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가 지난 6월
17일 순창군청을 방문해 『설공찬전』과 관련된 소장자료 150점을 기증했다.
이 교수는 고전소설 분야 학계 권위자로 설공찬전 필사본을 최초로 발견했던 연구자로 이번 기증식이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설공찬전(薛公瓒傳)은 조선 전기의 문신 채수(蔡壽, 1449~1515)의 소설로, 저승에서 혼령이 돌아와 남의 몸에 들어가 저승 소식을 전해 준다는 내용이다. 중종 임금 때인 1511년 채수가 집필한 설공찬전은 귀신과 저승을 배경으로 하여 최초로 한글로 읽힌 소설이다.
순창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등장인물은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이 함께 나오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당대 정치와 사회문화, 유교이념의 한계를 비판하는 내용과 함께 불교의 윤회사상이 들어가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금서로 규정하고,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소설 판본을 소각하며, 숨겨 보관한 이들도 처벌했다는 사실이 중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원래는 한문으로 지어졌으나, 한문본은 전하지 않고 국문본은 후반부가 낙질된 채 13쪽까지만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설공찬전」은 당시에 한문과 국문으로 광범위하게 읽혔는데, 윤회 화복(輪廻禍福)을 다루어 백성을 미혹한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문제 삼아 수거되어 불태워지고 채수는 파직되었다. 이른바 필화 사건을 일으킨 작품이다.
순창 지역에 살던 설충란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결혼하여 바로 죽고 아들 설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는다. 어느 날 설충란의 동생 설충수의 집에 설공찬 누이의 귀신이 나타나 설충수의 아들 설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든다. 설충수가 주술사인 김석산을 불러다 귀신을 퇴치하려 하자, 동생 설공찬을 데려오겠다며 물러간다. 그 말대로 설공찬의 혼령이 와서 사촌 동생 설공침에게 들어가 수시로 왕래한다. 설충수가 김석산을 불러다 설공찬을 물리치려 하자 설공침을 극도로 괴롭게 하며 반발한다. 어느 날 설공찬이 사촌 동생과 윤자신을 불러오게 하였고, 이들이 설공찬에게 저승 소식을 묻자 일러 준다. 저승의 위치는 바닷가인데, 순창에서 40리[15.71㎞] 거리이며 국호는 단월국, 저승 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다. 저승에 간 영혼들 가운데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나 악하게 산 사람은 고생하며 지내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승에서 임금 노릇을 하였다 하더라도 반역하여 왕권을 차지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며, 특히 저승에서는 여자라도 글만 잘하면 쓰임을 받는다. 성화 황제의 신하가 저승에 가게 되자 1년만 연기해 달라고 사람을 시켜 저승 임금인 염라왕에게 요청하나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성화 황제가 직접 염라국을 방문하자 염라왕은 그 신하를 잡아 오게 해 손을 삶으라고 한다.
「설공찬전」은 저승 경험담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저승 경험담에서는 이를 꿈속의 일로 돌리거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진술하는 것으로 처리하는 데 비해, 혼령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그 입을 빌려 말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등장인물인 설충란, 설충수, 설공침 등이 족보에 실려 있고, 설충란의 묘가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석촌에, 설충수의 묘가 동전리 앞 평산에 각각 전하고 있어 순창 지역과 관련이 깊은 작품이다. 더욱이 작자인 채수와 설충란은 인척 관계여서 실화를 바탕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 무속에서의 빙의(憑依) 또는 공수 현상[무당이 신이 내려 신의 소리를 내는 일]처럼 설충란 집안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하였고, 그 이야기를 들은 채수가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 지어낸 것이 「설공찬전」이라고 여겨진다.
「설공찬전」은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이어 등장한 소설로서, 「금오신화」와 신광한(申光漢)의 『기재 기이(企齋記異)』 사이의 공백을 메워 주는 작품이다. 당시에 국문으로도 번역되어 읽혔다. 「설공찬전」 국문본의 발견은 최초의 한글[국문] 소설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는데, 좁은 의미의 한글 소설의 개념에 비추어 보면 원작이 한문이므로 한문 소설이지 한글 소설은 아니다. 다만 「설공찬전」 국문본의 경우, 한글로 읽혀진 최초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한문본은 민중이 향유할 수 없으나, 「설공찬전」은 당시에 국문으로도 번역되었기에 비로소 일반 백성이 소설을 향유할 수 있었던 첫 사례이므로 국문본은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국문본이 존재해 파급 효과가 더욱 크다고 판단하여 조정이 더욱 예민하게 반응한 것으로도 보이기 때문에, 한글로 적히거나 읽혀지는 소설의 사회적인 영향력이 어떠한지 확인하게 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만약 이때 「설공찬전」이 탄압받지 않았다면 원작이 한글인 최초 한글 소설의 등장은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이처럼 설공찬전은 작품 자체가 갖는 국문학적인 의미가 커 군 또한 이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금과면 소재지에 조성된 쉼터를 리모델링해 ‘설공찬전 테마관’을 조성할 계획이다. 오는 7월에 설계용역 발주를 시작으로 10월 경에 공사 착공에 들어가 내년 초에는 정식으로 테마관이 개관할 예정이다. 테마관이 지어지는 금과면 매우마을은 설공찬전에 나오는 실존 인물 후손들의 집성촌이기도 해 향후 문화관광자원으로도 적극 활용할 만한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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