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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새만금, 문학스토리(Ariul Literature Srory)를 읽다

 

프롤로그

  청량한 바람은 맑고 청아해서 꿈길을 걷는 듯 행복한 새벽길을 펼쳐놓습니다. 하룻밤 한 치 두 치의 꼼꼼한 계산으로는 이룰 수 없는 생의 심연으로 가득합니다. 하얀 꿈 하얗게 사위어가면서 깊고 푸른 꿈 새만금에서 영글어갑니다. 불어난 계곡물은 가람을 에두르고 물이끼는 돌의 이마에서 한층 짙푸릅니다. 계곡의 청량한 바람은 맑고 청아해서 꿈길을 걷는 듯 행복한 새벽길을 펼쳐놓습니다. 

그대 행여! 시린 마음 달래려거든 아리울새만금으로 오세요. 허름한 가슴은 희뿌연 물안개에 보듬어 달라 하고, 상심 일랑 정한 물 속에 그대로 묻어두세요. 얼지 않은 바닷물이 소르르 물안개를 피워내고 수천 개의 향불에서 피워낸 연기처럼 강물의 늦겨울, 때이른 봄 안개는 아련하기만 합니다.

 서리꽃이 감싸고 있는 물안개 가득한 저 바다는 선경(仙境) 그 자체. 발소리에 놀라 꿈속 같은 풍경이 걷힐까 아리울새만금의 꽃향기에 취한 발걸음 다독이며 조심스레 다가서고 있습니다 선잠을 깬 눈을 부비면서 서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다는 뽀얀 안개를 휘감은 채 고요 속으로 침잠하고 있는군요. 해무입니다. 비가 그쳤지만 이젠 안개입니다. 안개와 바다, 해무는 몽환적이고 탈속적인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우며, 아름다우나 영원히 머물 수 없는 공간은 아닐런지요.

일찍이 청렴하기로 소문난 암행어사 박문수는 부안을 물고기, 소금, 땔나무가 풍부해 부모 봉양하기에 좋으니 생거부안(生居扶安)’ 이로구나하고 격찬했습니다. 때문은 아직까지 '생거부안'이란 타이틀을 명함 삼아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으며, , , 바다 등 3박자 골고루 갖춰진 천혜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아리울새만금은 새만금 일대를 소재로 한 임영춘의 갯들’, ‘들판’, 채만식의 탁류’, 조정래의 아리랑’, 조헌용의 파도는 잠들지 않는다’, 봉래산 기행시, 신석정, 그리고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거명되는 고은 등 문학을 스토리텔링화해 세계적 문학 공원을 조성하는 한편 매년 새만금국제도서전을 개최하고 걷기답사 행사를 개최하는 행사를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더욱이 탄생설화가 있는 한국한문학의 시조 최치원 관련 설화 등이 군산 일대 등에 자리해, 대중국과의 관광객 유치를 염두해두고 사업을 추진해야 마땅한데, 이같은 자료들이 모아져 소개되지 않아 참으로 아쉬워 블로거가 답사는 물론자료 연구 등을 거쳐 처음으로 새만금 문학 전반을 소개하며, 나름의 활성화 방안도 다뤄봅니다.

 

 

아리울’, 문학의 원류를 찾는다

 

1.새만금이 자리한 전북의 문학적 토양

 

 

 

표암 강세황(1713~1791)18세기 부안을 배경으로 남긴 유일한 실경산수화인 우금암도(미국LA 카운티미술관 소장)’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눈길을 끈 적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된 우금암도는 강세황이 아들 완이 부안현감으로 재임(1770.8~1772.1)하던 당시 이틀에 걸쳐 부안의 변산 일대를 유람하며 그린 산수화입니다.

우금암도(禹金巖圖, 지본수묵, 25.4×267.34)’는 그의 아들 완이 부안현감으로 재임할 시기, 강세황이 그린 실경산수로, 강세황이 그림과 함께 적은 글은 표암유고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에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변산 특유의 암산(巖山)의 분위기를 굵은 갈필(渴筆)로 표현, 명승지를 지나며 빠른 필치로 각 장소의 특징을 사생한 작품으로, 당시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지역이 금강산이 아닌, 전북 부안 일대를 그린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강세황은 진경산수는 그곳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속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그림이라 생각했고, 그런 면에서 시보다는 기행문이, 기행문보다는 그림이 낫다고 믿었습니다. , 겸재 정선(1676~1759)이 금강산을 현장의 구별 없이 일률적인 기법으로 그려냈음을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화법에 얽매이지 않고 현장을 꾸밈없이 그대로 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같은 측면에서 우금암도에서 보이는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구도와 묘사는 그러한 강세황의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세황이 영조의 당부를 듣고 절필을 선언했던 기간 중에 그려진 작품이면서, 금강산처럼 즐겨 그리던 지역이 아닌 전북 부안 일대를 유람하며 남긴 유일한 실경산수화라는 점에서 눈길을 끕니다. 특히 아들 완이 부안현감으로 재임한 시기를 고려해 보면, 17702월 혹은 이듬해 2월에 여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설명입니다.

 

                                  

 

그림의 구성은 이동 경로에 따라 우금암(禹金巖)문현(文懸)실상사(實相寺)용추(龍湫)극락암(極樂庵)으로 이루어졌지만 우금암과 문현 사이의 장면은 지명이 적혀 있지 않아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우며, 극락암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주변 기록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장소입니다.

 변산 특유의 암산(巖山)의 분위기를 굵은 갈필(渴筆)로 표현하였고, 특히 직각으로 가늘게 쪼개진 벽의 무늬가 마치 비단과 같다고 기록한 우금암에 깊은 인상을 받아 묘사에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금암은 부안 상서면 감교리에 위치한 우금산(329m)의 정상부를 이루는 바위로 그 아래에는 천년 고찰 개암사가 있습니다.

