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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의 진화

[충추시블로그공모전]충주,한국석탑의1번지


충주, 한국의 석탑 1번지

 

옛날 인도 코살라 왕국 샤키아공화국 카필라바스투에 고타마 싯달타)가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궁궐 밖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고통가운데 있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병들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샤키아국의 왕자인 싯달타는 궁궐 밖의 사람들에게 왜 고통과 아픔이 일어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궁궐 내에서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궁궐 밖의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듣고 싶고,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등등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출가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인 정반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 왕은 싯달타가 가정을 이루면 그런 생각들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싯달타는 결혼하게 되고, 아이를 얻었지만 그 아이가 자기의 번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장해가 된다고 라훌라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가 끝내 모든 번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여 고행을 통한 해탈을 얻어 보려고 했으나 몸만 극도로 쇠약해지게 된다. 그래서 홀로 보리수 밑에서 깊은 선정에 드는 동안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가 너무나 심오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설법을 주저했지만 마음을 돌이켜 교화활동을 바라나시 녹야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많은 제자들이 따르게 되었다. 또한 입적하기까지 45년 동안 주로 마가다 국과 코살라 국을 중심으로 중인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했다. 80세에 쿠시나가라로 가는 길에 병을 얻어 열반에 들었다.

우리가 석가모니라고 칭할 때 석가는 북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라 불리는 한 부족의 대표 성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석가모니를 말할 때 가장 일반적인 것이 '붓다'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이를 음사하여 '불타'(佛陀)라 하고, 더 약칭하여 ''()이라고도 부른다. 불교 특유의 용어로서 붓다는 '깨달은 자'를 뜻한다. 인도는 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을 때, 화장(火葬)하여 묘를 만든다. 그런 묘 형식을 우리는 이라고 부른다. 탑은 스투파(stupa)를 음역하여 솔도파, 탑파로 줄이게 되었고 현재 이라고 부른다.

청주는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 塔坪里 七層石塔)이 있는 등 한국 석탑의 1번지를 과시하고 있다.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은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 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 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 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됐다.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있어, 일제당시 보수하면서 일부 변형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국보 제197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

 


국보 제197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번지)은 청계산 중턱의 청룡사에 자리한 탑으로,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다.

태조 3(1394)에 완성을 보게 된 이 탑은 양식상 종모양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안되는 탑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 탑 가득히 새겨진 조각과 둥글게 부풀린 외형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탑신의 기둥과 지붕의 곡선, 그리고 지붕 귀퉁이의 용머리조각 등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엿볼 수 있어 당시의 건축과 비교해 감상할 만하다.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해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해 높은 명성을 떨쳤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73세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자, 왕은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정혜원륭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했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바닥돌 위에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을 얹어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신(塔身)을 완성했다.

 


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 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 무늬를, 윗 받침돌에는 솟은 연꽃 무늬를 새겼다.

가운데 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신장상(神將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으며, 그 사이마다 새겨진 기둥에는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 높이 들려있는 바,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살아난 듯하다.

태조 3(1394)에 완성을 보게 된 이 탑은 양식상 종모양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안되는 탑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특히 탑 가득히 새겨진 조각과 둥글게 부풀린 외형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탑신의 기둥과 지붕의 곡선, 그리고 지붕 귀퉁이의 용머리 조각 등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엿볼 수 있어 당시의 건축과 비교해 감상할 만하다.

 

보물 제95호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忠州 彌勒里 五層石塔)

 

보물 제95호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忠州 彌勒里 五層石塔,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6)도 유명하다.

이 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석굴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쪽에 석등과 더불어 이 석탑이 남아 있다.

기단 하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특별하게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윗돌이 올려져 있다. 탑신(塔身)1층 지붕돌이 2장일 뿐 몸돌이나 다른 지붕돌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몸돌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기둥을 모서리에 새겼다. 지붕돌은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을 손상시키고 있다.

지붕 밑면의 받침은 5단이지만 추녀가 짧아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수평이고 지붕돌의 경사는 매우 급하며. 귀퉁이의 치켜올림은 거의 없는 편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다.

