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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용담

<15> 정천면 이포다리


 

    


정천면 이포(伊浦)는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씨와 정()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용담면과 정천면의 경계인 고남이재 밑에 금강상류인 정자천을 건너 산 기슭 아늑한 자리에 터를 잡은 마을입니다. 최씨와 정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처음에는 마을 앞에 흘러가는 금강 상류 맑은 냇물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살았다고 해서 이포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포마을은 뒷산이 그물을 친 형국으로 둥그스럼하게 둘러 내려와 옆으로 엎드린 산의 모습이다. 천건방에서 물이 들어와 총사방으로 흘러 간다. 앞산은 마치 그물을 친 형국으로 늘어서 있으니 마을 이름인 망화리의 연유가 된다. 앞산은 홍두깨를 옆으로 뉘어놓은 것처럼 늘어서 있어 귀함이 적은 터이다. 서남쪽으로 연꽃이 물위로 피어 오른다고 하는 연화출수 명당이 있다. 백호에 길이 반대쪽으로 높이 나 있어 터를 압박하는 까닭에 부녀가 드세고, 거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곤봉산이 높아 짐안에 내주장이 강할 형국이고, 백호가 고요체로 되어 있어 배우자를 잃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이는 이포마을 결록입니다.

망화리(網花里)는 정천면에 속하는 법정리입니다. 그물로 자라를 잡는 형국인 어망곡(魚網谷)이 이포 쪽에 있고 척금 쪽에는 이목곡(梨木谷)이 있어 그물의 ()’과 배꽃의 ()’를 취하여 망화리라 했다고 합니다. 조선 말 용담군 이남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안군 정천면에 편입됐니다. 2000년 용담댐 건설로 망화리 전체가 수몰로 주민은 한 사람도 살지 않고 산과 물만 남아 있습니다. 북쪽으로 용담호에 접하고, 중부와 남부 지역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몰 이전의 현황은 동쪽에 안천면 삼락리, 서쪽은 모정리, 남쪽은 상전면 용평리와 구룡리, 북쪽은 용담면 월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수몰 이전 이포 마을은 면내에서 자연 마을로 가장 큰 마을이었으며, 동쪽에는 재궁 마을(척금 마을)이 있었습니다. 옛 지명으로는 배나들이 있습니다. 이포 서쪽에서 모정리 들곡으로 흐르는 내로 예전에는 배가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이외에 모양이 말똥처럼 생겼다고 한 말똥바우, 이포 북쪽 앞에 있었던 서원논이라는 지명이 있으며, 과거 서원이 있었기에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정자천의 유래가 된 중국의 현인인 정자(程子: 程灝)의 동생 정이(程頤)의 호가 이천(伊川)이기에 정자천의 하류를 이천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고지도인 광여도해동지도에는 이포 앞을 흐르는 강을 이천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천의 지명 유래와 관련이 깊은 이포(伊浦)라는 곳은 이천변에 위치한 포구라는 의미로, 1872년에 제작된 고지도에 비로소 등장한다. 호남읍지정자천은 심원동(尋源洞)에서 발원을 하고 이천(伊川)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자천에서 이천이라 불렸던 구간인 망화리 일대는 현재 상당 부분이 용담호에 수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천이라 불리던 구간이었을 정천면 북쪽 지역은 용담면 월계리와 맞닿아 있고, 서쪽에는 정천면 모정리와 접하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상전면 용평리와 구룡리가 있는데, 모두 용담호에 수몰되어 있는 구역으로, 남쪽 안천면 방향으로만 육지로 이어져 있을 뿐입니다.

이천은 정자천의 하류 망화리 일대의 구간이었으나 지금은 용담호에 수몰되어 흔적을 찾기 힘듭니다. 수몰되기 이전에는 모정리와 망화리를 이어주던 이천 구간의 다리들은 여름철 홍수가 있을 때마다 물이 불어 오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향민들은 그때마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멀리서 수화(手話)로 의사 소통을 하였던 시절을 회고하곤 합니다. ‘이천이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있는 이포마을은 망화리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수몰됐습니다.

이포는 섬 아닌, 섬이 되어 강물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과 겨울에는 강을 건너는게 지독한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간혹 징검다리와 나무다리를 놓아보지만 그 노력이 여간이 아니었습니다. 사근다리란 강건너 신작로를 따라 옛날 물길이 없었을 때의 다리 이름입니다.

모정리 두곡마을의 한 뜸인 신흥마을에서 긴 농로를 따라 이어진 200미터의 이포교1979년에 놓여졌습니다. 망화리 서쪽 이포교를 지나면 머리실 들을 지나 국도를 건너면 모정리 두곡마을이 나타납니다. 이포교를 건너면 옛날 휘양군수가 명당 터에 욕심을 내어 묘를 썼다고 하는 휘양날이 있었습니다.

