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남과 효자동 유래..기러기를 어머니에게 바치다
전주시 완산구 남쪽에 위치한 효자동은 동의 한 가운데로 삼천이 흐르고, 남서부에는 천잠산에서 황방산으로 이어지는 산지와 북동부에는 다가산과 완산칠봉으로 이어지는 산지가 있다. 『여지도서』 전주편에 “효자리(孝子里)는 관아의 남쪽 3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호구총수』에는 우림곡면(雨林谷面)과 이동면(利東面)에서 효자동에 속한 마을 이름들이 나온다.
효자동은 마을에 효자가 난 것에서 유래가 됐다.
전주역사박물관이 자리한 원효자리(元孝子里)는 조선 인조임금때 사액으로 세워진 효자 정려문이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한절리(寒節里)라고 불리웠다. 이 한절리에 장개남(張凱男)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섬기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고생할 때 하늘에 빌어 효험(效驗)을 얻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뒤에 또 병환이 극심해져서, 몸을 깨끗이 씻고 하늘에 비니 기러기가 마당 가운데 떨어졌으므로, 이것을 구워 드리자 즉시 병이 나았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그의 효심에 하늘이 감응하여 일어난 일 이라고 생각하였다. 천계(天啓) 정묘년(1627)에 임금에게 아뢰어 정려가 내려졌다.
효자로
기점 : 효자동 3가 1071- 종점 : 중화산동 2가 579-4
효자로는 이 지역의 행정구역 명칭 효자동을 도로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다. 효자동은 전주군 우림면의 송정리, 효자리, 홍산리 지역이 1935년 완주군 우전면에서 1957년 각각 효자동 1, 2, 3가가 되었다가 1973년 효자동으로 통합되었다.
효자동의 유래는 장개남(張凱男)이 인조 7년에 효자 정려를 받은 데서 비롯된다. 장개남의 효자문은 효자리에 있는데 그의 효행에 관해서는 새고기를 먹고자 하는 어머니를 위해 하늘에 축수했더니 기러기가 떨어졌다는 기러기배미 이야기, 한 겨울에 수박을 구하러 헤매다 수박골에서 수박을 구한 이야기, 송정에서 머슴살이를 해서 얻은 밥을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시내를 건너려 했는데 물이 불어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께 밥을 드리려는 일념으로 물에 뛰어들었더니 물이 갈라져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 내려온다. 효자로는 장개남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효자리는 전주박물관 근처이고 효자로는 서원로와 유연로 사이 즉 현 전라북도청 청사 부근이어서 다소 거리가 있다. 효자리 앞의 도로는 본래 쑥고개길로 불려온 까닭에 효자동의 유래가 된 장개남이 효행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효자로라는 명칭을 부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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