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객사 '벽성관(碧城館)'의 실체 처음 확인
김제 객사 '벽성관(碧城館)'의 실체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김제조씨 시조 벽성군(碧城君) 조연벽(趙連壁)을 모신 조경재는 1918년 김제 객사 벽성관이 훼철되었을 때 일부를 구입, 1925년에 지금의 장소에 복원, 현재까지 100년 동안 원형 그대로 보존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전주 객사는 풍패지관(豊沛之館, 보물), 김제 객사는 벽성관(碧城館), 부안 객사는 부풍관(扶風館), 고창 무장면 객사는 송사지관(松沙之館, 전북 유형문화재),
고창 흥덕면 흥덕객사는 흥성동헌(興城東軒, 전북 유형문화재), 순창 객사는 옥천지관(玉川之館, 전북 유형문화재)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김제 객사와 부안 객사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김제시가 5일 향토문화유산 보호 조례 제10조 및 같은 법 시행규칙 제3조 규정에 따라 김제시 향토문화유산 심의위원회를 개최해 '조경재(肇慶齋)' 외 3건을 김제시 향토문화유산로 지정했다.
'조경재'는 그동안 실체가 불분명했던 김제 객사 벽성관(碧城館) 일부로 확인됨에 따라 의미가 매우 크다는 평가를 받아 김제 향토문화재가 됐다.
김제조씨 시조 벽성군(碧城君) 조연벽(趙連壁)을 모신 조경재는 1918년 김제 객사 벽성관이 훼철되었을 때 일부를 구입, 1925년에 현재의 장소에 복원해 현재까지 100년 동안 원형 그대로 보존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경재’의 경우, 완전히 소멸된줄만 알았던 김제 객사 건물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사적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이 지역 관아 건물의 연구에도 영향을 끼칠 것 같다.
김제조씨 어르신들의 증언, 그리고 문화재 전문가들의 식견 등을 종합하면 김제 객사의 건물로 보인다는 것이다.
조경재는 일반적인 사당건물이 아닌 관아건물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객사의 좌익헌이나 우익헌중 하나였을 터이다.
그동안 조경재를 방문한 전문가들이 다섯명 이상이었으나 이구동성으로 이것은 관아 건물이라고 했다.
또, 일제강점기 김제 객사건물인 벽성관이 철거되는 위기에서 김제조씨 문중에서 사들여 이전 복원했다는 문중 어르신들의 일관된 증언과도 맞아 떨어지고있다
백덕규 김제시 학예연구사는 "김제에 객사만 살아 남았다면 그야말로 옛 관아의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고있는 전국 유일의 성지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면서 "현재 김제 보건소 자리에 있었던 객사가 소실됐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었는데 객사의 일부가 남겨져 있다는 것이 최근들어 확인됐다"고 했다.
이어 "앞으로의 과제는 기록으로 남겨있지 못했던 1차 사료의 대안 마련이다.그리고 이것이 마련되는 즉시 김제를 돋보일 수있는 지방 행정문화유산의 선진지로 구축하는 일이다"면서 "일제강점기 객사건물의 일부라도 살려낸 문중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 학술대회 개최를 통해 이를 집중 조명하고 싶다"고 했다.
김광수 김제부시장은 “특히 이번 심의위원회를 통해 김제를 대표하고 정체성을 드러내는 문화유산이 발굴·지정되어 그 의미가 크다"면서 "김제시는 국가 및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사각지대에 놓여 소실 위기에 처한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향토문화유산의 분야에서도 선진적 위치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보존·관리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종근
김제 조경재(肇敬齋)
'김제 객사' 벽성관(碧城館)의 실체가 처음 확인됐다. 조연벽 모신 조경재(肇慶齋)는 1918년 벽성관이 훼철되었을 때 일부를 구입, 1925년에 현재의 장소 복원, 이번에 김제시 향토문화유산이 됐다. 김제 조경재(肇敬齋)는 김제조씨(金堤趙氏)의 시조인 조연벽(趙連璧)의 묘 우측 아래에 위치해 있다. 김제조씨 대동보에 따르면 조연벽은 고려조 고종 시대 인물로 1232년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했을 때 처인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으로 대장군이 되고 벽성군(碧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벽성은 백제시대 김제의 옛 지명이다. 조연벽은 봉지인 김제(벽성)에서 살았는데 그의 후손들이 번창해 벽성군을 시조로 하고 김제를 본관으로 했다. 조연벽의 묘는 당초 김제군 월산면 대퇴(大堆)에 위치해 있다고 한 바. 현재 입석동 용현(容峴, 龍顯, 장화동)마을 이다. 1910년에 시조묘를 단장하고 시조묘단비[벽성군조공연벽망제단:碧城君趙公連璧望祭壇]를 세웠다. 이후 1925년 시향제(時享祭)와 묘사(墓祀)를 봉사(奉祀)하기 위해 1918년 일제강점기에 해체되었던 김제관아의 객사 건물과 삼문을 현재의 자리에 세우고 조경재(肇敬齋)라 했다.
건물 중앙 넷째 칸에 조경재(肇敬齋) 편액이 걸려 있고, 제청 안에 ‘상량문(上樑文)’과 ‘조경재중수소기(肇敬齋重修小記)’, ‘조경재중수기(肇敬齋重修記)’, ‘문량공유허비각중수기(文良公遺墟碑閣重修記)’ 등 편액이 걸려 있다. 전면 기둥과 제청 기둥에 13개의 주련을 달았다. 건물을 이건하면서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나 건물 오른쪽 끝방 등은 사용 용도에 맞게 일부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본채는 외부 기둥에 익공을 설치하고, 내부 고주와 동자주에 익공을 설치하였다. 상부 머름 궁창에는 이중 판에 ‘만(卍), 수(壽), 구름, 연화’ 각종 문양을 투각으로 장식하여 화려함과 위엄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구조와 장식에서 이 건물이 관아 건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객사의 건물 구조는 대체로 가운데에는 높은 건물로 전폐(궐폐)를 모신 정청이 있고 이를 좌우로 다소 낮게 좌·우익헌을 세우고 대청, 온돌방을 설치해 숙박과 연회장소로도 사용했다. 바로 이같은 면에서 조경재는 객사의 전체를 옮겨 세운 것이 아니라 객사의 좌·우익헌 가운데 일부분을 구입하여 옮겨 세운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 역시 본채의 목재와 주초, 세부 양식이 동일하여 김제 객사의 부속건물로 이건할 때 같이 옮겨 세운 것으로 보인다. 조경재는 관아로 쓰였던 건물로 비교적 규모가 크며 위용이 있다.
김제조씨 시조로부터 김제 벽골제 쌍룡설화가 시작됐고, 시조묘와 그 옆에 관가 건물이었던 건물이 민간 재실로 사용되고 있는 등 조경재는 설화와 유적이 하나의 공간에 잘 남아 있는 매우 활용 가치가 뛰어난 복합문화유산이다. 조경재가 관가 건물에서 민가 건물로 다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하지만 향후 국가 사적인 김제관아 건물을 연구하는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기에 김제시에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 향토사적, 건축사적 연구자료로 보존함이 타당하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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