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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북 둠벙의 문화사]

고성군의 둠벙(강원고 고성군청 제공)

전북의 둠벙

 

 

전북에서 둠벙이 제일 많은 곳이 고창으로 나타났다. 전북에 1,287곳이 있는 가운데 고창은 184개소였다. 전북농업기술원은 전북 농업생태계 공익적 가치 구현 및 디지털농업 구축의 일환으로 전북 농경지내 둠벙 현황책자를 발간했다. 인공위성 지도를 이용, 2년 동안 전북 도내 14개 시·군 농경지내 둠벙을 조사하여 1,287개소의 둠벙 소재를 확인했다. 100개 이상 둠벙이 분포된 시·군은 고창군(284개소), 부안군(196), 남원시(187), 김제시(177), 순창군(100)이었다. 이에 둠벙의 전북문화사를 살펴본다.

둠벙은 빗물에 의존해 농사를 짓던 시절,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농경지의 가장자리에 조성하고 이용하던 물 저장고이다. 대부분 크기가 1,000이하로 농어촌공사 및 관공서 등에서 관리하는 저수지보다 작은 것을 일컫는다. 최근들어 기후변화로 인하여 물 부족과 생물다양성 감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둠벙의 물 저장 능력과 생물다양성 보고 역할을 수행함이 알려지면서 농업농촌의 중요한 환경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장점을 가진 둠벙은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증진시킬 수 있어 조성, 복원 및 유지를 위한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반면, 둠벙 분포 현황 등 기초자료가 부족하다.

고창군 부안면 수앙리는 수강산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수앙(水央)이라 했다. 반룡과 용현 사이 큰길 옆에 고려장이 많이 행해졌던 고려장등이라는 산등성이가 있는데 새로 막은 둑 안쪽에 있어 새언안등이라고도 한다. 이밖에 반룡 서남쪽 끝에 꼬지기, 반룡 뒤에 밀양박씨의 선산인 선산등, 반룡 서쪽에 안씨의 정자가 있었다는 안진개(일명 안정자) 등의 산등성이가 있다. 꼬지기 동남쪽에 둠벙이 있는 둡벙배미, 용현 서북쪽에 모농골 등의 논이 있고, 웃뜸 남서쪽에는 감투 모양의 감투바우가 서 있다.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개비골엔 개 무덤 비석과 관련,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부터 대흥리 가비동을 개비골로도 부르는데, 개의 무덤 비석(犬碑)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옛날 대흥리 가비동에 큰 부자가 살았다. 어느 날 큰 부자는 흥덕장에서 친구와 어울려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을 마셨다. 해가 질 무렵에야 귀갓길을 서둘렀던 큰 부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집 앞을 지나 논둑을 둘러보던 중 그만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동네에서 아이들이 불장난을 하다가 불이 논둑에 옮겨 붙어 큰 부자가 위태롭게 되었다. 마침 주황이라고 부르는 큰 부잣집네 개가 주인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옆 둠벙에서 몸을 적셔 번지는 불을 끄기를 수십 번. 드디어 불은 꺼졌지만 결국 개는 지쳐서 죽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난 큰 부자는 개 주황이 자기를 구하다 죽은 것을 알고 몹시 슬퍼하며 충성스런 주황이를 묻어 주고 그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이후 마을에 개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고 하여 사람들이 개비골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고창엔 기자의례(祈子儀禮)가 있다. 기자 의례는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이나 집안에서 이를 기원하는 습속이다. 이를 기자 풍속’, ‘기자 신앙이라고도 한다. 자식 얻기를 기원하는 주체자의 행위에 따라 치성 기자(致誠祈子), 주술 기자(呪術祈子), 주물 기자(呪物祈子)로 분류할 수 있다. 심원면 주산리 죽곡마을 큰 재 밑에 둠벙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 유왕(용왕)과 산신에게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빈다. 공들이러 가려면 7일 전부터 궂은 음식 안 먹고 궂은 데 가지 않고 궂은 것도 안 보고 목욕재계한 후 새벽에 아무도 없을 때 산으로 올라간다. 이때 왼새끼로 연결한 물병 2개를 목에 두르고 가서 샘물을 담아 와서 마신다. 샘에 도착하면 우선 샘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이끼와 개구리 같은 것들이 없도록 샘물을 모두 품어낸 다음 새물이 고이면 가지고 간 양초와 음식을 샘 앞에 놓고 비손한다. 마을의 한 아주머니는 섣달 그믐에 떡시루와 밥, 국을 가지고 이 샘에서 공을 들이고 돌아와서 돼지 4마리를 잡는 꿈을 꾸고 아들 4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샘에 가서 감사 치성을 드리다가 나이 먹어 산을 오를 수 없게 되어서야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샘은 상수도가 공급된 이후 오랜 기간 사람이 다니지 않아 풀이 무성해 지금은 샘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도 없다고 한다.

