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는 후삼국 시대 이후 유일하게 왕궁 터를 찾지 못하고 있는 나라다. 개발을 계속하고 있지만 지금도 확실치 않다. 학자마다 설이 분분하다. 전주 동고산성이라고도 하고, 물왕멀 일대라고도 한다. 또,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라고도 한다. 최근들어 전주국립박물관은 노송동 지역을 궁성 일대로 상정하고 도성의 형태나 방어체계를 새롭게 설정, 발표했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기존에 왕궁터로 거론되어온 '전주 동고산성설''노송동설(무랑물)''전주 감영지설' 등에 문제가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가 왕궁터로 주장하는 인봉리 일대는 본래 방죽이 있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방죽을 메워 공설운동장으로 활용했으며, 현재는 대규모 주택단지들이 들어서 있다. 송화섭 중앙대 교수도 "동국여지승람의 전주의 고토성(古土城)이 후백제의 도성일 가능성이 크고, 무랑물에서 발견되는 초석은 궁성이 파괴되면서 나온 돌일 가능성이 있다"고 '인봉리설'을 뒷받침했다. 현재도 (후백제) 당시의 토성벽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부분 부분 많이 남아 있어 후백제의 왕궁터로 보고 있다.
인봉리(麟峰里)는 기린봉(麒麟峰)의 인봉에서 비롯됐다. 말 그대로 기린봉 마을 즉 기린봉의 산자락으로 감싸 안긴 동네이다. 조선시대 전주부성과 인봉리 사리에는 인봉지 즉 인봉리방죽이 있었다. 이 방죽은 전주부성의 동문과 북문 사이의 담에서부터 인봉리에 이르는 지대가 모두 논과 밭이었기 때문이다. 인봉리방죽 가운데에는 ‘일육정(一六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실용적인 기능은 물론 유원지로서도 기능을 다했다고 전하고 있다. ‘완산지(完山誌)’에는 ‘인봉제(燐峰堤, 麟자가 아닌 燐)’는 전주부의 동쪽 5리 기린봉 아래에 있다. 전주부의 동북성 밖에는 물의 근원이 없어 능히 물을 댈 수가 없었던 바, 관찰사 서정수가 바로소 제를 만들었다. 둘레는 1,742자, 수심은 5자이다’고 기록됐다.
서유구의 ‘완영일록(完營日錄)’ 1834년(순조 34) 5월 10일의 기록을 보면 ‘인봉제의 채정(彩亭)은 제언(堤堰)을 파내어 소통시키는 일을 마친 뒤에 연못 가운데에 작은 섬을 쌓아 그 위에 조그만 ‘육모정(六茅亭)을 지었다.(육모정은 여섯 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 처마가 여섯 모가 되게 지은 정자를 말한다.) 육모정을 짓고는 기와를 덮어 지붕을 만들었다. 전돌을 까라 마루를 만들며 계단 둘레에 잔디를 입히고 섬을 빙 둘러서 나무을 심어 한가한 날 구경하는 장소로 삼았다. 또 작은 배 한 척을 만들어 난간을 채색하고 베돛을 달아 정자 아래에 매어두고서 고기를 낚거나 연꽃을 감상하는 도구로 삼았다. 남고별장(南固別將) 김기중(金基中) 공사를 돌보게 했다.
오늘날 문화촌(文化村)이라고 불리는 중노송동 옛날 공설운동장 자리가 방죽이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기린봉 기슭을 타고 흘러내린 계곡물과 빗물이 흥건하게 고였으며 주변에는 오래된 정자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어 여름철 피서객들이 모여드는 도시 중심변의 유일한 유원지였다. 6.25사변 이후까지도 그 아름다운 정취가 시민들의 눈길을 자주 끌어 들었는데 그 자리를 메우고 1949년 전주 공설운동장을 만들었다. 상단은 경마장, 하단은 공설운동장이 되었는데 주로 하단을 인봉리 방죽이라고 했다.
이후 전주종합경기장은 설립 당시 시민들의 성금으로 건설비가 충당되고 지난 1963년 제44회 전국체전시에는 임원과 선수들을 수용할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턱없이 부족하자 시민들이 나서서 민박으로 해결해 '인정 체전'으로 불린 시민의식 발현지로, 전주 정신을 이어갈 인문학적 자산으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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