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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비사벌’은 전주일까 창녕일까

일제와 독재에 항거하던 전북의 시인, 신석정 선생(1907~1974)이 살았던 자택 ‘비사벌초사’를 두고 명칭논란이 한창이다. 역사사료에 비사벌이 전주의 옛 이름처럼 등장하지만, 당시 완산주(전주 옛 이름)와 비사벌의 지리적 위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도 그 시기의 비사벌은 경남 창녕지역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전북 내 일부 식자층은 ‘비사벌’ 명칭을 바꾸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전주가 오래도록 지켜야 할 ‘미래유산’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옛 지명 ‘비사벌’은 전북 전주시일까 아니면 경남 창녕군일까. 전주시가 2018년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신석정(1907~1974) 시인의 자택 ‘비사벌초사’ 명칭을 놓고 전북지역 문화계에서 뒤늦게 논란이 일고 있다. 비사벌초사는 일제와 독재에 항거했던 촛불시인 신석정 선생이 1954년 전주고에 교편을 잡으면서 정착했던 자택이다. 시인이 전주의 옛 지명 ‘비사벌’과 볏짚 등으로 지붕을 인 집을 뜻하는 ‘초사’를 결합해 비사벌초사라 이름 붙였다.
비사벌은 삼국사기에서 비롯됐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진흥왕조에는 ‘신라는 진흥왕 16년(555년)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제36권 지리지에는 ‘전주는 본래 백제의 완산이었다. 진흥왕 16년에 주를 삼았다’고 기술했다. 이를 근거로 비사벌은 1950~1980년대 옛 전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됐다. 문학 작품, 전주찬가, 전북대 교지 등에도 상징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창녕지방 호족이 완산에 진출한 게 지명이동을 가져왔다는 학계 주장이 제기되면서 사라졌다. 반면 창녕에서는 도로와 축제 명칭 등에 널리 사용된다.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를 비롯한 5명의 역사학자가 2012년 펴낸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에서는 완산주를 창녕에 설치한 비사벌주로 해석했다. 이강래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삼국사기 인식론’에서 “비사벌에 있었던 가야 사람들을 완산(전주)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그곳을 비사벌로 부르는 전통이 생겼다. 이런 전통이 신라본기를 잘못 기술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발단 <삼국사기>

문제의 원인은 <삼국사기>에서 비롯됐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진흥왕조 기사에 따르면, ‘신라는 진흥왕 16년(555년)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와 함께 같은 책 제36권 지리지에는 ‘전주는 본래 백제의 완산이었다. 진흥왕 16년에 주를 삼았다’고 나와 있다.

이를 근거로 비사벌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옛 전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됐다. 특히 전북 문학인들의 작품, 전주찬가, 전북대 교지 등에도 상징적으로 쓰였다.

앞서 신석정 선생도 1950년대 ‘비사벌’을 전주의 옛 지명으로 여기고, 볏짚으로 지붕을 만든 집을 뜻하는 ‘초사’와 결합해 ‘비사벌초사’라 이름을 붙였다.

 △역사적 사실과 배치 가능성 제기

그러나 1990년대부터 당시 신라와 백제 사이 획정된 영역을 보면 기록이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진흥왕 16년 인 555년, 전주는 백제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병도 전 성균관대 교수는 자신이 삼국사기를 번역하고 주석을 단 책 <삼국사기 역주 하>(1996)에 ‘당시 백제의 심장이었던 땅을 취해 주(州)를 삼은 것은 어림없는 오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문헌 기록을 수용해 ‘전주와 창녕의 옛 지명이 똑같이 비사벌이라는 점에서 서술에 착오가 있었다’고 부연했다.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를 비롯한 5명의 역사학자가 펴낸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2012)에서는 완산주를 경남 창녕에 설치한 비사벌주로 해석하고 있다.
이강래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자신이 쓴 <삼국사기 인식론>(2011) ‘비사벌(창녕)에 있었던 가야 사람들을 백제의 완산(전주)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그곳(전주)을 비사벌로 부르는 전통이 생겼다. 이런 전통이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잘못 기술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전덕재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창녕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삼국사기>를 비교 분석한 뒤, 김부식이 비석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오류로 파악했다.