율곡 방축(栗谷防築)은 지금의 순창군 구림면 운북리에 있던 방죽이다. 순창군 읍지는 율곡 방축 둘레가 392척이며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栗谷防築 周回三百九十二尺 在北三十里)’라고 했으며, ‘옥천군지에는 군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무림방(茂林坊)에 있고, 둘레는 392, 깊이는 3(栗谷防築 在北二十里 茂林坊 周回三百九十二尺 深三丈)‘이라고 햇다. 하지만 1872년에 작성된 순창군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율북리는 지금의 구림면 운북리(雲北里)에 해당한다. 운북리에는 현재 방죽은 없고, 물방아 둠벙과 실껏 둠벙이 있다. 순창군 구림면 운남리(雲南里)에는 골짜기가 아주 많다. 연산절골, 고름장골, 초빙골, 배암골, 산제당골, 성낭골, 자래둠벙 등이 있다. 마을 남쪽에는 장군이 진을 친 곳을 말하는 것으로 장군(將軍) 형상의 상대성 지명인 둔터골도 있다. 이외에 개골, 도깨비 둠벙도 있다.

김제엔 아직도 용두레를 볼 수 있다. 이는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의 논이나 밭으로 퍼 올리는 데 쓰는 농기구다. 무게는 7내외이다. 흔히 논 한 귀퉁이에는 가뭄에 대비한 구덩이를 파고 물을 가두어 두는 둠벙이 있다. 이 둠벙의 물은 어느 정도까지 용두레로 푸고, 나머지는 맞두레를 이용해 퍼낸다. 용두레에는 보통 36정도의 물이 실린다. 두세 사람이 교대하면서 푸면 하루에 1,000() 정도 옮길 수 있다. 용두레는 전라도에서는 통두레라고도 하며, 파래·품개·풍개로 부르는 곳도 있다. 사용할 때는 기둥 3개를 원뿔형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용두레 끈을 매어 앞뒤로 움직이면서 물을 푼다. 나무통 윗부분에는 담은 물이 넘치지 않도록 가로로 군데군데 나무 조각을 댄다. 지름 40, 길이 80정도의 통나무를 배 모양으로 길게 파낸 뒤 중앙부에 양쪽으로 가는 구멍을 뚫어 막대를 가로질러 끼운 다음 끈을 묶어 만든다. 몸통 끝에는 손잡이가 달려서 이것을 쥐고 앞뒤로 흔들며 물을 퍼 올린다. 통나무가 귀한 곳에서는 쪽나무로 직사각형의 통을 짜고 바닥에 긴 자루를 달았다. 줄의 길이는 지형에 따라 조정한다.

 

 

둠벙 관련 전설;완주 옆구리로 아기장수를 낳은 할머니와 군산 정월대보름 오곡밥의 유래

 

둠벙 관련 전설로 완주엔 옆구리로 아기장수를 낳은 할머니와 군산엔 정월대보름 오곡밥의 유래가 전하고 있다.

옆구리로 아기장수를 낳은 할머니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완주군 용진읍 신지리에 전하고 있다. 용진읍의 박씨 집안의 부인(용진읍의 박장렬의 증조할머니라는 설도 있음)이 옆구리로 아기장수를 낳았다. 마을 앞쪽 강과 산이 만나는 곳에 깊은 둠벙이 있고, 그 속에 퉁수바위가 있었다. 아기장수를 낳던 날 밤,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가 이 퉁수바위로 박씨 집안의 부인을 물어다 놓아 퉁수바위 위에서 아기장수를 낳았다. 아기장수는 어머니에게 자신을 낳았다는 소문이 나면 다시는 자신을 볼 수 없을 테니 절대 소문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기장수의 어머니는 아기장수를 낳았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아기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자 마을에는 아기장수의 어머니가 서방질했다는 등 안 좋은 소문이 퍼졌다. 몇 년 동안 그런 소문에 시달리며 지내던 아기장수의 어머니는 자신이 옆구리로 아기장수를 낳았다고 옆구리의 흉터를 보이면서 말했다. 그 이후로 다시는 아기장수가 오지 않았다. 그 후 삼밭에서 함께 일하던 마을의 여자들이 억지로 아기장수의 어머니 옆구리 흉터를 보기도 했다.