 

 

 

 새만금이 자리한 전북을 연고로 하는 가장 오랜 된 작품 <정읍사(井邑詞)>는 문향 전북의 숙명과 아름다운 인연의 역사를 미리 보여준 작품입니다.

 먼 밤하늘의 달님을 향해 더 높이 돋아 더 멀리 비추시라, 먼 곳에 계신 내 님 가는 길 험하게 저물까 두려워라말하는 백제 아낙의 그윽한 비나리는 을 향한 염려가 빚은 동일시, 그리고 상징적 투사(投射)와 반영(反映)이라는 순도 높은 문학적 삼투압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가 하면 이 땅은 <서동요>의 작자 백제 무왕을 낳기도 했습니다. 노래를 통해 가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을 보여준 <서동요>의 재기발랄함과 작품에 담긴 유장한 해학성은 분명코 지금 익산 삼기 민요의 근원과 맞닿아 있으리라.

 이 땅의 문명을 빛낸 판소리계 소설들과 구비전승의 유현한 흐름들최치원, 정극인, 소세양, 이병기, 신석정, 김해강, 이근영, 채만식 등 이미 고인이 된 어른들의 이름을 그렇게 기억하자. 그들이 부른 삶의 노래로 충만한 공간이 바로 이곳 전북입니다.

 해방 전후 이 땅에 태를 묻고 문학 활동을 시작한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한다는 것 자체가 숨가쁜 일입니다.

서정주, 고은, 최일남을 필두로 하여 천이두, 최형, 최승범, 이기반, 채규판, 허소라, 이운용, 정렬, 정양, 이광웅, 강인한, 이시연, 박종수, 임영춘, 박정만, 이가림. 윤흥길, 박범신, 최명희, 김용택, 강상기, 심호택, 진동규, 이병천, 박두규, 최인석, 장형규, 양귀자, 은희경, 신경숙, 남진우, 배봉기, 곽병창, 김정수, 유하, 유용주, 이용범, 복효근, 장철문, 이봉명, 김유석, 김종록, 문병학, 이병초, 김병용, 김종필, 유강희, 박성우, 백가흠, 이재웅, 최기우, 김경주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인들이 여기에서 나고 공부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전주사범이나 남성고, 전북대, 원광대 등지에서 제 각기 개성어린 학창 시절을 보내며 문학의 꿈을 담금질한 이들도 있고, 지리산과 덕유산, 금강과 섬진강, 동학과 6.25를 교과서 삼아 문학 수련기를 보낸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곳 전북을 새로운 문학적 고향으로 알고 이주해와 전북의 문학사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준 문인들이 있습니다. 학업을 위해 전주를 찾았다가 아예 여기 터를 내린 박남준, 안도현 등의 경우나 직장을 찾아 이주해온 이동주, 박봉우, 서정인, 정영길, 이희중, 강연호 등이 그러합니다.

 또, 이곳에서 오롯히 문학적 수련기를 보낸 이들이 있다. <금강>을 쓴 민족시인 신동엽은 전주사범에서 수학하였고, 1980년대 민족문학 진영의 신예 맹장이었던 정도상, 오봉옥의 문학은 전주, 전북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발아하고 성장했습니다. 이뿐인가, <녹두장군>을 쓰기 위해 전북의 산하를 누비고 다녔던 송기숙이나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 <>을 쓴 윤정모 등에게 전북은 단순한 작품 배경지 그 이상의 문학적 영감과 풍부한 취재담을 아낌없이 제공했습니다.

 

 

새만금 문학의 원류를 찾아서:이서구의 예언과 새만금을 묘사 한 문학 작품

 

A.전라감사 이서구, 새만금을 예언하다

 

 

 

 전라감사를 2번 역임한 이서구(李書九, 1754~ 1825). 그는 전라도에 40대 초반과 60대 후반에 걸쳐 관찰사로 2번이나 부임했던 인물인데, 오늘날까지도 전라도 여러 지역에는 그가 남긴 전설과 설화들이 회자되어 옵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수많은 전라감사가 다녀갔지만 이서구처럼 흥미진진한 예언을 남긴 인물은 없습니다.

 전주에 가면 한벽루(寒碧樓)가 있습니다. 밑으로는 냇물이 흐르는 층암절벽에 자리 잡은 풍광 좋은 정자입니다. 어느 날 이서구는 이 한벽루에 와서 경치를 감상하다가 "앞으로 는 이 한벽루 옆으로 불말(火馬)이 지나다닐 것이다"라고 예언합니다. 왜정 때에 과연 굴이 뚫리면서 기차가 지나 다니게 됐습니다.

 남원 광한루에는 해태상이 있는데, 원래는 이 해태가 남원 삼거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서구가 감사 시절에 남원에 와 보고는 "남원에 불이 많이 나는 이유는 견두산(犬頭山)이 호랑이 형국을 하고 있어서입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삼거리에 해태상을 세워놓고, 산 이름을 개 견()자를 써서 견두산으로 해라"는 지시를 합니다. 원래 산이름은 호두산(虎頭山)이었는데, 이서구가 현재의 견두산으로 바꾼 것입니다.

 전라도 지역에는 이서구와 관련된 이러한 유의 설화들이 수십 종류가 전해져 옵니다. 그렇다면 새만금과 관련하여 이서구가 남긴 예언이 있나요?

수저(水低) 30장이요, 지고(地高) 30장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관련됩니다.

 변산 앞 바다 쪽의 바닷물이 30장 밑으로 내려가고 해저의 땅이 30장 위로 올라온다는 예언입니다. 30장이면 대략 90미터에 해당합니다. 바닷물이 90미터 내려가고 땅이 90미터 위로 올라오면 어떻게 되는가요? 이는 지각변동을 의미합니다.

서해안이 결국 융기하면서 상당부분이 육지가 된다는 예언이다. 새만금이 조성된 변산 앞바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예언에 비추어 볼 것 같으면 서해안의 바다 밑에서는 지금 지각변동이 진행중인데, 그 와중에 새만금이라고 하는 간척사업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져 그 지각변동을 부분적으로 앞당긴 셈이 됩니다. 서해안 융기는 옛날부터 여러 이인(異人)들이 쭉 해왔던 말이고, 근래에는 탄허(呑虛, 1913-1983) 스님도 자주 했던 말입니다.

