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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문학,부안을 만나다


문학, 부안을 만나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노령산맥 한 줄기가 북쪽으로 부안에 와서 서해 가운데로 쑥 들어갔다. ··북쪽은 모두 서해 바다이고, 산 안쪽에는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는데, 이것이 변산(邊山)이다.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산꼭대기, 평평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큰 소나무가 하늘에 솟아나서 해를 가리고 있다. 골짜기 바깥은 모두 소금 굽고 고기 잡는 사람의 집이고, 산중에는 기름진 밭들이 많다. 주민이 산에 오르면 산채를 채집하고 나무를 하며,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업으로 하여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주고 사지 않아도 풍족하다. 단지 샘물에 나쁜 기운이 있는 것이 아쉽다'고 나온다.

변산은 전북 서남부 서해안에 돌출된 변산반도에 자리한다. 최고봉은 의상봉으로 높이는 508m에 불과하지만, 호남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힌다.

고려시대의 이규보(李奎報·1168~1241)1199년 전주목(全州牧) 사록(司祿) 등 남쪽으로 벼슬을 살게 되자 인근을 유람하며 기록해 두었다. 12월에는 부안의 변산에서 벌목하는 일을 맡아보면서 변산의 자연에 대해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12월에 조칙(朝勅)을 받들어 변산에서 벌목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변산이란 곳은 우리나라의 재목창(材木倉)이다. 궁실을 수리 영건하느라 해마다 재목을 베어내지만 아름드리나무와 치솟은 나무는 항상 떨어지지 않는다.(<동국이상국전집>23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나무가 많아 변산을 재목의 창고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변산에 들어갔을 때 변산의 모습을 자세히 형용하여 말하면서, 이때 지은 시 가운데 한 수가 <동국이상국전집> 9권에 실려 있다. ‘12월 어느 날 작목(斫木)하러 가면서 처음으로 부령군(扶寧郡) 변산에 갔다가 그때 마상(馬上)에서 짓다 2라는 시이다.

변산(邊山)은 봉래산(蓬萊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듯, 예부터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경치가 아름답고 특이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부안문화원은 2008년 변산 기행문을 3편을 연세대학교 허경진 교수의 도움으로 번역, 한권으로 묶어 부안 변산 기행 문집인 '유봉래산일기(遊蓬萊山日記)'를 발간했다.

심광세의 유변산록(遊邊山錄)' 김서경의 송사상유변산서(宋士祥遊邊山序)’, 소승규의 유봉래산일기(遊蓬萊山日記)’이다.

심광세의 글은 임진왜란을 겪고 난 지 10년도 채 안된 시기이고 김서경의 글은 17세기이며 소승규의 글은 개화기인 19세기말이다.

심광세는 부안현감으로 2년 동안 다스리러 와 있었고, 김서경은 부안에 대대로 자리잡고 사는 지주였으며 소승규는 인근 익산에 사는 선비였다.

특히 심광세는 바쁜 공무 중에 틈을 내어 산에 올랐고 김서경은 늘 익숙하게 다녔던 곳이기에 선배에게 변산의 승경을 설명하는 글을 써줄 수 있었으며 소승규는 20일이나 되는 긴 시간을 내어 변산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심광세(沈光世)<유변산록(遊邊山錄)>

 

'유변산록(遊邊山錄)'의 저자 심광세(沈光世·15771624)는 광해군이 즉위하기 바로 직전 정세가 불안함을 느끼고 외직을 청했고, 1608년 부안현감에 임명됐다. 그의 '유변산록'은 부안현감으로 있으면서 전년도 해운판관을 지내며 한 차례 유람한 적이 있는 변산을 주변의 고을 원과 함께 유람하면서 지은 것이다.