노반은 6층 지붕돌로 보일 만큼 큼직하고, 복발은 반원 모양이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중심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긴 쇠꼬챙이모양의 찰간(擦竿)이 남아있다.

5단의 지붕돌 밑면 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忠州 創洞里 五層石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忠州 創洞里 五層石塔, 충북 충주시 청금로 112-6(중앙탑면))도 빼어난 걸작이다.

중원탑평리칠층석탑(국보 제6)에서 남쪽으로 2쯤 되는 지점에 자리한 5층 석탑으로, 원래는 민가의 뒷뜰에 있던 것을 100m 남쪽으로 옮겨 복원해 놓은 것이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은, 섬세한 조각은 볼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구성이 간략화되고 대범해 고려인의 기상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며, 현재 맨 위의 머리장식이 없어진 채 그 받침돌만 남아 있다.

위로 오를수록 조금씩 규모가 줄어드는 탑신의 각 몸돌에는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과 몸돌은 각기 다른 돌로 조성되어 있는 바, 5층에서만은 한 돌로 되어 있어 흥미롭다.

지붕은 네 귀퉁이가 부드럽게 치켜 올라갔고, 위로 올라갈수록 밑면의 받침수가 줄어드는 특징을 보인다.

이 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기단 위에 두툼한 괴임돌을 끼워 탑신의 1층 몸돌을 받치고 있는 것과 각 층 지붕돌 위에도 비슷한 괴임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장식이 거의 없는 탑신에 작은 변화를 주고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충주 미륵대원지 삼층석탑(忠州 彌勒大院址 三層石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충주 미륵대원지 삼층석탑(忠州 彌勒大院址 三層石塔,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63번지)은 대체로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을 갖추었다.

석굴이 있는 미륵사터 경내에서 동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이곳이 원래의 터로 추정되는데 절터와 멀리 떨어진 곳에 왜 탑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하여 2층 몸돌의 높이가 많이 줄어들었고,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시대가 고려로 내려옴으로 인해 지붕돌 밑면받침 수가 4단으로 줄어드는 등 후대의 양식이 나타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충주 단호사 삼층석탑(忠州 丹湖寺 三層石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충주 단호사 삼층석탑(忠州 丹湖寺 三層石塔, 충북 충주시 충원대로 201(단월동))은 단호사 대웅전 앞뜰에 자리한 석탑이다.

충주 지방의 탑들이 대개 산 위에 놓여 있는 것에 비해, 이 탑은 평지에 서 있어 눈길을 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격식을 충실히 갖춘 안정감이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터로 보이며, 1층 기단(基壇) 위에 탑신부(塔身部)가 놓여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는데, 일부가 약가 부서져 있다.

탑신부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1층 몸돌은 제법 높직하며, 4층 몸돌의 일부로 보이는 석재가 놓여 있어 5층탑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각 지붕돌은 두껍고 투박한 모습으로 경사면이 급하게 처리되었고,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5호 충주 추평리 삼층석탑(忠州 楸坪里 三層石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5호 충주 추평리 삼층석탑(忠州 楸坪里 三層石塔, 충북 충주시 엄정면 추평리 576-6번지)은 추평리(楸坪里) 탑평(塔坪)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충주 추평리삼층석탑은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고려시대에 건조된 일반형 석탑으로, 주변 일대에서 수습되는 자기(磁器)와 와편(瓦片)으로 보아 고려조에 번창했던 사찰(寺刹)로 추정된다.

탑신(塔身)의 우주(隅柱)표현, 전각(轉角)의 반전으로 보아 신라시대 양식을 이어 받으면서 다소 변형된 고려 초기 탑의 양식을 고찰할 수 있는 석탑으로 보존 가치가 높다.

탑 주변의 경작지와 인근 민가 일대까지 주초석과 많은 기와들이 나오고 있다. 또한 추평리사지의 암자로 추정되는 뒤쪽 8부 능선상에도 많은 기와가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사명(寺名)은 밝혀진 바 없으나 자기(磁器)와 고려시대 와편(瓦片)들이 상당량 출토되고 있어 고려시대 전반기인 11세기경 축조된 탑으로 추정된다.