 

1.기억의 프리즘이 낳은 새만금 민족지:임영춘의 갯들

 

[개설]

 

임영춘의 갯들에는 일제의 수탈정책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일제는 갯벌을 메워 농민을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우리나라 땅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이 사실을 잘 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간척지 사업에 몰려들게 됩니다. 이 소설의 무대인 갯들에서 성장한 작가는 본인의 체험과 4년여에 걸친 자료 수집을 통해, 일제강점기 간척지시대의 농지 만경벌에서 농노로 입주한 700세대 집단 촌민의 혹사당하는 삶을 속속들이 밝혀서 그려냈습니다.

   

[구성]

 

전체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 이민촌, 2장 조수로 모여든 사람들, 3장 향수의 방조제, 4장 섬진강 젖줄, 5장 지배자의 눈동자, 6장 춘하추동, 7장 풍속도, 8장 반항의 계절, 9장 상록학원, 10장 순국의 그림자, 11장 질식의 나날, 12장 해방의 메아리 순입니다.

   

[내용]

 

 

주인공 1931년부터 해방되던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부모와 같이 간척지로 이주해서 살게 됩니다. 호남의 동진강 하류 간척지인 김제 광활면은 갯벌을 개간하여 이민을 받아 조성된 지역입니다. ‘동척이민[동양척식주식회사가 펼친 일본 소작인들의 조선 이민 지원정책]’이 조선 농민들의 강한 반발로 어려움에 직면하자, 일제는 주인 없는 갯벌을 메워 농민을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합니다. 불이농장(不二農場)[일본이 식민지 수탈을 위해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산하기관]도 갯벌을 막아 만들었는데, 돈도 주고 먹을 것도 주며, 여기에 간척이 완공되면 땅까지 준다는 말에 전국에서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1923년 완공된 불이농장은 옥구저수지를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조선인이, 북쪽으로는 일본 이민자들이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당시 일제는 손바닥 검사[손에 괭이가 박히도록 일을 많이 한 사람]’ 등 신체검사를 통해 소처럼 일할 수 있는 소작인을 모집합니다. 그들에게 제공된 것은 바람도 막을 수 없는 움막이 전부였으며,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먹고 자고 일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일제는 일본에서 직접 한국으로 오는 농민을 모집하기 위해 신천지, 이상향, 모범적 농촌건설을 내세우고 대대적인 선전을 합니다. 그들은 조립식 건물, 학교, 목욕탕, 신사, 그리고 저렴한 대출상환조건 등 각종 지원을 약속합니다. 이렇게 일본 농민들을 모집한 후, 일제는 농업교육뿐만 아니라 수기, 교련, 무도, 유도, 총검술 교육까지 의무화시킵니다. 즉 농업이민정책이라는 속임수를 쓰면서 식민지 건설의 전초기지를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특징]

 

임영춘은 장편소설 갯들을 통해 새만금의 한 자락, 김제 만경의 과거를 되짚어 개인의 기억을 민족의 역사로 형상화시켰습니다. 아직도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규명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 시점에서 과거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저질렀던 야만적 행위를 가능한 한 완벽하게 재현하려했던 소설가의 의지는, 잊혀져가고 있는 제국주의의 폭력에 대응하는 대항서사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의의와 평가]

 

임영춘은 1986년 어머니 서귀인이 별세하기까지 고향을 떠나지 않았던 김제시 광활면 사람입니다. 일제강점기 어린 시절에 겪었던 쓰라린 고통과 당시 농민들이 겪은 혹독한 역경과 불굴의 의지를 그려내어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갯들은 일제강점기의 모든 사건을 거침없이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는 데 의의가 큽니다. 고발정신이 투철한 작가를 통한 새로운 문화적 응전입니다. 새만금의 과거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아픈 기억을 함께 하고, 우리 민족만이 안고 있는 뼈아픈 상처를 치유하면서 동시에 내셔널리즘의 폭력성을 잠재우는 방법을 모색하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2.새만금방조제 이야기:임영춘의 들판

 

[개설]

 

 

 1987~1988년 임영춘이 전라북도 김제를 배경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의 수난사를 그린 장편소설을 아십니까. 임영춘이 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을 고발하는 작품의 시작은 갯들에서부터입니다. 들판갯들에 이어서 미처 토로하지 못했던 민족의 아픔을 다시 덧붙여 써놓은 작품으로, 이를 통해 작가는 처절했던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구성]

이는 ·하로 분책이 되었고, 594쪽으로 첫 번째 작품 갯들보다 분량이 늘어났습니다. 상권 304쪽은 1987년에 썼고, 하권 290쪽은 1988년에 증보했습니다.

 들판은 거의 실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본인 후쿠이 게키는 군의 요직에 있었던 일본의 최우수 두뇌파였고 후일 조선총독과 일본 수상을 역임한 고이소와 동기입니다.

 그가 군직을 버리고 간척지 사업에 투신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새만금 사업과 연관지어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이 작품에는 당시 농민들이 얼마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처절하게 살았던가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내용]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농민들은 노예 노동이라도 해야만 했습니다. 농민들은 오직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무조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오른손으로 모내기를 하다가도 피고름이 쏟아지면 왼손으로 바꿔서 할 만큼 일을 했습니다. 곪은 손이 아려서 밤새 잠을 못 자는 부인네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아침에는 곪은 손을 남편이 짜주고 다시 헝겊으로 매고 일터로 나왔고, 타작마당에서 바짓가랑이에 묻혀온 벼 알을 털어 식량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한겨울에도 방파제를 쌓기 위한 노동에 동원된 농민들은 홑옷바람으로 돌을 지어 나르면서 추위에 떨기도 했습니다.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고된 일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힘에 부쳐서 마침내 하나둘 쓰러져가고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은 개구리와 뱀이 썩은 도랑물을 먹고 죽어갔습니다.