'유변산록'의 서문에는 그가 변산에서 매우 바쁘면서도 유람을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전라도 부안현감으로 부안 고을을 맡은 이후로 공무가 너무 많아서 편하게 지낼 겨를이 없을 정도로 분주했다. 비록 변산을 유람할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럴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 이웃고을을 맡고 있는 2곳의 수령이 함께 찾아와서 변산을 유람해 보자고 했다. 내 평소의 생각과 딱 맞았기에 나는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곧바로 가벼운 신발을 챙기고, 가마도 준비했다. 우리는 험한 길을 넘어가며 구석구석 깊은 곳까지 남김없이 찾아다녔다. 어떤 때는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뚫고 지나가며 용이라도 웅크리고 있을 법한 깊은 연못을 엿보기도 했다. 이는 이전 사람들이 미처 가보지 못한 곳들이었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두루 밟으면서 물리도록 실컷 구경했다. 다만 관직에 매인 몸들이어서 각기 일들이 있는지라 아주 여유롭게 유람할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비록 기가 막힌 풍경을 만났다 하더라도 대충 잠깐 훑어보면서 바삐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끝내 산신령에게 속물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당시의 그 멋진 유람을 아무런 자취도 없이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 두루마리를 만들고, 또 글로 적어서 훗날의 볼거리로 남겨두고자 했다.

때는 16075월이고 함께 간 사람은 함열현령 권주(權澍), 임피현령 송유조(宋裕祚), 부안고을에 사는 진사 고홍달(高弘達), 내 아우 심명세(沈明世)를 포함해 모두 5명이다. 호빈거사(湖濱居士) 심광세(沈光世) 적는다'

그가 유람을 한 시기는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기 1년 전인 16075월이었다. 그와 함께 유람을 간 사람은 함열현령 권주(權澍), 임피현령 송유조(宋裕祚), 부안고을에 사는 진사 고홍달(高弘達), 아우 심명세(沈明世)를 포함해 모두 5명이다. 이 가운데, 함열현령 권주와 임피현령 송유조 두 고을의 수령이 유람을 적극 권유했다.

5명의 산행은 외형으로는 매우 단출했지만, 내용은 매우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유변산록>은 그가 부안현감으로 있을 때 함열사군(咸悅使君) 권주(權澍)와 임피사군(臨陂使君) 송유조(宋裕祚) 등과 변산을 편력하면서 만든 것이다. 어수대(御水臺화룡연(火龍淵직연(直淵진선대(眞仙臺월정대(月精臺주암(舟巖용암(龍巖) 등의 기묘한 절경을 그려 화축(畵軸: 두루마리 그림)을 만들고, 그림마다 각각 서()를 달아 변산의 명소를 상세히 설명했다고 했다.

 

매헌유고 등에 부안 명승 읊다

 

고창군 고수면 예지리출신의 고제구(高濟龜, 1858-1913)매헌유고(梅軒遺稿)’는 변산 일대의 명승과 고적을 노래한 16편의 한시가 소개됐다.

끝없는 사포의 풍경

백구에게 묻노라니 최고가 마땅하리

석 잔 술에 상쾌하고

9월의 유람은 여유롭네.

드넓은 바닷물은 밀려왔다 밀려가고

골에 드리운 바다 안개는 걷히질 않네

강이 하늘에 닿으니 구름도 물빛인데

행여 먼 길 가는 나그네 걱정 돋울까.<사포를 지나면서 읖다>’

고제구는 변산 봉래산을 925일부터 101일까지 걸었다.

 

첫째날:사포-줄포-유천(25)

둘째날:내소사(26)

셋째날:격포(27)

넷째날:채석강-적벽강-낙조대(28)

다섯째날:월명암-직소폭포-실상사(29~30)

여섯째날:유천정사(101)

 

'옷자락 끝 석양, 소매에 이는 바람

열 사람 행색이 한날 한가지라

줄포 2, 3리를 쭉 둘러보니

넓은 바다에 고깃배들만 외롭게 떠 있네.<오후에 줄포를 지나다>'

매헌공 일행 10명은 사포를 지나 줄포에 이르렀다. 오후인가 했더니 늦가을의 짧은 해는 벌써 저물려

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는 시어는 석양과 고범(孤帆)으로 쓸쓸하고 외로운 정서를 촉발하는 매개물이다.

회정(晦亭) 민재남(閔在南, 1802~1873)의 회정집(晦亭輯) 2권엔 서유기행(西遊紀行)이 전하고 있다.

