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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5백리길

[대청호5백리길블로그공모전]하늘담은 대청 호반에 가면 하늘닮은 문화재를 보듬으세요


                                       [문의문화재단지]


하늘담은 대청 호반에 가면 하늘닮은 문화재를 보듬으세요

 

1981년 준공된 대청댐은 일대를 변화시켰다. 길이 495m, 높이 72m의 커다란 수벽 때문에 사람과 문화재는 터전을 옮겨야 했다. 상당산성은 그 반대다. 4.2km 길이의 커다란 성벽이 성안 사람을 보호했다. 벽이 만든 삶의 변화, 그 흔적을 찾아가보자.

입구부터 눈이 확 트인다. 넓게 펼쳐진 대청호가 눈은 물론 마음까지 시원하게 열어준다. 이 아름다운 호수는 길이 80km, 저수량 15억톤에 이르는 국내 세번째 규모의 호수다. 대청호는 대청댐 건설로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대청댐이 1981년 준공됐으니 사람으로 치면 36세다. 철새와 텃새, 물과 나무와 풀이 어우러져 인공의 느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자연 그 자체다. 이 일대는 충청북도의 유명한 드라이브 코스다. 대통령의 별장으로 유명한 청남대도 있다.

이곳에 호수가 생기기 전으로 돌아가보자. 큰 공사를 치르며 희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을이 수몰되고 5개 부락은 호수 좌우로 갈라졌다. 수많은 주민이 졸지에 고향을 잃었다. 조상 대대로 터잡고 살아온 4075세대 26000여명의 지역 주민이 신탄진, 대전, 경기도 남양 간척지 등으로 이주했다. 2015년 극심한 가뭄으로 수몰됐던 마을 터, 학교 터가 드러났을 때 이 고장 사람들이 그 광경을 어떻게 봤을지 여행자는 그 감회를 섣불리 짐작하기 어렵다.

문의문화재단지는 수몰된 지역의 귀한 문화재들을 옮겨 놓은 곳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9호 문산관을 비롯해 양반가옥, 민가 등 10동의 고건물이 있고 고인돌, 장승, 연자방아, 성황당 등 옛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많다.


                                                                                 [문의문화재단지]


대표적인 유적은 문산관이다. 문의현의 객사이자 충청북도의 유일한 객사인 문산관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지붕 암막새에 양각된 연대를 근거로 1728(영조 4)에 중수한 것으로 짐작한다. 다만 중앙 건물과 양쪽 건물의 재료와 건축 방법이 달라 건축 연대에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 지방 관아 건축양식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대청댐 수몰지역에 있어 1979년 문의면으로 이전됐다가 1996년 이곳 문의문화재단지로 재이전됐다. 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보존이 어려웠을 문화재인데 몇번이나 옮겨졌으니 생명이 없는 건축물에서도 고단함이 느껴진다. 큰 볼거리라 느껴지지 않더라도 한번쯤 들르길 추천한다. 단지의 높은 곳에 자리 잡아 대청호의 전망을 제대로 볼 수 있어서다.

이밖에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노현리 민가(220), 부강리 민가(221), 문산리 석교(222), 관정리 민가(민속자료 제 38) 등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비석거리에는 문의 지역의 비석들을 모아놓았고 양반가는 물론 토담집, 대장간, 저잣거리 등 서민들의 삶도 들여다 볼 수 있다.

 

국보 제41호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용두사지 철당간]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용두사지 철당간 명문]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현재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했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 아미타불비상

 

 




                                              [계유명전씨 아미타불비상]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이 삼존석상은 4각의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碑像) 형태이다.

조각이 정교하면서도 장엄하고, 세부 양식에 있어서도 옛 형식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8)과 비슷하며, 만든 연대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3(673)으로 추정된다

정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한 모습이며, 신체는 건장하면서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다.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사각형의 대좌(臺座)를 거의 덮고 있으며, 대좌 밑의 좌우에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둥근 머리광배는 3줄의 동심원 안에 연꽃을 장식하고 있다.

