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 1700-1767)는 하서 김인후 이후 단절되다시피 했던 순창 성리학의 맥을 이은 18세기 성리학자다. 본관은 남원, 자는 계달(季達), 호는 백수(白水)이다.
38세 되던 해 경기도 용인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도암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 들어갔다. 백수(白水)라는 양응수의 호는 이재가 지어준 것이다. 어느 날 이재는 함께한 술자리에서 양응수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주었다.
'훈훈한 취흥 돋우며/ 경의를 담론하고/ 백발 날리며/ 시를 읊는구나(倚微醺 而談經 揚白鬚 而哦詩)'
이 글은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도 학문에 정진하는 양응수를 보고 그의 기상을 아끼는 마음에서 이재가 지어준 것이다. 이때 그 글을 본 동문들이 양응수의 백발을 놀리며 양백수(楊白鬚)라 부르곤 했다.
흥덕현에 살던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순창에 사는 양응수와 가까이 지내며 왕래하고 서신을 주고 받았다. 그를 찾아간 날은 1765년 5월 8일이었다. 양응수는 42세 때인 1742년 옥출산 자락 풍산면 향가리 백호(白湖) 가에 정자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 이때 그의 스승 이재가 ‘백수정와(白水精蝸)’라 지어주었다.
예로부터 섬진강 자락에는 오곡(五曲, 백수정와ㆍ합강정ㆍ무진정ㆍ호연정ㆍ청계정)이 있었다. 그 중 제1곡이 백수정와(白水精窩)였다.
이재는 "듣자하니, 강 남쪽 벼랑에 임자순(林子順)이 새긴 글자가 있는데 그가 백호라고 스스로 호를 지은 것은 이 때문이다"고 주를 달았다.
이재는 이 백호를 중심으로 순창 적성강과 곡성 순자장에서 뱃놀이를 했다.
백수정와는 후에 ‘호호정(浩浩亭)’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약 100여 년간 후학을 가르치는 전당이자 서울 관원의 출입이 빈번했던 유림의 집합소 역할을 했던 공간이었다.
양응수는 말년에 박성원ㆍ김원행ㆍ송명흠 등 당시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황윤석은 '이재난고'에자신이 풍산면 대가리에 있는 구미사(龜尾寺)에 자면서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숙구미사유회계보(宿龜尾寺有懷啓甫)'로, 황윤석은 뱃놀이에서도 시경 첫 편인 '관저(關雎)' 시편을 외우게 했을 정도로 일상화했다. 이 뱃놀이에서 '백호야범(白湖夜泛)'이라는 3편의 칠언절구를 지었는데 제2수는 다음과 같다. '붉은 정자(홍정 紅亭)는 쓸쓸한데 합강(合江)엔 물소리 들리고 관저 노래소리 그치니 밤이 깊었네 내가 주자의 시(수조가 水調歌와 감춘부 感春賦)를 읊조리다가 다시 시름에 잠기니 남은 운치 돌아가는 구름을 머물게 하지 못하네'
황윤석은 이 시 아래에 '합강정(合江亭)은 옥과 심씨가 남긴 건물로 지금 유적지가 남아 있다'라는 주를 달아 홍정(紅亭)이 합강정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그는 시경에 나오는 '관저'를 시어로 사용해 이 시를 지은 바 특이한 수법이다.
공자께서 논어에서 말했다. “시경의 관저편의 시는 즐거우나 음란하지 않고, 슬프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논어, 팔일 제20장”
관저는 시경 국풍 주남의 첫편으로 ‘덕이 높은 황후가 인자한 임금과 짝하고 즐거우나 슬프거나 늘 중정(中正)을 지킨 것을 읊은 시로, 희노애락(喜怒哀樂)에 넘치지 않는 중용을 지키라는 것이다.’
즐거움이 지나치면 음란함이 된다. 슬픔이 지나치면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관저의 중용을 높이 평가한다.
적성현은 뒤로 두류봉이 서 있고 앞에는 적성강이 흐르며, 건너편으로 채계산이 가로 누워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남원, 임실, 옥과, 곡성 등의 지방 수령들이 탐하는 고을로, 인근 지방 수령들이나 풍류객들이 적성강에 배를 띄워 놀다가 시흥이 나면 서로 화답하곤 하였다. 적성현에는 미색의 관기(官妓)나 여기(女妓)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도 풍류객의 흥을 돋울 가무뿐만 아니라 교양과 아름다움을 두루 갖춰 적성 삼화(磧城三花)라 칭함을 받던 세 기생[월화, 월선, 월계]이 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적성강에 배를 띄우고 적성 삼화와 함께 달맞이를 즐기려는 풍류객들이 줄을 이었다. 이와 같이 취흥이 도를 더하던 중 세 기생 가운데 제일 아름다운 월화가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 월화가 빠져 죽은 바위 징검다리를 월화교라 부르게 되었으며 월화가 헛디딘 바위를 월화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적성교는 월화교라고도 불리는데, 전근대 시대에 기생 월화가 빠져 죽은 바위 징검다리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적성교는 적성면 고원리 원촌 마을과 괴정리 신월 마을 사이의 적성강(섬진강)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현재는 국도 24호선이 통과하고 있다.
적성교(赤城橋)는 월화교, 원다리로도 불리운다. 순창의 뱃놀이 전통을 살릴 방안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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