 

[특징]

 

작가는 치열한 고발정신으로 이 작품을 쓰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 앞서 써졌던 갯들에서 미처 못 다한 말들을 처절하게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일제 침략의 실제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사실적인 내용을 통해서 비소설적인 요소가 소설 구성상의 미학을 압도한 생생하고도 절박한 기록문학으로서의 특징이 강합니다.

  

[의의와 평가]

 

작품은 현장성을 강조한 사실적인 내용이 소설 구성상의 미학을 압도한 생생하고도 절박한 기록문학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농토는 농민들의 생명의 근원이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대상이 아닌 혼이 담긴 삶의 터전이었던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현실 비판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서해안 간척지 갯들을 중심으로 전 국토의 들판이 당하는 수난을 통해서 민족 수난사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제가 야비하게 전략을 세우고 우리 민족을 수탈하는 장면, 마침내 방조제를 쌓는 노예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노예시장으로 팔려갈 수밖에 없었던 흑인의 수난사를 보게 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일제의 지독한 횡포를 견뎌야 했던 이 민족의 아픔을 그렸다고 하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3.새만금과 최치원 탄생 설화

 

최치원과 내초도 금돈시굴(金豚始窟)

 경주 최씨의 시조로 신라 말엽의 대석학인 고운 최치원을 든다. 최치원은 그 높은 학문이 이 나라는 물론 멀리 중국까지 널이 알려진 성리학자일뿐 아니라 동방 문학의 시초를 이룬 문호로도 이름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 최치원은 기이한 전설을 남기고 있습니다.

 원래 경주 최씨의 시조는 금빛나는 금돈에서 낳았다 하여 일명 '돼지 최씨'라고 불리어 오는데 이것은 단군이 곰에서 낳았다는 전설과 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박속에서 낳았다는 우리 전래의 민족설화와 함께 이 경주 최씨에 관한 것도 중요한 민족설화의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 설화가 지금은 행정상으로 군산시에 속해 있는 고군산열도(古君山列島)의 하나인 내초도(內草島)와 연관지어져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하루는 내초도란 섬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누런 황돼지한테 붙들려 바위밑 토굴로 끌려가서 몇 달 동안을 사는 동안에 황돼지에 태기가 있어 열달 후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점점 자라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육지로 나오려고 해도 못나오고 황돼지와 같이 짐승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어미 돼지가 이웃 섬으로 사냥을 나가고 없는새에 다섯살 난 아들에게 아버지는 사실 이야기를 다하면서 치원이 너를 육지로 데리고 나가 공부를 시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빠져나갈 재주가 없다고 한탄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은 어미돼지가 날마다 해다 놓은 나무토막으로 몰래 배를 엮어서 만들어 타고 나가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날 돼지가 또 산에 나무를 하러 나간 사이에 나무를 발처럼 엮은 뗏목을 타고 육지로 나오는데 어느새 어미돼지가 알고서 헤엄을 쳐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금새 앞발이 배에 닿을 듯하자 아들이 미리 잘라서 실어 놓은 나무토막 하나를 던져주었습니다.

욕심이 많은 돼지는 나무토막이 떠내려 갈까봐 아까와서 얼른 물어다가 섬에다 갔다두고 또 쫓아오자 아들은 계속 나무토막을 던져주어 끝내는 어미 황돼지가 기진맥진해서 죽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육지에 당도한 아들은 머리가 총명하여 아버지의 가르침에 열심히 공부해서 뒷날에 훌륭한 인물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경주 최씨의 시조요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설화에 의해서 군산시 일대에 경주 최씨는 금돼지의 자손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내초도에는 금돈시굴이라는 굴이 아직도 그 흔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주 최씨가 금돈시굴에서 낳았다는 전설상의 최치원은 바로 내초도안에 아직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금돈시굴이 출생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최치원은 전설상으로만 전해지는 인물은 물론 아닙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그의 뛰어난 사적을 정사에 담고 있고 또 그만한 출중한 인물이기에 그만한 전설상의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다만, 그의 출생이 오늘날에 와서 믿어질 수 없는 금돼지에서 낳았다는 것인데 이것이 내초도에 있는 금돈시굴과 묘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데 비상한 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군산지방의 인근인 옥구 일대는 최치원과 얽힌 사연을 여러 가지 문헌상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최치원, 문화재 자천대를 남기다

 

 

 

 지금의 군산시 상평마을에 있는 자천대(紫泉臺)가 바로 그것입니다. 옥구구지(沃溝舊誌)에 나타난 이 자천대는 최치원이 일찍 당나라에서 큰 벼슬과 학문을 닦고 나라에 돌아왔을 때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민심이 흉흉하자 그 홀로 이 자천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독서삼매로 시름을 달랬습니다.

애당초 이 자천대는 군산의 현 비행장 안에 있었던 것을 상평마을에 옳겼다는 것으로 원자천대(元紫泉臺) 부근에 곧고 매끄러운 암석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욱과 먹을 갈았던 흔적이 남아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다.

 한편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6호 자천대(紫泉臺, 전북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626)는 원래 옥구군 선연리의 동산에 있었으나, 일제시대 후기 군용비행장 안으로 편입되자 이를 상평마을로 옮기고 경현재라 하였다가 1967년 다시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세상의 인심이 어지럽고 어수선하자, 자천대에 올라 책을 읽으며 근심과 걱정을 달랬다고 합니다. 건물은 앞면 3·옆면 1칸 규모의 2층 누각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여러 가지 색으로 된 무늬를 곱게 칠해 놓았습니다.