사자 등위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협시보살상은 본존불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으나 연꽃이 새겨진 둥근 머리광배가 남아 있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의 어깨 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으며, 협시보살상의 양 옆에는 인왕상이 서 있다. 불상 위로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광배가 이중으로 있으며, 안쪽의 광배에는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광배 밖의 좌우 공간은 한층 더 낮추어 비천상을 새겼다.




                                                    [계유명전씨 아미타불비상]


양 측면의 하단에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용머리를 조각하고, 그 위로는 연꽃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표현하였다. 뒷면은 4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5구씩의 작은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불상 사이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었다.

 

보물 제367기축명 아미타불비상




                                              [기축명 아미타불비상]


기축명 아미타불비상(己丑銘阿彌陀佛碑像)은 비암사에 있었던 3점의 비상(碑像) 가운데 하나이다. () 모양의 큰 돌에 조각을 하였는데, 앞면에만 조각이 있고 뒷면에는 4줄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신라 신문왕 9(689)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삼국시대 불상 요소와 새로 들어온 당나라 요소가 혼합된 통일신라 초기 불상양식의 좋은 예로 본존이 아미타불인 점으로 미루어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주고 있는 작품이다.

앞면에는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여러번 변하는 듯하여 마치 극락세계의 장면을 돌 위에 새긴 것과 같다. 맨 밑에는 연꽃을 둘러 석상 전체의 대석(臺石)으로 삼고 그 위에 난간과 계단을 놓았다. 그 위에는 물결무늬로 연못을 표현했고, 난간 좌우에는 사자를 서로 마주보게 배치했다. 연못 중앙에 큰 연꽃이 있고, 그 위에 본존인 아미타불이 앉아 있다.

좌우에는 서 있는 자세의 여러 불상이 나열되어 있어 엄격한 좌우대칭 수법을 따르고 있다. 크게 새긴 본존불의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오른손은 뚜렷하지 않으나 왼손은 가슴 아래에 들고 있다. 본존 좌우에는 보살상이 있고 그 사이에 열반의 경지에 이른 성자인 나한(羅漢)의 상반신만 표현하였다. 보살상 옆에는 사나운 귀신인 야차상(夜叉像)이 한손을 들어 천궁(天宮)을 받들고 있으며, 그 옆에는 수호신인 인왕상(仁王像)이 있다. 본존 위에는 반원 모양으로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졌고, 그 위에는 다시 7구의 작은 부처가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들 사이에는 나뭇가지와 잎이 표현되었고, 구슬과 장신구가 새겨져 극락의 화려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보물 제368호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은 그 생김새가 탑비(塔碑)를 닮았다 하여 비상(碑像)이라 불리는데, 아래쪽의 대좌, 중앙의 사면석, 위쪽의 덮개돌이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석상은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크게 발달한 반가사유상 양식의 귀중한 유품이며, 만든 연대는 조각솜씨로 미루어 보아 충남 연기군 비암사에서 함께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국보 제106)과 같은 673년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멸망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그 영역에서 조성된 이들 석상은 백제의 석조미술 수준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예이다.

 

T자형을 이루고 있는 이 비상은 정면에 왼발을 내리고 오른발을 왼쪽 다리에 올린 반가상을 크게 새기고 있다. 오른손을 들어 뺨에 대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반가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있으며 목걸이와 구슬장식을 갖추고 있다. 양 측면에는 두손에 보주를 들고 정면을 향하고 있는 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는데, 반가상을 본존으로 삼아서 3존 형식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는 보탑(寶塔)을 크게 새겼는데 이 보탑으로 보아서 정면의 반가상이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각형의 대좌에는 중앙에 둥근 화병을 놓고 그 좌우에 꿇어 앉은 공양상을 조각하였는데, 대좌의 양 측면에도 정면을 향해 꿇어 앉은 공양상을 표현하였다.

