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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석이야기

미륵사지 석탑 지킴이

보통 석인(石人)은 능묘 앞에 세우는 사람 형상의 석조물로 수호신같은 존재다.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능묘 조각의 하나로, 외형에 따라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나누어진다. 문인석은 일반적으로 공복(公服) 차림의 문관형상을 하였으며, 무인석은 갑옷과 무기로써 무장을 한 무관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능묘 주위에 석인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의 전한대(前漢代)부터 시작된 것으로, 묘 앞에 석사(石祠)나 석궐(石闕)을 세우고 신도(神道)의 양쪽에 석인과 석수를 세워 묘를 수호했다. 이러한 습속은 후한대의 후장(厚葬) 풍습에 따라 일반화되어 명.청대까지 계속된다. 한국에서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능묘제도가 정비된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8세기 중엽의 전(傳) 성덕왕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을 비롯, 괘릉(掛陵)과 흥덕왕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등을 들 수 있는데, 힘찬 모델링, 사실적인 신체묘사, 정교한 세부수법 등 당시의 조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 문인석의 모습은 당나라의 명기(明器) 중에서 비슷한 모습을 찾을 수 있으며, 특히 괘릉의 무인석은 서역적(西域的)인 용모를 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움푹 들어간 눈, 매부리코, 짙은 구레나룻 등은 이국인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최근 경주 용강동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 중에도 비슷한 작품이 있는 까닭에 당시 신라와 서역간의 관계를 시사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묘 앞에 석인을 배치했지만 초기에는 무인석이 사라지고 문인석만 배치되다가 14세기 중엽 충목왕릉(明陵)에 이르러 다시 문인석과 무인석이 함께 배열됐으며, 공민왕릉의 석인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전대에 비해 조각 수법이 퇴화되고 형식화되어 조각 작품이라기보다는 단지 상징적인 의물(儀物)로 남게 되었다. 아무튼 석인상은 능묘를 옹위하는 수호자로 당시의 조각양식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능묘제도의 변천을 파악하게 해주는 것으로 한국조각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미륵사탑 앞에는 또 이 명작에 걸 맞는 에필로그 같기도 하고 특별보너스 같이 망외의 기쁨을 주는 유물이 하나 있다. 우리의 토종 수호신이면서도 불교 탑을 지키게 되었는데 그 나이는 대략 1400살이 된다’ 유홍준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에서 미륵사지 석탑 한 쪽 모서리에 세워져 있는 석인상을 두고서 이처럼 말했다. 2008년 7월 31일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해체 현장에 역사학자와 일반인들의 눈과 귀가 집중된 것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온화한 미소와 다소곳이 합장한 완전한 미륵사지석탑 석인상에 대한 현장 공개 설명회 때문이었다. 익산 미륵사지석탑 1층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1층부 남.서측면 및 기단부 우측 아래에 석인상 1점이 발견됐다. 원래 미륵사탑 네 귀퉁이에는 석인상이 모두 네 분이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한 분은 없어졌고 두분은 마모됐고 오직 동남쪽 모퉁이 석인상만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나마도 얼굴의 형체는 비바람에 거의 분간되지 않으나 아담하고 공손한 느낌을 주는 몸덩어리와 가슴 앞에 간종그려 모은 두 손으로 1,400여년 전에 부여받은 자신의 소임을 지금까지 충직하게 지키고 있는 듯 하다. 이 석인상은 장승의 원조로 볼 수 있다. 훗날 경주 분황사나 다보탑에서 보이듯 석탑의 둘레에는 네 마리 사자를 모시는 것이 불교미술의 원리로, 불교가 아직 토속 신앙을 흡수해 가던 단계에서는 민간의 수호신앙을 그렇게 끌어 들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흡합(吸合)현상이라고 한다. 이 석인상은 온화한 미소와 동글동글한 얼굴은 돌하루방과 돌장승을 닮았으며 두 손을 가슴에 다소곳하게 얹은 자세이다. 석탑 기단 남서쪽 귀퉁이 석축 안에서 두상과 몸체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됐으며, 크기는 폭 595mm, 높이 920mm이다. 이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 석인상이 형태나 발견 위치로 보아 사방에서 석탑을 수호하는 수호신상의 하나로 만든 것으로 추정했다. 발견된 석인상은 석탑 건립 후 오랜 세월이 지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새로 제작해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륵사지석탑 1층 기단 주위(남동, 북동, 북서측 모서리)에 노출돼 있었던 기존의 석인상 3기는 풍화와 훼손이 심해 정확한 제작 시기와 양식을 알기 어렵다. 한국의 석인과 석인상 문화재여수석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은 여수진남관(국보 제304호) 뜰안에 서 있는 것으로, 돌로 만든 사람의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거북선을 만드느라 한창일 때 왜구의 공격이 심하자 이를 막기 위해 7개의 석인(돌사람)을 만들어 사람처럼 세워 놓았는데, 이로써 적의 눈을 속이어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한다. 원래의 7기 중에서 지금은 이것 하나만 남아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손은 팔짱을 꼈으며 그위로 도포자락이 늘어져 있는 모습으로, 시선은 유유히 적을 바라다 보는 듯하다.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2호 문관석인상1은 큼직하면서도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 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같은 시기의 석인상들보다 머리 부분이 매우 큰 편이며, 특히 부피감이 풍부하게 묘사된 얼굴과 큰 귀, 세밀한 수염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왼손에는 신하가 왕 앞에 나아갈 때 손에 쥐던 홀(笏)을 쥐고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3호 문관석인상2는 다른 하나의 문관석인상에 비해 눈, 코, 입 등이 더 또렷하게 표현되어 서역인의 인상을 풍기고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4호 무관석인상1은 세종과 그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가 묻혔던 옛 영릉의 무관석인상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2기의 무관석인상 가운데 키가 약간 작은 무관석인상이다. 문관석인상에 비해 무관석인상은 전체적으로 몸의 굴곡이 더 살아 있고 얼굴의 표현도 생동감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5호 무관석인상2는 2기의 무관석인상 가운데 키가 약간 큰 무관석인상이다. 무관석인상답게 칼집에서 칼을 빼 손으로 짚고 있는 모습을 나타냈는데, 손 모양은 다른 무관석인상과는 반대로 왼손이 겉에서 오른손을 감싸고 있다.능동석인상 및 상석(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1호)은 머리에 쓴 관모와 차리고 입은 관복, 홀을 쥐고 있는 손모양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목과 허리의 표현이 없고 턱이 볼록하며 귀가 커서 친근함을 가져다 준다. 천변리석인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호)은 마을 입구의 마련된 보호각 안에 서 있는 2구의 장승(할아버지와 할머니)이다. 지극히 희화적인 이 석인상은 조선 헌종 4년(1838) 담양부사 홍기섭이 제작한 것이라고. 마을의 입구에 세워 마을 수호신 구실을 하는 장승의 형태이지만 담양의 땅 모양이 배 모양이기 때문에 뱃사공이 있어야 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 장승을 세운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밖에 양민공 손소 및 정부인 류씨의 묘비, 석인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0호, 제391호, 제391-2호)도 있다. 이종근기자

출처 : 새전북신문(http://www.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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