 자천대는 원래 옥구군 선연리의 동산에 있었는데, 일제말기에 군용비행장 기지로 편입되자 당시 옥구 유림에서 발의하여 이를 옥구향교 경내에 옮기고 경현재(景賢齋)라 하였다가 1967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자천대는 서해안에 위치하며, 지형은 넓고 평평하며, 샘과 돌이 가히 즐길만 하다. 세상이 전하기는 최치원이 놀던 곳이라 한다" 하여, 자천대의 위치와 유래를 적고 있습니다.

 건물은 원주형의 초석을 사용해서 지은 2층 누각으로서, 2층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대고, 원주위에 가구(架構)된 공포는 주심포와 익공식의 절충식으로서 곱게 단청되어 있습니다.

옥구구지에는 또 그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고을의 태수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이보다 더 큰 벼슬이 내렸어도 그는 이를 사양하고 이곳 태수만을 지냈다고 합니다. 아무튼 최치원과 옥구땅은 이러한 일련의 전설을 통해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내초도의 금돈시굴에서 최치원이 낳았다는 설화를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4.봉래산 기행시(변산)

 

1.'허생전(許生傳)'에 나오는 변산

 

 

 조선 후기의 문인 박지원(朴趾源1754~1821)이 지은 한문소설.열하일기옥갑야화 玉匣夜話에 수록되어 전합니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청구야담을 비롯한 야담집에서도 발견되는데, 작자는 기존의 야담을 소재로 하면서 자신의 입장과 시각을 반영하여 이 작품을 썼습니다.

 남산 기슭에 사는 허생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독서로 세월을 보내는 선비였습니다. 아내는 더이상 가난을 견디지 못해 허생에게 책만 읽어 무엇하느냐고 하며 장사를 못하면 도둑질이라도 못하느냐고 대듭니다. 허생은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장안의 부자 변씨를 찾아가 돈 1만 냥을 빌어 장사를 시작합니다. 과일과 말총 등을 도거리하여 많은 돈을 번 허생은 변산 근처의 도적떼들을 이끌고 섬으로 가서 평화스럽고 부유한 세상을 만들어주고, 전국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 다음 서울로 돌아옵니다.

 그는 변씨에게 자신의 남은 돈 10만 냥을 모두 넘겨 주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과 옷감을 받아 예전처럼 독서에 몰두합니다. 허생의 비범함을 알게 된 변씨는 그를 어영대장 이완에게 소개합니다. 이완은 허생을 찾아와 북벌에 관한 계책을 듣고자 하나 도리어 허생으로부터 북벌론이 비현실적이라는 꾸지람을 듣고 물러납니다. 그후에 그를 다시 찾았으나 이미 허생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의 내용은 크게 2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반부는 허생이란 인물의 비범함을 보이는 부분으로서 후반부를 예비하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허생을 통해 당대의 사회와 정치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로서의 흥미와 함께 작자의 실학사상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독서하는 선비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공리공론의 벽에 가두어두지 말고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경영에 사용할 것을 제안하면서, 사회적으로 천시하던 상업에 관심을 가져 상품의 유통과 물물교환의 가치를 인식할 것, 국내에서만 맴돌 것이 아니라 관심을 국외로 돌릴 것 등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에 분명합니다.

 

 

2.남사고의 십승지지(十勝之地)’ 변산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조선 명종 때 이름이 높았던 예언가이다.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그는 역학, 풍수, 천문, 복서, 관상 등에 능하여 관상감에서 종6품 벼슬인 천문교수(天文敎授)를 지냈습니다.

 

 

 그는 1575(선조8)의 동서분당을 예언하였고, '임진년에 백마 탄 사람이 남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과연 가토오키요마사(加藤靑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와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고향인 울진의 불영사에서 신승(神僧)을 만나 비결을 전수받고 전국의 명산을 둘러보았다 하는데 그가 남긴 글인 <남사고비결>, <남격암십승지론><정감록>에 수록되어 전합니다.

 

그는 어지러운 전란기에 난을 피해 살만한 곳으로 <남격암십승지론>에 다음 열 곳을 꼽았습니다.

 

공주(公州)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무주(茂州)의 무풍(茂豊)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부안(扶安)의 변산(邊山)

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

봉화(奉化)의 춘양(春陽)

예천(醴川)의 금당곡(金唐谷)

영월(寧越)의 정동상류(正東上流)

운봉(雲峰)의 두류산(頭流山)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이 열 곳을 '십승지지'라 하면서, 변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扶安 壺岩之下 邊山之東 藏身最奇 然耽羅作異地則不可

 (부안 호암 아래 변산의 동쪽은 몸을 숨기기에 가장 적당하다. 그러나 탐라가 다른 나라 땅이 되면 불가하다.)

 

 여기서 호암을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현재 호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병처럼 생긴 바위일 것으로 생각하여 개암사 뒤 울금바위가 호암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고, 보안면 우동 저수지 위에 있는 우반이굴이 있는 굴바위가 호암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3.원효방에서 이어진 변산의 차()문화(고려조의 문호 이규보와 허균)

 

 

부안 개암사 뒷산이 이고 있는 울금바위에는 남, , 서 세 곳에 굴실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작은 북쪽의 굴실은 백제부흥전쟁 당시 군사들을 입히기 위해 베를 짰다 해서 베틀굴’, 가장 큰 서쪽의 굴실은 백제부흥전쟁 당시 복신이 거처한 굴이라 하여 복신굴이라 불리고 있습니다다.

 남쪽의 굴실은 바위절벽 중간에 있다. 지표면에서 20m나 되는 암벽 중간에 있어 사다리 없이는 도저히 오를 수가 없는 곳입니다. 굴실의 크기는 45평 정도로 세 곳의 굴실 중 가장 전망이 좋다. 이 굴실에서 바라보면 변산의 산들이 첩첩이 발아래 포개져 들어옵니다. 이곳이 신라의 고승 원효 대사(617~686)가 수도했다고 전해오는 원효방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가 이곳 원효방을 둘러보고 그의 저서 남행월일기에 기록을 남겼습니다.

 

부령 현령(扶寧縣令)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원효(元曉)가 와서 살자 사포(蛇包)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內室)과 외실(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 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에 참여할 뿐이라 한다...’

