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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금재 최병심과 옥동사

교동에서 태어난 금재는 600년 된 그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월당공 최담의 후예입니다. 스승인 간재는 "금재는 나에 못지않은 학자이며, 그의 학문을 조선에서도 따를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금재는 일제 식민지배 강화로 우리 정신과 문화적 유산이 말살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계승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옥류동(교동)옥류정사(玉流精舍)'라는 서당을 열고 자신이 강학하던 곳을 염수당(念修堂)’이라 했습니다. 일제가 전라선 철로개설을 구실로 한벽당을 헐어버리려 하자 금재는 이에 강력히 항거하며 한벽당을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금재가 살았던 집과 서당은 남아 있지 않고 있습니다. 군경묘지로 가는 순환도로 개설 때 강제 철거됐고, 그 후 새로 지은 집도 기린로 개설 때 헐려버렸습니다. 기린로 한벽당 부근 최담유허비 뒤 창암 이삼만암각서가 당시 연못이었다는 박종익선생의 증언입니다.

금재 후손과 제자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발산 중턱에 옥동사라는 사당을 지었으나 관리가 되지 않고 있으며 사당 아래 금재 묘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훼손했고 서당터 표지판 또한 방치돼 있어 대유학자 혼이 이 시대에도 편하게 쉬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옥동사는 금재의 사당으로 전국의 유림들이 모금, 1981년 건립했으나 솟을대문부터 훼손됐고, 고재가 후학을 기르던 남안재는 90년대 개축돼 옛 모습을 잃었다. 구강재는 성당 박인규가 삼재와 교류하며 강학하던 곳이었으나 빈 집에 지붕이 비닐 천막으로 덮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