군산시 성산면 고봉리에서 채록된 설화가 정월대보름 오곡밥의 유래다. 그전 고구려 시대 때 어느 왕이 참, 이 농촌에 시찰을, 지금으로 말허자먼 시찰이나 한가집니다. 나와서 신하를 멫을 데리고 참 어느 어느 산골짝을 가는디, 가그매깐치(까막까치)가 꽉꽉 그 가는 질 앞으서 울고 있다 이거여. , 그런게 그 왕이 있다가, “멈춰라. 이거 질이, 질 앞으 신작로 앞으 가서 가그매(까마귀)가 울고 있으니 묘헌 일이다. 멈춰라.” 그런게 신하들이 딱 뭐 멈추고 본게, 왕이 동서 남방을 죽 훌트리 보니 아무 거시기도 없고 저 서행쪽으로 연못이 있는디. 연못이라는 것, 둠벙이나 한가집니다. 못이 있는디 못에서 사람 하나가 빠져 가지고 모가지만 들어갔다 나왔다. 그 이렇게 허드라 이거여. 왕이 치다본게. 근게 그 임금이 있다가 신하를 부름서

너 저그 좀 갔다 와봐라. 저 연못에 가면, 느덜 눈에는 안 뵈냐? 내는 뵌 게 사람 빠졌으니 금방 죽는다. 올라갔다 앉았다 헌게 어서 가봐라. 가서 그 사람을 구해라.”

신하가 참 그 말을 듣고서나 바로 그 못 가에 갔어요. 갔더니 아니나다를까 사람이 빠져 가지고 모가지만 폭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이짓을 허드라 이거여. 그런게 신하가 인자 벗을 여가도 없고 사람이 죽게 생겼은게 그냥 옷 입은 그대로 막 그 못가를 들어갔시요. 그 사람을 구헐, 들어가 본게 인자 모가지가 쏙 빠지고 손만 이러고 있어요 손만. 그 손이가 편지 한 장을 들고 있드라 이거요. 그서 인자 꼭 잡고 손을 잡고 이렇게 끄시내[끌어내]볼란게[보려니까] 손도 없어지고 사람도 없어지고 편지만 자기 주먹으로 쥐어 있드라 이거요. 그려서 이상허다 허고 그 부근을 훑어봤더니 사람은 시체가 없어요. 아까 빠진 사람, 모가지 내놓다 들어간 사람이 그서 그냥 와서나 임금에게 고()허기를, “가 봤더니 사람은 읎고, 편지 들고 이렇게 있습니다. 그서 찾아봤더니 읎고 그서 건지든 못허고 그서 이렇게 편지만 갖고 왔시요.” 그맀어. 그서 왕기다, 인자 임금기다 딱허니 그 편지를 전해본게 임금이 있다가 읽어본게 뜯어보면 두 사램이 죽고 안 뜯으면 한 사램이 죽는다.’ 이 겉봉으가 써 놨다. 이거여. 뜯으면 두 사람이 죽어요, 안 뜯으면 한 사램이 죽고, 헌게 그 임금님이 참 묘허거든, 근게. “, 내가 이 농촌 이런 거시기를 살피로 왔더니 오늘 일수가 나쁘고 되로 대궐로 돌아가자.” 그 신하를 데리고 감서, 인저 데리고 간 신하를 데리고 도로 대궐로 들어갔어요. 들어가서나 즉시 이 좌의정 우의정 다 불러가지고 인자 회의를, 회를 혔답니다. 회를 혔는디, “내가 아무디 아무디를 갈라고 힜더니 가그매간치가 있어서 이런이런 꼴이 있으니 이 편지를 받었는디 다 해석혀서 내 놔라.” 그맀어. 근게 우의정이나 좌의정이나 다 한 패는, “뜯어보면 두 사램이 죽고 안 뜯어보면 한 사램이 죽은게 사람 목숨이 귀헌게 뜯어볼 것이 읎이 한 사람만 죽입시다.” 그맀어 그 정승들이, 또 정승들 한 사람은, “그나지나 뜯어 봅시다. 한 사람을 더 죽이더라도 목숨이 귀허지만 뜯어 봅시다.” 그 정승들이 있다가 서로 이러쿵 저러쿵 허네, 그 수도 등등허고 뜯어 보자커니 안뜯어 보자는 숫자가 동등혀요. 근게 임금이 있다가, “, 내가 결정헐 테니 나 허잔 대로 혀라.” 그맀어. 임금님이 결정을 뭐라고 내렸나먼, “이걸 뜯어보얀다.”