 

 위 내용으로 볼 때 원효방은 세 곳의 굴실 중 바위 중간쯤에 있어 사다리나 밧줄에 의지해야만 오를 수 있는 남향의 굴실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나왔다고 했는데 정작 이 굴실에는 샘이 없고, 샘은 복신이 거처했다는 서향의 굴실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신굴을 포함한 울금바위 전체를 원효의 수도처로 보아야 옳지 않을까요?

 어쨌든, 이 샘물은 바위틈에서 스며나와 바닥의 확독 만하게 파인 곳에 고이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부안사람들은 이 샘을 원효샘이라고 부르는데, 이규보의 기록처럼 맛이 젖과 같이 달므로 젖샘(유천 ; 乳泉)이라고도, 또 어떤 이들은 차 달이기에 좋은 물이라 하여 다천(茶泉)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 선조들은 품천(品泉)이라 해서 물맛의 우열을 매겼고, 차 달이는 물도 아무 물이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차의 성인(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草衣禪師 ; 1786~1866)차는 물의 신()이요, 물은 차의 몸()이니, 제대로 된 물이 아니면 그 신이 나타나지 않고, 제대로 된 차가 아니면 그 몸을 나타낼 수 없다, 다신전(茶神傳)품천(品泉)’ 항목에 기록했습니다.

 초의선사는 좋은 샘물의 덕목으로 가볍고, 맑고, 차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무색(無色), 무취(無臭), 무미(無味) 여덟 가지를 꼽았습니다. 이 중에 아름다운 물이란 우리 몸에 필요한 유기물(미네랄)을 잘 갖춘 물을 말하는데, 낙엽 등이 분해된 유기물은 주로 지표로부터 30~40cm 지하층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초의선사는 또 산 위의 샘물은 맑고 가벼우며 산 아래 샘물은 맑고 무겁다. 돌 사이에서 나는 샘물은 맑고 달며, 모래 속 샘물은 맑고 차가우며, 흙 속의 샘물은 담백하다. 흘러 움직이는 물이 고여 있는 물보다 나으며, 응달진 곳에서 나는 물이 양지의 물보다 좋다. 참된 근원의 물은 맛이 없으며, 참된 물은 향기가 없다고 이르고 있습니다.

 초의선사가 세운 차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대흥사 일지암의 샘물이 바로 이러한 덕목을 두루 갖춘 샘물로 젖샘(乳泉)이라고 합니다. 대흥사에서 열리는 초의문화제는 이 일지암의 물로 차를 달여 부처님께 바치는 헌공다례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물맛이 달고 젖과 같아 젖샘(乳泉)이라고, 또 차 달이기에 좋은 물이라 하여 다천(茶泉)이라고도 부르는 원효방의 샘물도 일지암의 샘물처럼 좋은 물의 덕목을 두루 갖추었는지..., 제대로 된 품평이 전해지지 않아 아쉬운 대목입니다.

 차()는 순천에서 나는 작설(雀舌)이 가장 좋고 변산의 것이 다음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규보의 남행월일기는 사포가 원효방의 샘물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여 원효에게 드렸다, 또 이규보가 방문했을 때에는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 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제부흥군이 주류성 전투에서 패해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해가 663년이니 원효대사가 변산에 머물렀던 시기는 그 직후가 될 것이고, 이규보가 전주목 사록 겸 서기(全州牧司錄兼書記)로 부임해 변산의 벌목 책임자로 왔을 때 원효방을 방문했으니 1199년의 일입니다. 일지암의 차 문화보다 천년 가까운 세월을 뛰어넘는 그 시대(원효대사~고려)에 이미 변산에는 차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지암은 차문화의 성지로 일컬어지고 있는 반면 변산의 차문화는 다인들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변산에 차밭이 없고(보안면의 차밭은 최근에 조성되었다.) 자생하는 차나무도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문헌에는 변산의 차맛이 좋다’, 원효방 근처에 차나무가 자생한다는 기록들이 보입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부안의 토공(土貢) 품목에는 호(; 여우가죽), (; 너구리가죽), 수달피(水獺皮 ; 수달가죽), 사어(沙魚 ; 상어), 천아(天鵝 ; 거위), 황모(黃毛 ; 족제비꼬리털), (; 자리)과 함께 차()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허균은 그의 저서 도문대작(屠門大嚼)()는 순천(順天)에서 나는 작설(雀舌)이 가장 좋고 변산(邊山)의 것이 다음이다고 기록합니다.

 허균은 부안과 인연이 깊은 사람입니다. 부안의 여류시인 이매창의 정인이었으며, 공주목사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보안 우반동 정사암에서 쉬었습니다. 이때 부안에서 생산되는 작설차를 맛보았기에 그런 품평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처럼 문헌 기록을 뒷받침 하듯 지금도 원효방에서 가까운 산기슭에는 야생 차나무가 5~6평 정도 무리지어 자라고 있습니다.

차나무가 그리 크지 않아 혹 누가 최근에 조성한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겠으나, 차를 재배하려면 그런 옹색한 곳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들이 민둥산이었음을, 또 주변의 나무들에게 부대끼며 자라는 야생의 차나무라면 성장 속도가 더딜 것임을 감안해 볼 때 근래에 조성한 차밭이 아님이 분명해 보입니다.

 차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운남성, 사천성)이라는 설과 인도(아샘 지방)라는 양설이 대립되어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왕후(許黃玉)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능화(李能和)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보면,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차종자라고 한다(金海 白月山有竹露茶 世傳首露王妃許氏 自印度 特來之茶種云)”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로왕비 허왕후(許黃玉)는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로서 부왕의 명을 받아 16세의 어린 나이에 수륙만리 이국의 수로왕에게 시집을 오게 됩니다. 그때 금··비단 등 많은 패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 차 씨앗도 함께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말미에는 차와 과일 등을 갖추어서 시조 수로왕릉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보입니다.

