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거리]
비석에 어린 역사를 바라보며 5백리 길을 만나다
문의문화재단지, 청주의 과거와 현재를 담다.
청주의 남쪽 문의지역은 금강의 본류가 흘러 물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해 오래전 한반도의 먼 조상들부터 살아 온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문의문화재단지는 이런 바탕 위에 세워진 종합 역사 시설로 대청호가 두 눈 가득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다. 특히 대청호반이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한 까닭에 그 맑은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문의문화재단지는 와서 보고, 느끼며, 체험하고 또 기억하는 공간으로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대청호반로 721에 자리하고 있다.
단지 내에 선사유적과 민속자료 전시관, 양반가옥과 전통가옥 그리고 주막집이나 토담집 등을 조성해 문의지역을 넘어 청주 전반의 옛 전통문화를 제대로 구현해 내고 있으며, 특히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시묘살이하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여막은 요즘 접하기 어려운 특별한 전시물이다.
[문의문화재단지]
양성산 기슭까지 지역 민가와 조선중기 지방 관아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나타내는 문산관 등이 이어진다.
청주의 전반적인 역사와 풍습을 한 번에 이해하기에 좋은 곳. 단지 가장 끝 부분에 위치한 웅장한 외관의 대청호미술관은 2004년 개관한 미술관으로 2층으로 이루어진 전통 양식이다.
[문의문화재단지]
3개의 전시실에서 다양한 초대전과 각종 기획전, 대관전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가운데 야외 조각공원의 전시물들도 수준이 높다. 호수와 역사가 만들어 놓은 자리에 예술이 살포시 들어앉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구성이 어디 있을까.
비석을 통해 대청호반의 역사를 반추하다
이곳의 비석들은 문의현 지역인 문산리, 미천리 일대에 있었던 관찰사 또는 현령들의 자취를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1979년 대청댐이 수몰되면서 문의면 미천리에 보관하였다가 1997년 4월 이곳으로 이전했다.
이 비석들은 대부분 관찰사 또는 현령들의 공덕비와 선정비이며 근세에 세운 이갑수 면장과 주사 안승묵의 구휼비도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 청주 최명길 신도비
[최명길신도비]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최명길(1586∼1647)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최명길은 선조 38년(1605)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 전적이 됐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정치가 날로 어려워지자 인조를 추대하는 인조반정에 가담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당대 여론에 맞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청의 군대가 물러간 뒤 우의정이 되어 왕을 위로하고 흩어진 정사를 잘 정리하여 국내외가 안정되도록 하였고, 이 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비는 숙종 28년(1702)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박세당이 짓고 최창대가 글씨를 썼으며, 1980년 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을 세웠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것으로, 이 비는 청주지방에 있던 어느 사찰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92㎝, 너비 91㎝로, 네모난 형태이다. 1982년 발견되기까지 산직마을의 공동우물터에서 빨래돌로 사용되었는데, 그 탓에 글자가 많이 닳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청주지역이 행정, 군사,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이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비문은 북조풍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비의 크기에 비해 글자가 크다. 비문의 내용은 알아보기 어려운데, 대체로 불법을 찬양하고 임금의 덕을 칭송하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리는 호국불교의 내용을 담으면서, 절의 창건에 관련된 내용을 많이 적었다.
비에 ‘수공 2년’의 중국 연호가 있어 통일신라시대 신문왕 6년(686)에 이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청주지역이 행정, 군사,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이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청주 조헌 전장기적비
[조헌전장 기적비]
조선시대 의병장인 조헌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로, 임진왜란 당시 그가 승리를 이루었던 이곳 청주에 자리하고 있다.
조헌은 명종 22년(1567)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데 힘을 다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병장 영규와 힘을 합쳐 청주성을 탈환하기도 했다. 왜적이 금산을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를 거머쥐려 하자 승병장 영규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웠는데,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인원이 너무 적어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조헌전장 기적비]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큼지막한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겼고,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적었다. 왜란이 끝난 후 숙종 36년(1710)에 비를 세웠으며, 김진규가 비문을 짓고, 이수당이 글씨를 썼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청주 신중엄 신도비
[신중엄신도비]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신중엄(1522∼1604)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신중암 선생은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계모와 동생을 효와 성실로써 극진하게 받들어 그 효행이 널리 알려졌다. 벼슬길에 올라서도 군민들을 어질게 다스렸고, 임진왜란 때에는 군량미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식량으로 이를 조달하는 등 나랏일에도 노력을 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첨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고, 선생이 팔순에 이르니 더욱 벼슬을 올리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맡기었다. 선생이 생을 마친 후에는 좌찬성에 오르기도 하였다.
