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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5백리길

[대청호오백리길블로그공모전]대청호5백리길에 놓인 다리들


대청호5백리길에 놓인 청주의 다리(남석교, 무심천 다리, 문산리 돌다리)

 

우리 민족은 생활환경이 되는 모든 존재에 문화적 아름다움과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지역과 지역을 이어 물류와 사람을 통하게 해주는 다리는 단순한 물질 이상입니다. 주변에 흔히 있는 것이면서도 그 문화적의미와 가치에는 소홀했던 우리들을 다리 곁으로 인도하고자 합니다.

 

대청호5백리길에 놓인 청주의 다리(남석교, 무심천 다리, 문산리 돌다리)

 

고려시대 강감찬장군이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는 길에 충북 옥천을 지나다 날이 저물어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저문 달빛을 받으며 걸음걸음 옥천을 거닐던 장군에게 주민이 달려와 고한다. “장군님! 장군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장군님 무력으로 이 극성스런 모기떼를 없앨 수는 없으신가요?”

강장군이 청석교에 가보니 모기들이 극성맞게 떼를 지어 몰려다녔습니다. 득실대는 모기떼를 향해 강감찬 장군이 소리쳤습니다.

이놈들아! 선량한 백성을 괴롭히지 말고, 당장 물러가거라!”

강감찬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마을 일대를 흔들었습니다. 그의 위상을 모기떼도 알았는지 그로부터 청석교 주변엔 모기 한 마리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청석교는 옥천의 장계국민관광지와 정지용 시인의 생가 싸릿문 앞에 길이 6m, 1m 정도의 판석이 놓여있습니다. 집앞 하천에 있던 것을 도로가 확장되면서 이곳으로 이전했습니다.

특히 다양한 유형의 이야기가 있는 교량전설은 효불효설화(孝不孝說話)’입니다. 설화에서 다리는 은밀한 공간이면서 공공의 약속된 장소를많이 뜻하는데, 특히 이 설화에서는 남녀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로 희극성과 비극성을 동시에 전한다고 해석됩니다.

먼저, 일곱 아들이 홀로 된 어머니를 위해 다리를 놓는다는 내용의 설화로 구전설화에서는 이 다리를 일곱 아들이 놓았다고 해서 혹은 일곱 개의 돌을 놓아 만든 다리라고 해서 경주엔 칠성교또는 칠교(칠자교 또는 일정교)’라고 전해집니다.

또한 어머니에게는 효성스러운 행위이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불효가 되는 일이라고 해서 효불효교라고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남석교]


변이된 2가지 설화가 전해지는 다리로는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엔 남석교(南石橋) 이야기가 있습니다. ‘홀어미가 힘이 장사(壯士)인 두 남매를 키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남매는 힘겨루기를 즐겼는데, 어느 날 목숨을건 내기를 시작하게 된다. 누이는 우암산에 올라 성을 쌓기로 하고, 아들은 무심천에 돌다리를 놓기로 하였습니다. 힘겨루기를 시작한지 며칠이 지났습니다. 성은 완성되어 가고있는데, 다리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이내 홀어미는 아들만큼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팥죽을 끓여 딸에게 먹였습니다. 누이가 팥죽을 먹고 있는 동안, 아들은 다리를 완성했습니다.

결국 힘겨루기에 패한 누이는 성 위에서 몸을 던져 자결했고, 누이를 잃은 동생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홀어미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누이가 쌓은 성은 오늘날의 청주 상당산성이며, 아들이 만든 다리가 남석교(南石橋)입니다


                                                                           [성당산성]


충북 청주의 무심천 유래비에는 또 다른 남석교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한 홀어미가 시주를 하러 온 대원사(大元寺) 수행승(修行僧)에게 스님 반 나절만 우리 애를 맡아주십시오. 남천을 건너 장을 봐야 하는데 아이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라며 부탁을 했습니다.