 백제는 어떤 경로로 차가 전래되었는지 직접적인 자료는 없으나 변산 원효방의 원효 대사와 백제의 중 사포에 얽힌 일화를 통해 차 문화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포가 원효에게 달여 드린 차가 신라에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백제에서 재배한 것인지 명확한 자료는 없습니다. 하지만 백제의 어느 땅에서 재배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그 이유로는 원효방이 백제 땅 깊숙한 곳에 있어 신라로부터 수송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신라의 옛 땅보다는 백제의 옛 땅에 차밭이 훨씬 더 많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려시대에도 원효방에 거처하는 어느 늙은 중은 차 생활을 했을 것이고, 그 차는 부안 땅에서 재배한 차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나 허균의 도문대작기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기후 조건이 알맞은 부안은 차 재배가 가능하며 현재에도 부안군 일대에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점은 위에서 살펴 본 바입니다.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 1888~1939)은 그의 다고사(茶故事)신라의 차는 당에서 들어왔고 일본의 차는 송에서 들어갔으니 비록 연대의 전후는 있으나 모두 불교를 따라 전래했었고, 또 불교를 따라 발달했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로 보면 불교가 성행했던 그 당시 고구려, 백제에도 당으로부터 차 종자의 전래가 없었을 리가 없다.

 고구려는 북쪽 추운 지방이므로 재배에 부적당하나 백제는 남쪽 따뜻한 지방인만큼 신라보다 오히려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 일찍 들어와 재배가 되었더라도 사실이 전하지 않는 이상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할 바다. 그러나 지리산을 중심으로 논할 때 신라의 옛 땅이었던 경상도 방면에 비하여 백제의 옛 땅이던 전라도 방면에 차 산출이 더 많다고 한다. 이는 백여 년 전에 된 여지승람에도 적혀 있거니와 금일에 이르도록 의연히 변함이 없다. 전라도는 지리산 외에도 모든 명산에 거의 차가 없는 곳이 없다고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망한 나라는 역사를 제대로 기록할 수 없습니다. 호암 선생도 자료 미비로 백제의 차 전래 사실을 밝힐 수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의 80%가 백제의 옛 땅에서 재배되고 있다는 사실 등으로 볼 때 백제의 차 전래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으며, 변산의 차 문화가 간접적으로나마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부안 다인들의 모임인 낭주다인회(회장 서영옥)’는 해마다 곡우 무렵에 그해 첫 수확한 차로 개암사 스님들과 함께 원효방에서 헌다례를 올리고 있습니다. 백제의 차 전래를 간접적으로나마 말해주고 있는 이곳 원효방에서 1,300여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차 문화가 이어진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4.‘매헌유고의 봉래산 기행시

 

 

고창출신의 고제구(高濟龜, 1858-1913)매헌유고(梅軒遺稿)’는 변산 일대의 명승과 고적을 노래한 16편의 한시가 소개됐습니다.

 

끝없는 사포의 풍경

백구에게 묻노라니 최고가 마땅하리

석 잔 술에 상쾌하고

9월의 유람은 여유롭네

드넓은 바닷물은 밀려왔다 밀려가고

골에 드리운 바다 안개는 걷히질 않네

강이 하늘에 닿으니 구름도 물빛인데

행여 먼 길 가는 나그네 걱정 돋울까<사포를 지나면서 읖다>’

 

 

고제구는 변산 봉래산을 일주일 여 동안 걸었습니다.

 

첫째날:사포-줄포-유천

둘째날:내소사

셋째날:격포

넷째날:채석강-적벽강-낙조대-

다섯째날:월명암-직소폭포

여섯째날:유천정사

 

 

 

 

5.군산의 토포스:채만식과 탁류

 

    

 

채만식의탁류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요한 점은 그의 문학 가치만큼이나 작품에 대해 다양한 연구 평가가 이뤄져 왔다는 점입니다.

191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인들의 한민족에 대한 폭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혹화되어 갔고, 이에 따라 우리의 대항 역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우리 나라에 식민지 파쇼통치를 실시했는데, 이런 일본의 압력은 당시 우리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30년대에 더욱 더 가혹해진 일제의 조선탄압정책은 그 이전 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발생한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공황위기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물화의 공급이 수요를 훨씬 웃돌게 되자 재고가 늘어나고, 물품생산의 중단이 발생하면서 실업자가 증가하는 등 경제공황의 위기는 일본에게 큰 타격을 준 것입니다.

이에 일본은 상품 판매 시장의 확대와 정복야욕을 위한 만주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자신들의 계획을 위해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선을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은 30년대 이전보다 조선에서의 착취를 보다 강제적으로 집행하고, 인적, 물적 자원을 가혹하게 동원하는 한편, 조선 민중의 민족해방운동을 가차없이 탄압합니다. 1930년대 일제의 조선에 대한 경제 정책은 농공병진 , 북선개척, 지하자원개발, 농촌진흥 , 자작농창정 등의 슬로건 하에 추진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만주침략을 위한 수단으로써 우리 민족을 이용하고자 한 일본의 간교한 술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 일본은 만주사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연결지점이 될 수 있는 조건, 특히 북한에 도로망을 확립하고, 이곳을 통해 군수물자를 운송·전달하고 쌀 등의 군량미도 전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곧, 병참기지화 정책과 북선개척 등 당시 일제가 주장하고 시해한 여러 정책들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산 째보선창은 채만식의 소설탁류에도 등장합니다. 채만식의 탁류는 군산이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1930년대의 시대적사회적 상황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작품입니다. 군산이 항구라는 점과 쌀의 주요 생산지라는 최적의 조건은 일본이 쌀을 수탈하여 일본으로 운송하는 통로역할을 하는데 최상의 조건이었고, 군산은 일찍 개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산은 해방이 된 후로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 30년대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그 때 지어진 일본식 가옥들은 월명동 일대에 남아 있습니다.