1988년 봄, 이포다리는 포클레인의 공격에 한마디의 말도 못한 채 도미노처럼 쓰러져갔습니다.

진안군 용담호 수몰민들의 애환과 추억을 담은 '용담호 사진문화관'201625일부터 54일까지 '고향이 무너집니다'라는 주제로 4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용담호 사진문화관은 용담댐 건설로 인한 수몰민의 향수를 달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 전시회는 용담댐 건설 당시 수몰되는 마을, 각종 공공시설, 교량 등이 철거되는 현장을 생생히 담고 있는 사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진안군이 정천면 모정휴게소를 고쳐 사진문화관으로 바꿨고, 이철수 사진작가 6년간 촬영한 용담댐 수몰사진과 유물을 보관·전시하고 있습니다.

다 허물어 내린 집 앞에서 막소주를 들이켜면서 담배 한 대를 진하게 빨아대는 할아버지의 슬픈 표정, 눈물 바다가 된 용담중 마지막 졸업식(84), 이삿짐을 쌓아놓고 이웃들과 눈물의 인사를 하는 사람들 등 수몰민들의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사진 앞에 저도 모르게 발길이 서게 됩니다. 사진 속 철거가 되고 있는 이포다리 위가 현재의 '용담호 사진문화관'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라니요?

까맣게 잊었던 검정고무신 한 짝/ 고향집 모퉁이에서/ 세월의 무게를 이고 낮잠을 잔다

이선화의 첫 시집 깜장 고무신(신아출판사)은 물장난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이에 어디선가 개구리 울음이 들리는 듯 검정 고무신에 미꾸라지 잡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롭습니다.

윤초시네 증손녀는 소나기 때문에 갑자기 불어난 개울가를 건너기 위해 소년의 등에 업혔지요. 병세가 악화된 소녀가 죽은 뒤, 그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요. 소녀가 소년에게 던진 조약돌과 물장난하며 잡은 비단조개는 어디에 있나요. 그 소년은 지금도 소나기와 무지개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제아무리 맞아도 기분 좋은 소나기, 신나는 물벼락으로 인해 맑은 첫사랑을 추억하는 소나기마을의 하루 해가 촛불처럼 짧습니다. 혹여, 첫 사랑이 소나기마을에 나타날까 하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두리번두리번 살짝 뒤를 돌아봅니다. 여름이 뜨거운 것은 불꽃같던 첫사랑의 심지가 꺼지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여름의 장마처럼 기나 긴 여운을 남기는 게 첫 사랑의 매혹인가요.

이포다리를 건너, 마을에 들어오면 진등날 소나무 숲이 양지뜸을 병풍처럼 둘러 뻗어 있었다. 당산 날 기슭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우물도 있었다. 인덕평 강가의 용왕맞이에서는 기우제를 지내며 물싸움도, 그리고 키 씻기도 하였었다. 이포교 소나무 숲 동산에서는 눈썰매를 지쳤고, 선평 김장자골 서당 터는 자녀교육의 산실로 기억되는 우리의 고향사람 백순안씨의 추억의 배움터이기도 하였다. 그는 가끔씩 아버지가 보고 싶어, 몹시도 보고 싶어, 또는 어머니에 관한 연민의 감정에서 못 헤어날, 그 때쯤이면 묻힌 고향의 옛 물결 위 용담호에 그어진 고향언덕의 그림자를 찾아 여기에 온다고 했다

이포마을출신의 백순안씨가 진안신문을 통해 소개한 고향 사람이야기입니다.

그리움으로 곱게 씻은 옛동산에 올라 봄볕에 다시 젖어봅니다. 어디만큼 서야 네가 보일까요. 매양 당신을 기다리던 나의 모습처럼 초췌한 미루나무 한 그루가 문득 서럽습니다. 당신이 내게 오기로 한 그 약속처럼 모든 것이 깨어지고 잊혀졌지만 고목들은 고단한 몸짓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움도 깊으면 저렇게 한데로 모여 흘러가는가요? 저 강물은 또 어떤 마을로 찾아들 것인가요.

햇빛 밝은 날은 눈감아도 보이는 다년생 꽃들은 한 송이만 피어도 들판의 주인이 됩니다. 창 밖의 세상이 참 좋군요. 풍경 속에서 만나봤던 수채화처럼 서정 맑은 영혼이 깃든 사람들로 넘쳐났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 수채화 같은 세상 꿈꾸면 안 될까요. 빗줄기너머로 선명한 봄하늘을 바라보며서 행복한 꿈을 맘껏 꿔봅니다.<=이종근 기자, 사진=이철수 용담호사진문화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