이 주변 사지(寺址)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엄정사(嚴政寺)’일 가능성이 크나 현재로선 확인할 수는 없다. 절터는 3층석탑이 있는 주변과 인근 민가 일대까지 포함되는 약 3,000평 규모로 추정된다.

단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갖춘 일반형석탑(一般型石塔)’으로 2매로 조립된 갑석(甲石) 위에 초층 탑신이 안정감있게 올려지고 탑신의 양쪽에 우주(隅柱)가 정연하게 모각(模刻)됐다. 낙수면은 급하며 옥개(屋蓋)에는 전각(轉角)의 반전이 있으며 탑신 괴임은 생략됐다.

옥개의 양쪽 끝에는 풍경원공의 흔적이 또렷하고 층급 받침은 모두 4단이다. 상륜부에는 복발(覆鉢)로 보이는 부재(部材)가 남아 있다.

탑은 단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갖춘 일반형의 석탑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3층까지 남아 있다. 탑 주변에서 토기편 외에 수막새기와, 백자발 등 다량의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5호 충주 원평리 삼층석탑(忠州 院坪里 三層石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5호 충주 원평리 삼층석탑(忠州 院坪里 三層石塔, 충북 충주시 신니면 원평리 108-1번지)은 유래가 아주 깊다.

6세기 전반기인 신라 법흥왕때 창건한 선조사(宣朝寺)’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병자호란때 소실된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이곳 마을 이름은 미륵댕이로 예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옥개석의 낙수면 전각(轉角)의 경쾌함과 탑신의 단아함 등에서 볼 때 신라 석탑 양식을 따른 고려시대의 수작(秀作)으로 기단 면석에 부조한 향로와 탑신에 사자(獅子)의 형상으로 여겨지는 조식은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양식이다.

탑신괴임을 마련하고 옥개석 추녀의 시원스런 표현 등 신라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 면석 및 탑신에 조형된 향로와 동물상은 희귀한 예이며, 신라 석탑 양식을 잘 따른 고려시대의 수작(秀作)으로 고려시대 탑파 양식의 변화와 관련된 연구자료로 가치가 크다.

네모꼴의 자연석 위에 기단을 조성했고, 기단의 남북 면석에 우주를 표현했다. 기단면에는 세발 향로와 우주가 표현됐고, 1층 탑신에는 네 면에 사자상(獅子像)으로 여겨지는 동물상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3단이며 추녀의 모습이 단아하고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으며 3층 옥개석은 현재 없다.

1층 탑신 가운데에는 뒷발을 딛고 선 사자 모양이, 기단부의 남북면 중앙에는 높이 60cm 크기의 세발 향로가 각각 양각됐다.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4호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승탑(忠州 靑龍寺址 石鍾形僧塔)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4호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승탑(忠州 靑龍寺址 石鍾形僧塔, 충북 충주시 바깥오량길 28-2 (소태면))은 정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각형 괴임대가 새겨진 하댓거을 놓고 호감암의 석종형 탑신을 올렸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모양으로 조각해 정상부에 3단의 돌출부부을 조식했다.

탑신부 가운데에 부도의 주인공을 새겨놓았는데 '寂雲堂舍利塔(적운당사리탑)'으로 보여진다.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6호 충주 창룡사 다층청석탑(忠州 蒼龍寺 多層靑石塔)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6호 충주 창룡사 다층청석탑(忠州 蒼龍寺 多層靑石塔, 충북 충주시 고든골길 63-89(직동, 창룡사))은 높이 35센티미터의 화강암 탑신석 위에 9층의 점판암제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충주 지역에서는 다른 예가 없으며 전국적으로도 몇 기 안되는 청석탑으로 규모는 작으나 공예품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평면 정사각형이며 초층 및 2층 옥개석 하면에는 연판문이 장식돼 있으며, 그 이상은 각형 층급 받침을 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