광해군 원년(1609) 심희수가 비문을 짓고 이산뢰가 글씨를 써서, 10년 후인 광해군 11년(1619)에 비를 세웠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청주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韓蘭)의 유적지에 세워놓은 비이다. 17세기 역사지리학의 대가이며 청주한씨 후손인 한백겸에 의해 시조의 옛 터가 고증되어 세운 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땅 속에 묻혀버린 받침돌 위에 비몸과 지붕돌을 올리고 있는데 비몸이 약간 서쪽으로 기울었고 비문이 심하게 닳아 읽기 어려운 실정이다. 비문에는 한란의 내력을 자세히 서술하여 모든 후손들이 제사 때마다 읽고 알 수 있도록 했다.
조선 선조 38년(1605) 당시 청주목사였던 한백겸이 청주 한씨 시조인 한란의 유적을 고증하여 찾은 뒤, 후손들이 이 터를 기억하도록 비를 세운 것으로, 그의 동생인 이조참판 한준겸이 비문을 지었다. 이 때에 위토(位土:제사 또는 이와 관련된 사항들을 집행하는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마련된 토지)를 마련하여 제단을 쌓고 담을 둘러 경계를 표시해 놓았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9호 청주 구룡사 사적비
[구룡사 사적비]
구룡사사적비는 상당산성 남문 앞에 있는 비석으로 구룡사의 창건과 상당산성의 개축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영조 40년(1764년) 은재거사(恩齋居士)가 비문을 짓고 글씨를 새겨 건립했다.
비명(碑銘)은 ‘구룡사사적비(九龍寺事蹟碑)’이다. 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 비문을 통해 구룡사가 숙종 46년(1720년)에 절도사(節度使) 이태망(李台望)과 홍서일(洪敍一)이 군영의 건물을 신축하고 연못을 팔 때 함께 창건했다는 기록과 함께 도천(道天) 스님이 창건한 절이라는 건립경위와 1743년에 대방광극락보전(大方廣極樂寶殿)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또 숙종 42년(1716년)에 절도사 유성추(柳星樞)가 상당산성을 개축하고 삼남의 요충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당산성]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구룡사는 상당산성 서남암문(西南暗門) 안쪽에 있던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남아있는 건물이 없다.
상당산성 남문 앞에 세워져 있으며 사적비는 높이 133㎝, 폭 56㎝, 두께23㎝의 비신을 세우고 상부에 가첨석을 얹었다. 좌대는 101x55㎝, 가첨석은85x49x32㎝)이다. 보존 상태는 상당히 양호하다.
[성당산성(운조루 소장)]
상당산성의 개축과 상당산성 내 사찰의 기록을 살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로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함으로서 상당산성 정비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상당산성을 찾는 관람객에게 역사적 사실을 올바르게 알려줘야 할 필요성이 있다.
기념물 제23호 청주 척화비
[척화비]
척화비는 조선 후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온 백성에게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고자 서울과 전국 교통요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이 척화비는 1976년 2월 29일 석교동 노상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한 것으로, 직사각형의 모습이며, 윗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앞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글을 새겨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의지를 밝히고 있다.
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인데, 후에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어, 지금은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66호 청주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
조선 중기의 충신 천곡(泉谷) 송상현(1551∼1592) 선생의 묘소이다.
선조 9년(1576)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며, 당시 잦은 왜구의 노략질과 왜적의 침입 소문에 대비하기 위하여 성곽을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성에 침입한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의 충적을 기리어 이조판서의 관직을 내렸다. 그리고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충신문을 세웠다.
강촌 묵방산에 자리잡은 이 묘는 원래 동래에 있던 것으로 광해군 2년(1610)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주위에는 상석과 문인석 등이 세워져 있으며, 묘의 오른쪽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묘소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것이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72호 청주 한란 묘소 및 신도비
[한란 묘소 및 신도비]
고려의 개국 공신인 태위(太尉) 한란(853∼916)의 묘이다. 조선 효종 10년(1659) 노봉에 의해 파괴된 것을 후손들이 숙종 16년(1690)에 복원하였다. 원래의 모습에서 바뀌기는 하였으나 효종 때의 문인석과 용마석(龍馬石)이 보존되어 있고, 고려시대의 묘비와 상석 등이 놓여 있다.
묘소 바로 아래에는 공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영조 44년(1768)에 세운 것으로 후손 익모가 글을 짓고 광회가 글씨를 쓴 것이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73호 청주 체화당사 및 사적비
[체화당사 및 사적비]
체화당사는 조선 중기 선조 때 선비인 교하 노씨의 4형제 노계원·노준원·노종원·노일원의 위폐를 모신 사당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 따르면 영의정(지금의 국무총리) 유성룡(1542∼1607)이 이들 4형제의 남다른 우애와 효성이 지극한 것을 보고 선조에게 말씀드리니 선조가 친히 체화당이란 글씨를 써서 그 집에 걸도록 하였다.