 

    

보물 제511호 청주 계산리 오층석탑




                                           

                                            [계산리 오층석탑]


계산리의 말미장터 남쪽 언덕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위아래 지붕돌의 체감률이 정연하여 전체적인 안정감이 느껴지는 우수한 작품이다.

기단(基壇)은 가운데돌이 서로 엇갈려 짜였으며 아무런 조각이 없다. 탑신(塔身)1층과 3층의 몸돌은 4장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2층과 4·5층의 몸돌은 하나의 돌로 구성했다.



                                                    [계산리 오층석탑]


 지붕돌은 1·2층이 2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3층 이상은 한 돌이다. 지붕돌 아래받침은 1·2층이 5, 3·4층이 4, 5층은 3단으로 줄어들었다. 지붕돌의 윗면(낙수면)은 경사가 심하며, 지붕돌 아래의 받침은 처마끝까지 나와 있어 둔중한 느낌이 들지만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히고 안정감이 있다.

 

보물 제664청주 안심사 대웅전

 


                                                      [청주 안심사 대웅전]

안심사는 법주사에 딸린 작은 절이다. 통일신라 혜공왕 11(775)에 진표율사가 지었다고 하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제자를 길렀다 해서 안심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12(1325)에 원명국사가 다시 짓고 인조 4(1626)에 송암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하며 한말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주 안심사 대웅전]


지금 있는 대웅전은 확실하게 지은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979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와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인조 때의 건물로 보인다.





                                 안심사 대웅전과 영상회괘불탱(1,2,3)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이 건물은 앞면 3·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원래는 맞배지붕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러 차례 수리를 통해 건물이 축소·변형되면서 지붕 형식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아 만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사적 제212 청주 상당산성

 

                                                               [청주 상당산성]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산성은 천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한다. 처음 축성된 시기는 백제시대로 추정된다. 조선 임진왜란 때(선조 29) 개축했다가 숙종 때 석성으로 재개축했다. ··남방 3개소에 성문이 있고 수직으로 굳게 세운 성벽의 높이가 4.7m로 방어에 최적화된 산성이다. 이곳은 서울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약 3500명의 병력과 승군이 배치됐었다고 한다. 성내에는 3개의 사찰과 암문, 관아, 장대, 포루, 창고 등이 있었다.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대조영>, <태왕사신기>, <카인과 아벨>, <임금님의 사건수첩> 등 역사극뿐 아니라 현대극도 이 일대에서 꾸준히 촬영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0청주 노현리 고가

 


                                                      [청주 노현리 고가]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문의면 노현리 이양훈(李讓勳)씨가 살던 가옥을 이축한 것으로 당초에는 강릉김씨(江陵金氏) 김승지(金承旨)의 종가(宗家) 댁이었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가 자 형태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광채와 사주문(四柱門), 측간(厠間)은 목조초가이다. 광채는 자 집이다. 1993년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19806월 전국 취락 및 전통가옥(민가)조사 기록대장에 의하면 약200년 전에 지었으며, 엄씨, 김씨가 살다가 연안 이씨가 입주후 이성훈씨가 살았다고 한다. 또한 조사 당시에 안채, 사랑채, 곳간, 축사 등 4채의 전통기와집이었다고 조사되어 왔다.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이건하여 재건축되었으며 현재는 자형 안채와 ‘1’자형의 대문간 및 곳간, 축사로 건축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건축되지 않았는데 이건하는 시기에 사랑채가 소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안채의 평면형식은 충청지역 민가의 특징을 갖추게 구성되어 있고 건축의 가구기법은 일반민가보다 세부분까지 정교하게 가공되었다. 또한 이전과정에서 안채의 지붕의 합각부분이 조금 높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2청주 문산리 돌다리

 

 

                                                   [청주 문산리 돌다리]


