니/이미 세상과는 서로 어긋나네! (강희맹의 '귀래정' 중에서)'
신말주는 역사 속에서 지조 높은 선비이자 은사(恩師)의 모습으로 부각됩니다. 26세 때 문과에 급제했고, 1456년(세조2년)에 수양대군이 조카였던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불만을 품고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두 임금을 섬김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면서 은거생활을 했습니다. 1476년, 47세때 전주 부윤으로 일정 기간 관직에 몸담았으나, 말년에는 다시 은거를 하였으니, 대부분의 생애를 관직과 상관없는 처사(處士)로 보냈습니다. 그의 10대손인 신경준(1712~1781)은 귀래정유허비를 통해 은둔의 삶을 살았던 신말주의 삶을 전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이런 문화적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1499년에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와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의 고사(故事)를 따라 근방의 9명의 노인들과 함께 모임을 가졌습니다.
향산구로회는 당대(唐代) 백거이(白居易)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향산(香山)으로 귀거래하여 친분이 있는 노인들과 결성한 기로회(耆老會)입니다.
당시 연호(845년)인 회창(會昌)을 따서 “회창구로(會昌九老)”나, 장소에 따라 “향산구로(香山九老)”, “낙중구로(洛中九老)”라고 불렀으며 단순히 “구로(九老)”라고도 했습니다. 이 모임은 사회적 지위와 성공에서 벗어나 순수한 친교를 목적으로 한 최초의 기로회로, 이후 모든 기로회와 많은 모임들의 전범(典範)이 되었습니다.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는 송대(宋代) 문언박(文彦博)이 백거이의 향산구로회를 모방하여 당시 늙고 명망 있는 사대부 11명과 함께 술을 즐기고 나이를 숭상하기 위해 결성한 기영회(耆英會)이다.
이 두 모임을 모범으로 삼아 만든 것이 바로 신말주의 노인들의 모임입니다.
‘십로계축도'는 신말주가 70세가 넘은 나이에 가까운 벗들과의 만남을 기록한 그림입니다.
그는 1499년, 이윤철(李允哲), 안정(安正) 등 가까운 벗들과 계(契)를 맺고 ‘십로계(十老契)’라 이름하고, 10개의 첩(帖)을 만들어 각각 1개씩 나누어 가졌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로계첩’입니다. 10명은 생년월일 순으로 서열을 메기고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주관했습니다.
모임을 여는 순서가 한 바퀴 돌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계첩에는 10명의 인물을 각각 채색을 곁들이지 않고 선묘(線描)만으로 묘사하여 그린 후, 각 개인의 생활과 인격, 사상 등을 함께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는 불명확합니다.
신말주의 후손인 문인관료 신경준(申景濬·1712∼1781)은 자신의 문집 ‘여암집(旅菴集)’에 ‘서문과 그림 모두 신말주 작’이라고 기록했지만 이원복은 “서문은 신말주가 쓴 것이 맞지만 신말주가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오히려 시서화에 능했던 신말주의 부인인 설씨(1428∼1508)의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습니다.
신말주가 신윤복 11대조뻘 된다는 점도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신윤복의 그림세계에 가문의 피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1790년 조선 최고화가 단원 김홍도가 이 그림 ‘십로계축도’를 본떠 ‘십로도상첩(十老圖像帖,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을 그려냈습니다. 계모임 참가자인 장조평 모습을 그린 김홍도 그림은 ‘십로계축도’의 해당 부분과 거의 똑같습니다.
정부가 639조 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발표했습니다. 재정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지출의 효율성을 대폭 높일 계획입니다. 일자리 정책에서 정부가 가장 먼저 줄이는 건 공공형 노인 일자리입니다. 올해 노인 일자리 84만 5,000개 가운데 공공일자리는 60만 8,000개입니다. 사실상 노인 일자리의 대부분은 공공형 일자리인 겁니다.
이들 일자리는 금연구역 지킴이, 환경정비, 교통안전 보조 등 공익활동을 주로 합니다. 한 달 평균 30시간 정도 일하고 받는 임금은 27만 원 정도입니다.
정부는 내년에 이런 공공형 노인 일자리 수를 54만 7,000개로 줄이기로 했습니다. 대략 6만 개 정도의 일자리를 줄이는 셈입니다. 공공형 일자리가 단순 업무의 ‘질 낮은 일자리’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생산성이 높은 민간·사회서비스형 노인 일자리를 3만 8,000개 늘리기로 했습니다. 노인이 시장에 참여해 상품을 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공공형은 점차적으로 줄이고, 이같은 민간형을 늘려 양질의 일자리를 확충한다는 게 현 정부의 판단입니다.
더위에 지치고 세상에 치였을 때 귀래정 기둥에 기대앉아 내면의 소리를종종 들어보곤 합니다. 560여 년 전 묵객들이 주고받는 시문과 솔바람 노니는 소리에, 그만 사르르 선잠이 들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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