숙종 27년(1701)에 후손들이 남일면 가산리에 사당을 세우고 체화당사라고 이름하였으나 고종 때 철폐되었다. 그 뒤 1967년에 후손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 사당을 다시 짓고 사적비도 옮겨 놓았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사당 앞에는 이우겸이 짓고 성영이 써서 숙종 45년(1719)에 세운 체화당사적비가 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39호 청주 현풍곽씨 효자비 및 묘소
탑동의 지명 유래가 된 탑동 5층 석탑 주변에 위치한 현풍곽씨 효자비는 조선 후기 4대 5인(곽여찬, 곽진은부부, 곽원호·상조)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곽여찬, 곽진은, 곽원호의 묘소는 인근 산 49-1번지로 탑동 5층석탑과 효자각으로부터 약 50m 거리에 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곽여찬은 효행 사실로 1817년(순조 17)에 효자로 명정되었다. 정려는 정ㆍ측면 한칸의 크기로 효자비와 함께 안쪽 중앙에 현판을 달았다.
효자비는 정방형 대좌 위에 높이 93cm, 폭 41cm, 두께 17cm의 비갈형 비신이다.
정려 내부에는 1828년 청주목사 이덕수가 쓴 가선곽군여찬정효실기가 있다. 증가선대부 공조참판 겸오위도총부부총관 곽진은은 1828년(순조 28)에 효자로 명정됐다. 증가선대부 공조참판 겸오위도총부부총관 곽진은의 처 인천이씨는 1850년(철종 1)에 효부로 명정됐다.
곽진은의 효자비는 비신의 높이 103cm, 폭 41cm, 두께 20cm의 비갈형이다. 인천이씨 효부비는 높이 105cm, 폭 44.5cm, 두께 22cm로 오석의 비신이다.
정려 안쪽에는 1828년(무자) 능주목사 이덕수가 쓴 가선곽군진은정려기와 1850년(철종 1) 청주목사 송종수가 쓴 이씨정효기, 1885년(고종 22) 관찰사 심상훈이 쓴 청주곽효자정려신건기가 있다.
증가선대부 공조참판 겸오위도총부부총관 곽원호는 1854년(철종 5)에 효자로 명정됐다. 효자비는 높이 118cm, 폭 42cm, 두께 26cm의 비갈형이며 비신과 대석이 1매석으로 되어 있다.
정려 안쪽에는 1857년(철종 8) 송종수가 쓴 가선곽군원호정효기와 곽원호가 쓴 추모재서와 정문수호유서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각 내에는 곽상조의 정려문은 있으나 효자비는 없고 상조 원호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이다. 증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오위도총부부총관 곽상조는 1884년(고종 21)에 효자로 명정됐다.
현풍곽씨 묘소는 위로부터 곽여찬-곽진은-곽원호의 묘소 3기로 망주석과 상석 외에는 다른 석물은 없다.
곽여찬의 묘소, 상석 앞면에는 효자가선현풍곽공휘여찬지묘 배정부인나주정씨부좌라 하였고, 옆면 죄측에 자 진은진서진규 손 원호라 했고, 우측에는 효자라 각자했다.
아래쪽 곽진은의 묘소, 상석 앞면에 효자증참판곽진은묘 효부배정부인이씨부우라 하고, 옆면 죄측에 자 원호인호형호정호 손상기상후, 우측에 상보상조상일상도상의 증손유상문엽대엽이라 했다.
제일 아래 곽원호의 묘소, 상석 앞면에는 효자증참판곽원호지묘 배 정부인밀양박씨부우라 하고, 옆면에 자 상기상일 손 문엽이라 했다.
현풍곽씨 효자,효부비는 4기로 곽여찬 효자비, 곽원호 효자비, 곽은진 효자비, 인천이씨 효부비이다. 이 비들은 대체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정려문은 4점으로 곽여찬 정려문, 관원호 정려문, 곽은진 정려문, 인천이씨 정려문이 있다.
현판은 7판으로 곽여찬 효실기, 곽은진 정려기, 이씨 정효기, 청주곽자 정려 신건기, 곽원호 정효기, 추모제서, 정문수호 유서가 있다.
4대에 걸친 현풍곽씨 문중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정려로 효자 관련 유물(효자각, 효자비, 정려, 현판) 및 묘소 등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한 곳에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희귀하다.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며 조선후기 청주지역 이서층의 동향과 신분 변동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연구 자료로 평가된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45호 청주 양수척 효자비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효자 양수척의 효행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방형대석 위에 높이 112cm, 폭 34cm, 두께 23cm의 규모로 세웠다.