그서 그걸 그 자리서 뜯어 봤어요. 뜯어 봤더니 오늘 저녁으, 지금은 시간적으로 인자 시간 있은게, 밤 한 시랄지 두 시랄지 그런 자시네 뭐 축시네 뭐 인시네 아니요? 지금 시간으로 바서 한 두어 시나 됐든 겝디다. 근게 자시나 되지. 그런데 인자 임금님이 칼 잘 쓰는 무사, 무사면은 칼 잘 쓰는 사람을 무사라고 혀요. 무사를 막 대궐인게 앞뒤로 한 이십명 막 순시히 놓고서나 그 두 시쯤인게 자시나 될, 될 것이며, 그 시간에 무사를 불러가지고, “농문을 열어 봐라.” 그맀어. 근게 농문을 딱 허니 열은게 머리 빡빡 깍은 중이 나오더라 이거여. 그 중을 내다가, “너 무신 이유로 이 내방에 와서, 이게가 어느 방이가니임금님 말씀이, “이게 어느 방에, 니가 내 방으 내 농 속에 들어 있냐?” 그렇게 물었어. 그놈 보고, 물으먼 그냥 묻겄어? 인자 주리를 틀트지. 근게 이뇜이. “, 죽기를 작정헌 몸입니다.” “어찌서 죽기를 니가 작정헌 몸이냐?” “.” 임금님이 나이가 많았던게 벼. 그러고 임금쯤 되먼 각시가 여럿이 많이 있을 거여. 작은이가 되았던가 근게, 이 임금님이 그 각시 보고, 후딱 말허자먼 뭐라고 허딘가? 대비 마마라고 허던가? 근디, “대비 마마가 나를 청을 혔습니다.” 그맀어. “그서 대비 마마의 청을 안 들어도 죽고, 내가 그 청을 안 들어도 죽고 청을 들어도 죽을지는 알고 있습니다.” “멫 달이나 됐냐?” 근게, “석 달 됐다.”, 그렇게 말을 허드래요. 근게, “, 그렇겄다.” 그러고서나 인자 그놈을 집어내고서나 목을 빌 판여. 근디 인자 후딱 말허자먼 임금님 각시까지 둘이 목을 비여. 목을 딱 허니 막 비어 버렸어. 인자 물어 볼 만큼 물어보고 중도 목비고 임금님 각시도 목을 비고 딱 비었어. 그런게 그 핀지 내용이 뜯어봤은게 중허고 임금님 각시허고 죽었어. 말허자먼, 근게 뜯어봐서 중허고 각시하고 죽고 안 뜯어 보면 그 중이 칼을 품고 농속에 숨어서 그날 저녁은 쥑이기를 약속했어 왕을, 그 나라 왕을 죽이기로 약속을 혔당게. 그래가지고 인자 안 뜯어 보먼 그날 임금님이 죽어. 그날 저녁으 뜯어봤은게 살고, 그런게 , 이게 참 내 운명이 참 하늘이 돌봤구나!’ 물팍[무르팍]을 탁 침서 신하들 보고 여봐라 오늘 날, 날짜가 메친 날이냐?” 그랐어. “예 정월 보름날입니다.” “, 정월 보름날이냐? 그러먼 가그매 간치가 나를 살렸으니 오곡을 혀서 막 사방으다 뿌려라. 오곡밥을 혀서.” , 보름달 오곡밥 안 혀 먹어요? 오곡밥을 혀서 사방에다 막 질이고 문 앞이고 다 뿌려라. 그렇게 백성기다 통보를 혀라 그맀어. 그려서 보름달 오곡밥을 먹는 것이 원인이 거기가 있다.’ 소리를 내가 들었시요.(도움=디지털완주 및 군산 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