청주 문산리 석교는 역사도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충청북도 내에서도 옥천청석교, 진천농교, 청주 남석교(南石橋)와 함께 몇 기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석교의 구조는 하부에 석주를 세우지 않고 통돌을 사용하여 교각의 역할을 하고, 멍에석을 가구하고 상부에 넓은 석판재로 덮어 마감하였다. 특히 청주 남석교보다 훨씬 고식기법을 사용하였으며 형태는 매우 안정되어 보이고 구조적 균형감이 잡혀 있어 문화재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청원 문산리석교는 원래 대청댐 수몰전에는 문의초등학교 정문에서 남쪽으로 100m 전방에 있던 것이다. 1980년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 미천리에 문산관과 함께 이전하였다가 20023월 문의문화재단지로 재이전했다.

이 석교에 대한 문헌은 조선 헌종 초기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처음으로 나온다. 축조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데 교각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

교각 상판은 2.5m×0.30.9m 규모의 화강석과 청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총 10개이며, 석주는 1.3m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판의 장대석(長臺石)은 장축을 남북으로 하여 2매씩 연결하여 놓고 동서로 5매씩 연접하여 마루식으로 만들었다. 남북 장축 중간에 동서로 교각이 받치고 있으며, 석재의 크기는 일정치 않다. 또한 석재(石材)는 거친 다듬하였으며, 석주(石柱)를 갖춘 시렁교이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25청주 양성산성

 


                                                                        [청주 양성산성]

 

삼국시대 축조된 산성으로 그 당시 성곽과 성문터 등이 남아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성안 둥근 연못과 수구가 잘 남아 있어 학술상 중요한 산성이다.

청원군 문의면 미천리 마을 서쪽에 있는 해발 292m의 양성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산성이다. 삼국시대 축조된 산성으로 후삼국시대까지 치열한 격전장소로 군사적·행정적 중심지 역할을 했던 산성이다.



                                                                                     [청주 양성산성]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자비마립간 17(474)에 일모(一牟), 사시(沙尸), 답달(沓達), 광석(廣石) 등 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고려 태조 8(925)에 정서대장군 유금필()을 파견하여 후백제의 연산진을 공격하여 장군 길환(吉奐)을 죽였으며 태조 15(932)에는 왕이 이 곳에 와서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 지리지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청주 양성산성]


돌로 쌓아 만든 성벽은 평면형태가 불규칙하여 빗자루 모양 또는 주걱 모양이다. 높은 위치의 부분이 대체로 네모꼴이고 낮은 위치의 능선을 길다랗게 감싸고 있으며, 성의 전체 둘레는 약 985m이다. 성벽 안쪽으로 성안을 돌아가는 내환도(內環道)가 있으며, 성벽은 여러 부분에서 각기 상이한 축조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상태로 보아 돌로 쌓은 성벽, 곡성(曲城), 문터, 수구(水口), 큰 못, 차단벽, 그리고 크고 작은 건물터가 있다.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2호 보은 고현재

 

이는 재실로 보은군 회남면에서 청원군 문의면 경계지점으로 이 마을 입구에 뒷산(259m)을 배산으로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좌측으로부터 방, 대청, ,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구조는 급경사의 뒷산을 배산으로 전면에는 높은 기단을 쌓아 대지를 조성하였으며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방형 기둥을 세웠다. 다만, 대청 정면은 원기둥을 세웠다.

하인방 밑으로는 적벽돌을 쌓는 등 변형이 많이 되었으나 평면형식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사용된 부재의 굵기와 치목기법 등 세부기법에서 조선후기의 고식기법이 나타나고 있다.

고현재는 보은지역 재실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지붕 보수 시에 발견된 기와명문과 중수기, 문중 기록 등 기록이 잘 남아있으며, 목조의 가구기법, 치목기법 등에서 고식의 기법을 잘 보여준다. 또한 기둥을 비롯한 부재에서는 자귀자국이 역력하여 당시 사용된 연장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께가 있는 나무못이 사용되어 더욱 운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