천민 신분인 사람에게 효자비를 세워준 것은 매우 드문 예로서 시민들의 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좋은 유물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할 필요성이 있다.
비석 전면에 ‘양수척효자비’라고 새겨져 있으며, 비신에 사용된 석재인 화강암이 풍화가 많이 되어 비문을 판독하기 어렵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운동동 속칭‘비선거리??에 살았던 양수척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원래 천민은 성도 없이 돌쇠, 마당쇠 등으로 불렸는데 성은 천민들의 집단인 양·소·부곡에서 양(楊 )을 따서 양수척 효자비라는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개인집 담장에 바짝 붙어 길거리에 세워져 있는데 풍화로 마모가 심하여 글씨 판독이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양수척은 조선시대에 현재의 상당구 운동동 비선거리에서 두 아우와 함께 살았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고 늙은 어머니에게도 효도를 하지 않았다. 이를 걱정하던 어머니가 드러눕게 되자 고려장을 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이때 남일면 효촌리에 살던 慶大有(경대유)가 이 소문을 듣고 삼형제를 불러 꾸짖자 양수척 형제는 크게 감화되어 이후 노모에게 효행을 극진히 하였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어느 날 모친이 중병으로 눕게 되자 청주성으로 들어가 한약을 지어 돌아오는 중에 홍수가 나서 월운천을 건너지 못하고 한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천의 물이 갈라져 건너게 되었으며 약을 달여 모친의 병구완을 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4호 청주 삼월비
[삼월비]
충성스러운 노비였던 삼월의 공을 기리고 있는 비로, 규모는 작지만 상태가 좋은 편이다.
4각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얹은 모습이며, 앞면에 비의 명칭을 새기고, 뒷면에 삼월의 공적을 적어 놓았다. 비문에 의하면 삼월은 청풍 김씨 집안의 여종으로 주인의 맏아들인 김윤이 태어난지 3일만에 그 어머니가 죽자 젖을 먹여 키웠다. 김윤이 성장하여 결혼했으나 아이를 남긴 채 그 마저 죽자, 그 아들을 정성껏 키워 주었다. 후에 이 아들이 높은 벼슬에 올라 가문이 번창하니, 그 공을 모두 삼월에게 돌리고 있다. 삼월에 대한 고마움에 답하고자 조선 정조 20년(1796) 김윤의 후손들이 이 비를 세웠으며, 비문은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김종수가 짓고, 글씨는 김치희가 썼다.
문화재자료 제65호 청주 곽훈 효자비
[곽훈효자비]
조선 선조 14년(1581)에 곽훈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비석이다. 그는 집이 가난하였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어머니가 죽은 후 여막에서 지내는데 甘泉(감천)이 저절로 솟아 나왔고 美菜(미채)가 섞여 났으며 범이 나와 낯익어 벗이 되고 義僧(의승)이 와서 지켜 주었다. 삼년상을 마치고 돌아가려할 때 중도 범도 간곳이 없고 샘물도 또한 말라 버렸다.
학술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 그러나 비석은 거의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본래 양청리 호암저수지의 안쪽 가장자리의 경작지에 위치하였는데, 오창과학단지가 조성되면서 지금의 중앙공원 동쪽 끝 생태 이동통로 교량 아래, 호수공원 남동쪽에 옮겨져 있다. 본래는 거친 화강암을 그대로 홈을 파서 비석을 세운 지대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땅속에 파묻혔는지 보이지 않는다. 비신은 고운 암질의 화강석으로 조성하였다. 비신 위에 덮은 개석은 팔작지붕형태로 밑면에 홈을 파서 비신 위에 꽂았는데 풍화가 심한 상태이다.
곽훈은 청주곽씨로서 시조인 곽상의 20세손이고, 청원군 오창읍 양청리 회암 마을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영형(英衡)으로 군수 벼슬을 하였고, 곽훈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효행으로 명정된 후 예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조선시대 선조 14년(1581)에 곽훈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비석으로 문헌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그의 효행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비석의 건립연대도 명확하다. 글씨의 자획이 유려하고 크며, 파임이 깊어 시원한 느낌이다. 가첨석과는 달리 비신은 거의 손상이 없다.
곽훈의 묘소가 마을 뒷산에 있었는데, 오창과학산업단지 건설로 인하여 어디로 이장하였는지 또는 무연고 분묘로 처리되어 없어졌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현재 그의 직계 후손은 알 수 없고, 청주곽씨 종친회의 대표는 곽노언(충남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454번지)씨이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31호 청주 송인수 묘소 및 신도비(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남계리 산 69-3)도 눈여겨 보아야 할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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