그는 전주를 출발해, 도화동, 우금암, 노적리, 월명암, 채석강, 열운포, 내소사, 줄포, 도산, 장성 등 부안과 고창 지역을 유람했다. 하지만 언제 작품을 지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우금은 자취 없지만 우금암이란 이름 남아 있어 우뚝 솟은 봉우리가 바닷가 입구 머금고 있구나. 거령(巨靈)이 깨뜨려 그로 인해 동굴이 완성돼었으니 둥근 이슬 유하(流霞)가 적시어 단술이 되었네<우금암에 오르다>'

그는 채석강에 이르러 이태백이 없음을 안타까워 했다.

'채석강 끝에서 온통 슬퍼하고 있노라니 텅 빈 강에 이백은 다시 없네. 하늘에서 문장 빌려 이곳을 노닐며 완상하니 강남(江南)이 해동(海東)으로 옮겨 와 있네.<채석강에 이르러>'

월고(月皐) 조성가(趙性歌, 1824~1904)의 월고집(月皐集) 3권엔 '변산십(邊山什)' 19수가 수록됐다.

아마도 1882년부터 1890년 사이에 지어진 작품 같다. 상외정이 나오는 바 1882(고종 19)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소요암, 상외정(象外亭), 소래사, 격포, 채석강, 하포, 유천, 줄포, 황윤석 구거, 면천, 장성 등 고창과 부안 지역들을 찾았다.

그는 내소사의 황홀함에 젖어 고인(故人)을 떠올렸다.

'내소사의 황홀함은 옛사람도 마주했으니 높이 솟은 기이한 봉우리들 익히 들어 왔네. 당나라 장수의 바람과 울림은 천년의 나무에 있고, 석가의 마음 속 깨달음은 오경(五更)의 종소리에 있네. 일찍이 방장산의 신선굴이 주변에 있었으니 지금의 봉래산(蓬萊山)은 백중(伯仲)을 용납할 수 밖에. 고운 최치원선생께서 예전에 이곳에 이르렀다 하니 참된 도를 찾아가는 발자취는 다행히 나로부터이리.<내소사>'

최치원은 당나라네서 귀국한 지 5

후에 지금의 정읍 태인 태산태수로 나갔던 바, 그가 내소사에 이르렀다는 전승이 흥미를 더한다.

해학(海鶴) 이기(1848~1909)'이해학유서(李海鶴遺書)'

11권에 '기유(紀游)'란 작품이 실렸다.

부풍읍, 개암사, 금암, 기암(청림, 노적, 서운 경유), 실상사, 용추, 월명암, 낙조대, 채석강, 격포, 작당포, 내소사, 취영암(청연암, 사자암 경유), 줄포로 민제남의 '서유기행'과 상당 부문 유사하다. 이기는 실상사 인근의 용추(龍湫), 오늘날 직소폭포를 보고 시를 지었다.

'물이 흘러 동쪽으로 가니 언제나 돌아올까. 용의 기운은 적이 비리고 돌의 기운은 차갑게. 태초(太初)의 배치가 공교로운 줄을 비로소 믿게 되니 인간 세상에는 본래 두 개의 여산(廬山)이 있구나'

확은(確隱) 김상성(金相誠, 1768~1827)'서호별곡(西湖別曲)'은 고창 교동, 선운포, 서암, 죽도, 상포, 삼청당, 대교동으로 이어지면서 작품이 만들어졌다. 죽도는 줄포만 깊숙한 곳에 자리라고 있으며,

상포는 줄포만에서도 북쪽 부안과의 거리가 가장 가깝다.

강세황의 격포유람기, 울금바위 유람기, 강흔의 부안 격포의 행궁, 하설루기에도 부안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강세황이 부안을 배경으로 남긴 유일한 실경산수화인 우금암도(미국LA 카운티미술관 소장)’는 강세황이 아들 완이 부안현감으로 재임(17708~17721)하던 당시 이틀에 걸쳐 부안의 변산 일대를 유람하며 그린 산수화다.

우금암은 부안 상서면 감교리에 위치한 우금산(329m)의 정상부를 이루는 바위로 그 아래에는 천년고찰 개암사가 있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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