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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씨름

씨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와중에는 적군과의 백병전 개념으로 훈련되었다.

이순신장군의 를 보면 임진왜란 중에 휘하 장수와 수군들에게 4차례 씨름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씨름을 선상 군사 훈련의 하나로 여겼을 뿐 아니라 오랜 전쟁에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한 진작책으로 활용한 것이 틀림없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간 김여준은 청나라 장수 우거와 씨름판을 벌여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씨름은 명종 시기, 즉 16세기 중엽 민중의 세시풍속으로 깊숙히 뿌리박는다. 당대의 문신인 소세양(1486~1562)의 문집인 을 보면 단옷날 서울 거리에서 씨름과 그네뛰기 하는 풍경이 등장한다.


조선 전기 시인 소세양(蘇世讓.1486~1562)의 라는 시를 보면 “오늘이 바로 단오이니 소년들이 무리 지어 즐겁게 노네. 거리마다 다투어 씨름을 하고 나무마다 그네를 뛰네. 잔에 창포를 띄워 따뜻하고 문에는 애호를 엮어 달았네. 노인 하는 일이 무엇인가, 밤새도록 책 덮고 잠자는 것이네.”라고 하여 창포를 띄운 술을 단오에 즐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단옷날에 요즘의 민속장사씨름대회가 열려 각지의 장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는 기사도 나온다.

“호남의 풍속에 단옷날이면 관아 마당에 모여 씨름판을 벌여 우승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그러자 먼 곳에서 식량을 싸가지고 오는 자도 있었다.”( ‘부록 최신록’)

특히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 지역인 여산 작지골이나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금산 직지사는 씨름경기자 자주 열리던 곳이었다. 는 “해마다 단오가 되면 금산 직지사에서 씨름을 했는데, 수천 수만명이 구경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단옷날 씨름 풍속이 종종 과열현상까지 빚었던 모양이다.

순창군에서의 근대 체육의 전개는 1931년 6월 5일 정구 연맹이 순창 정구 대회를 개최했고, 1932년 9월 17일 순창읍에서 매년 추석 명절에 순창 각희[씨름] 대회를 열었으며,
1938년 9월 13일 순창 청년단에서 호남 축구 대회를 개최했다는 기록들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봉동에 가서 힘자랑 하지 마라”

"임병룡 씨 대단한 씨름 선수로 소 여섯 마리를 탔다. 현역은 아니지만 누가 멋모르고 겁 없이 덤볐다간 넘어진 땅속 지렁이 여러 마리 죽을 것이다. 새재 가파라 자동차도 사람도 숨을 돌려 가야할 말랭이에 휴게소를 차려 오가는 손님을 맞는다. 이 자리는 운암산 관모봉(冠帽峰)에서 내려와 혈이 맺힌 ‘선인독서(仙人讀書)’ 대∼명당이라며 옛날부터 욕심내는 자리이다. 관(冠)을 벗어놓고 책상 앞에서 공부하는 형국 산자수명 가히 1등 명지란다. 평상에 마주앉아 얘기하다보면 모두가 선인 같아 끝이 없고 특히 씨름 이야기는 하나하나 적발이 필요하다. 상씨름판에서 이겨 소 몰고 오는 날이면 3∼4동네 풍물꾼과 길 가 양편엔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서 반겨 주었단다. 날을 잡아 만경강 둔치에 차일치고 소 판 돈으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게 보람이었다고 한다.

봉동은 씨름 고장, 하나를 이기면 다음 사람과 붙이고 이기면 또 시켜 결국 소를 차지했다는데 동석한 모 씨는 ‘지금처럼 체급별로 대진했더라면 소를 더 탔을 것’이란다. 임 선수는 미소 지으며 환한 얼굴로 노복기(방죽안), 노은기(정동), 김재철(성덕), 이병원(학다리), 임병룡, 이영복, 전민기, 최찬욱, 조창기 씨가 알아주는 씨름꾼이라 소개한다. 이병원은 요소 네 포대를 한 번에 들고 다니는 장사란다. 해마다 음력 7월 스무날 봉동 장기리 방천 가 숲속에서 힘과 기술의 봉동씨름대회가 열렸었는데 언젠가 슬그머니 사라졌다며 아쉬워한다.(이승철선생 글)
임병용 장사는 봉동 씨름판에서 황소를 6마리나 탔던, 쉽사리 무너지지 않은 아성이었다

그렇다면 봉동씨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봉동읍 장기리는 옛 고산현의 사형터였다 한다. 그래서 죽은 원귀를 달래기 위해 장기리 상장기 당산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고 씨름판을 벌였다 한다. 또 다른 얘기로는 터를 울리기 위해서였다 한다. 봉동으로 흐르는 고산천은 폭우가 내리면 어김없이 물난리가 났다. 많이 사람이 죽었다. 그렇게 죽은 물귀신을 달래고 제방을 다진다는 의미에서 당산제와 씨름을 했다. 당산나무가 있는 느티나무 숲도 수구막이숲이다. 예전에는 더 많은 정자나무가 있었지만 수해로 많이 떠내려갔다. 그서 “정자나무 세 그루 남으면 마을이 떠내려간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