이에 수행승은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수행승이 잠깐 낮잠을 자는 사이, 아이가 남천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 그만 물에 빠져 쓸려가고 말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 광경을 목격한 홀어미는 크게 슬퍼하며 시체를 건저 화장하고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됐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대원사(大源寺) 주지(住持)는 가까운 고을에 있는 수행승들을 모두 동원해 웅장하 고 견고한 돌다리를 가설해 주었다

 


                                                            [청주 문산리 돌다리]


충북 유형문화재 제222호 청주 문산리 돌다리(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 7210)는 원래 대청댐 수몰전에는 문의초등학교 정문에서 남쪽으로 100m 전방에 있었습니다.

1980년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 미천리에 문산관과 함께 이전하였다가 20023월 문의문화재단지로 재이전했습니다.

이 석교는 역사도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충청북도 내에서도 옥천청석교, 진천농교, 청주 남석교(南石橋)와 함께 몇 기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석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석교의 구조는 하부에 석주를 세우지 않고 통돌을 사용하여 교각의 역할을 하고, 멍에석을 가구하고 상부에 넓은 석판재로 덮어 마감했습니다.

 청주 남석교보다 훨씬 고식기법을 사용했으며, 형태는 매우 안정되어 보이고 구조적 균형감이 잡혀 있어 문화재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석교에 대한 문헌은 조선 헌종 초기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축조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바, 교각 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습니다.

교각 상판은 2.5m×0.30.9m 규모의 화강석과 청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두 10개입니다.

석주는 1.3m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상판의 장대석(長臺石)은 장축을 남북으로 하여 2매씩 연결해 놓고 동서로 5매씩 연접해 마루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남북 장축 중간에 동서로 교각이 받치고 있으며, 석재의 크기는 일정치 않습니다. 또한 석재(石材)는 거친 다듬했으며, 석주(石柱)를 갖춘 시렁교입니다.

 

 

  어별성교 등 한국엔 유명한 다리 많아

 

동명왕신화(東明王神話)는 아주 흥미로운 다리, ‘어별성교(魚鱉成橋)’ 가 나옵니다. 주몽이 뒤쫓아 오는 군사들을 피해 도망가고 있을 때 물고기와 자라가 놓아준 다리가 바로 어별성교입니다. 이 다리는 수신(水神)의 딸인 유화의 능력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의 다리는 사라졌지만 설화나 전설이 남아있는 경주의 다리로 유교와 귀교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원효불기조에 따르면 유교는 원효가 강물에 빠져 옷을 말리려고 요석궁에 머물게 되었고, 거기서 요석공주를 만나 성속을 넘는 불같은 사랑으로 설총을 낳았다고 해서 유명해진 다리입니다. 또 죽은 진지와의 귀신과 과부 도화녀가 낳은 자식 비형이 진평왕의 명을 받들어 귀신을 동원하여 신원사 북쪽 개천에 하룻밤에 다리를 개설했다는 귀교는 삼국유사도화녀비형랑조에 나옵니다.

다리와 관련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이야기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넌 다리 밑에서 주워 왔으니까 말을 다시 듣지 않으면 다시 다리 밑으로 보낼 거야.”라는 말에 진짜 내엄마는 어디에 있지?”, “내 진짜 엄마를 찾아줘.”라고 한 아이들이 어디 저뿐에 그치겠습니까. 그제야 깜짝 놀란 엄마들은 내가 너를 낳았다니까라며 말을 정정하기도 했씁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엄마가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울 것이며, 다리가 원수로 다가서는 존재가 되겠죠.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의 유래로 알려진 곳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청다리입니다. 이곳에서 약 1km쯤 떨어져 있는 곳에 소수서원에는 전국에서 많은 선비와 유생들이 와서 학문을 닦았습니다.

 이때 지역의 처자들과 만나거나 기생들과 어울리는 선비들도 있습니다. 간혹 서로 정이 들어 원치 않은 아기를 갖기도 하였는데, 갓 태어난 아기를 소수서원 옆 청다리 밑에 갖다 버리기도 한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져나가자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청다리에 대한 유래는 단종 복위 운동과 관련해 고아가 된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 것에서 말이 생겼다고도 하는 유형의 변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