 이에 대해 전주시는 “문헌사료에 나온 기록보다 신석정 선생이 직접 이름 짓고 살던 고택이라는 사실의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전북일보, 서울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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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벌 초사에서 차 한 잔을 마시다보니 옴팡집의 향수가 떠오른다. 전주에는 근대 미래 유산으로 지정된 고택 비사벌초사가 있다. 고택의 원주인은 시인 신석정 선생. 전원적인 시를 주로 썼던 목가시인이었던 그는 고택 중앙에 정원을 만들어 손수 꾸미는 정성도 마다하지 않았다.

비사벌 초사에서 주인의 정성이 깃든 쌍화차 한 잔을 음미한다. 반쯤 공개된 대문 위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보인다. 그래서 들어가 보았더니 고즈넉한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좋았다. 어느 새, 창밖으로 눈길이 돌아간다.

전북지방병무청 위 남노송동 원불교교당 맞은편에 자리한 이곳은 신석정시인(1907~1974)이 부안에서 전주로 이사, 20여년 동안 산 곳이다. 시인의 체취가 묻은 고택과 정원으로 '비사벌'과 초가집의 '초사'를 합쳐 '비사벌 초사(比斯伐 艸舍)'라 했다.

비사벌 초사(전주시 전주미래유산 14)’ 2018 10 15 '()체험관'을 문을 열었다. 팔작 지붕을 한 본채가 남향으로 서있고, 서쪽에 맞배지붕을 한 문간채가 있으며, 마당엔 다양한 수종의 조경수들이 자라고 있다. 이윽고 시인이 심었다는 태산목(泰山木)’을 만났다. 김남곤시인으로부터 여러 번 들었던 바로 그 나무다. 목련에 비해 꽃이나 잎이 크기 때문에 태산목이라 불린다. 시인의 사위 최승범 전북대 명예교수로부터 비사벌 초사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찾은 것이다.

비사벌 초사는 시인이 1952년부터 1974년까지 가꾸고 살았던 기거했던 한옥이다. 시인은 청구원 시대를 접고 전주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때가 이른 바 비사벌 초사시대이다. 비사벌초사는 시인이 손수 심고 가꾼 각종 화초와 나무들 때문에 마치 식물원을 방불케 한다. 유족이 살고 있지 않은 현재에도 시인이 가꿔왔던 정원은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시인은 비사벌 초사 일기를 썼을 정도로 이 집을 사랑했다. 그는 시를 향한 열정으로 집을 채웠고, 시인의 시를 닮은 비사벌 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은 이곳에서 시집 빙하’,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를 집필했다. 또 유고 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과 유고 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곳에서 쓰여졌다.

본채 안방과 윗방에서 신석정시인이 시를 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던 모든 자료들은 부안 석정문학관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본채 뒤쪽 지붕에 뚫려 있는 공간은 시인께서 말년에 의자에 기대어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았다고 전합니다. 정원엔 호랑가시나무, 히말라야시다, 동백나무, 모과나무, 목련나무 등 매우 다양한 수종이 자라고 있습니다. 정원에 놓여 있는 돌탁자는 시인이 아름다운 이 정원에서 계절이 바뀔 때면 이 돌 탁자를 술상 삼아 문인들과 술잔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김남용선생이 시인의 가옥과 정원을 원형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성스레 가꾸고 있다. 다음달 태산목이 꽃이 활짝 필 무렵, 시낭송회 등 문학 행사를 개최할 수는 없는 것인가.시인은 와병 중에도 내가 죽거든 무덤 앞에 태산목(泰山木)을 심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왜 이같은 말을 했을까./이종근(사진 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