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범수씨는 완주군수로 재직하며 다리를 세운데 이어 고창군수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이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65년 3월 26일부터 1966년 12월 3일까지 제19대 고창군수로 일했다. 앞서 그는 완주군 상관에 다리를 세웠다.
완주군 상관면 산정리 입구 '유범수공적비'엔 다리군수 유범수와 지역 사람들이 협심해 1964년 6월 5일 산정교를 세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는 제14대 완주군수로 1964년 2월 1일부터 1965년 3월 25일까지 일했다. 이어 그는 제16대 정읍군수로 1962년 9월 21부터 1964년 2월 1일까지 봉직했다. 이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완주군 소양면에도 다리를 세웠다. 소양면 황운리 소양초등학교 옆 ‘국회의원유범수건교기공비’는 1969년 가을에 세워졌다.
유범수씨는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98번지에서 살았다. 오늘날 천주교인들이 많이 찾고 있는 초남이성지가 그가 살았던 곳이라고 이승철(국사편찬위사료조사위원)선생이 증언했다.
1967년 6월 8일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완주군(전북 제4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으로 출마, 3만5,329표를 얻어 당선이 됐다. 이성노 자유당 6,944표(10.55%), 임희영 정의당 2,579표(3.92%), 배성기 신민당 1만9,445표(29.55%), 유범수 민주공화당 3만5,329표(53.68%), 김택주 독립당 1,512표(2.3%)의 득표율을 보였다. 그는 1만5,884표차로 당선됐으며, 선거인수는 9만294명으로 6만5,809명이 참여, 투표율 80.61%의 투표율을 나타났다.
그 당시 국정감사장에서 국방부장관을 향해 “별을 단 장성들이 골프에 미쳐 나라의 국방을 책임질 수 있냐”는 주장을 했다. 서슬퍼런 국부통치시대에서 현역 군인들이 벌때처럼 들고일어나자 결국 사과를 하면서 사태가 일단락 된 것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화의 하나다.
그러나 그후 2번에 걸쳐 국회의원(9대 무소속, 11대 한국국민당)으로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신 후 1984년 7월 30일 57세로 별세했다. 11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을 때 자신이 군수 시절에 지방 일을 많이해 「多利郡守(다리군수)」란 닉네임을 과시하며 유세했다는 경향신문의 기사가 보인다.또 다른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국민당 당무위원으로 병원에서 숙환으로 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국민당 전북도당을 역임 오전 8시 신촌 원불교교당에서 별세했으며, 장지는 익산 월불교공원 묘지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복임과 2남 1녀를 두었다.
“사적인 일이지만 파일을 펼쳐보니 편지 29통이 나온다. 당시 초등학교 교원인 나에게 스물아홉 통 적은 수가 아니며 군민 여러 분에게도 보냈을 것이니 가히 편지 왕이라 할 수 있다. 다리군수로 유명했고 처음 호는 남계(南溪)이더니 글씨를 쓰면서 승당(丞堂)이라고 했다”그와 주고받은 편지를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승철선생은 여자 선거운동은 유범수 부인이 처음으로 기억한다면서 얼굴이 미남형인데다가 친근한 성격의 소유자로 기억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져 가는 인물이 돼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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