탁류는 군산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지만, 소설이기보다는 30년대 군산을 가장 잘 묘사해 주고 있는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탁류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6.‘아리랑을 통해 본 새만금; 조정래의 아리랑

 

 

[개설]

 

 

아리랑은 1990~1995년 조정래가 전라북도 김제시 김제평야를 배경으로 쓴 대하 역사소설입니다.

작가 조정래는 19901211일부터 아리랑한국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19958월 해방 50주년을 맞아 12권을 완간합니다. 1998년에는 아리랑프랑스어판 제13권이 4월 말에 아르마땅 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1회 노신(魯迅)문학상을 수상합니다. 2000년에는 아리랑의 발원지인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시민의 이름으로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 문학비를 벽골제 광장에 세우고, 1호 명예 시민증을 수여합니다. 20025월에는 프랑스 아르마땅 출판사에서 아리랑12권을 완역 출간합니다. 유럽 지역에서 한국의 대하소설이 완간된 것은 최초의 일이며, 그해 516일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건립한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개관식을 개최하였는데, 생존 작가의 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구성]

 

아리랑48개월의 집필 기간과 2만 장 분량으로 탈고된 12권의 대하소설입니다. 아리랑은 전 4부로 제1부는 , 한반도37장이고, 2부는 민족혼으로 35, 3부는 어둠의 산하48, 4부는 동트는 광야이고 5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한반도는 동학군 궐기 직후에서 일제의 실질적인 한반도 지배가 시작된 한일병합으로부터 토지조사령이 발표되기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의병투쟁기로 볼 수 있습니다. 아리랑에서 역사적 사건은 배경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소재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대부분 역사소설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재현해내거나 재해석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데 비해, 이 소설에서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정도로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일진회, 동학, 의병, 1차 한일협약, 한일합방, 하와이 이민, 스티븐스 암살 등의 역사적 사건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중 어떤 것들은 대부분의 인물들과는 직접 관련 없이 단순하게 배경으로 서 있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아예 작중의 중심사건으로 설정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제1부와 제2부에서는 비교적 역사적 사건에 살을 붙이고 피가 흐르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지만 제4부에서는 역사적 사건의 뼈대를 전달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2민족혼은 토지조사 사업의 완료와 3·1운동으로 인한 민족운동의 주체세력 변모와 신간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2부에서는 몇 년에 걸친 전국 토지조사 실시, 역둔토 특별 처분령, 장인환 사건, 하와이에서의 대조선국민군단 창설, 3·1운동, 만주에서의 여러 단체들에 의한 독립투쟁, 공산주의 바람 등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토지조사 실시와 같은 역사적 사건은 비록 비중은 크지 않지만 여러 작중 인물들에게 중심 사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토지조사 실시와 3·1만세 사건이 전국적 규모의 사건이며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실감하게 하는 사건인 데 반해, 다른 역사적 사건들은 공간상으로도 제한되어 있고 그 영향도 크지 않습니다. 2부에서 중심에 놓여 있는 역사적 사건은 역시 토지조사 실시입니다. 작가는 이미 정치적 침략에 못지않게 경제적 침략에 의미를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3어둠의 산하는 만주사변과 이 지역에서의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여기서는 나라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한풀 꺾이고 친일파가 발호함으로써 광복을 향한 길에 어둠이 짙게 드리워지지만 독립의 염원은 오히려 안으로 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동트는 광야는 일제 말기의 극악한 탄압 아래서 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은 누구였던가를 밝혀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정사를 보면 일본은, 1933년에서 1936년까지 4차 토벌을 감행했고, 수천 명의 사회주의자를 체포하였으며 이때 조선혁명당군 사령관이 전사합니다.

일본군의 조선독립군 대토벌작전은 제4부의 배경이 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주요 사건들을 연출해 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 이외에 일장기 말소 사건, 선만척식회사 창립, 코민테른 7차 대회, 조선족 중앙아시아 이주령, 진주만 폭격, 정신대와 징용 강제 등의 역사적 사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징]

 

아리랑은 대하 역사소설로, 사실로서의 식민통치사와 일관된 사관에 바탕을 둔 상상력으로 빚어낸 허구적 사건들을 잘 배합해 놓았습니다. 역사와 소설 어느 것에 더 무게를 주었느냐 하는 면에서는 제1부에서 4부까지가 동일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2부에서는 비사를 뒤적거리는 가운데 역사를 소설로 처리한 것이 적지 않게 보이는가 하면, 아무래도 제4부는 역사기록 쪽으로 무게가 옮겨간 느낌이 있습니다.

작가는 처음부터 어떤 양태로든 모든 인물들을 역사적 사건과 직접 연결시키는 방법을 써왔는데, 4부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모든 인물들에게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가담자나 피해자라는 딱지가 붙어 있습니다.

역사소설의 구체적인 형태는 소설을 쓸 때 주로 무엇에 의존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른바 사료나 그 범위 안에 들어가는 기록에 의존하느냐, 대체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하느냐 아니면 역사적 자료와 작가의 상상력을 적당히 배합하느냐에 따라 역사소설은 다른 얼굴로 나타납니다. 물론 역사소설도 엄연히 소설인 이상에는 작가의 상상력이 그것이 근거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기본으로 깔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리랑을 송수익·감골댁·공허·장칠문·하시모토 등과 같은 허구적 인물들이 견인하고 있는 이야기라는 점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한, 아리랑은 결국 작가의 폭 넓으면서도 깊이 있는 상상력이 낳은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아리랑은 역사적 사건들을 그 자체로 재조명해 보겠다는 의욕이 없었더라면 일개 이야기로 낙착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에서는 신돌석·신채호·이회영·장인환·나철·홍범도·이승만·김병로 등과 같은 실존 인물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때로는 작중 인물들과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허구적 인물들의 격을 높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함도 더해 줍니다.

아리랑은 대하소설인 만큼 기본적으로 만인보작성과 같은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송수익·공허·정도규·수국이 같은 인물들이 주체가 된 사건들이 아리랑의 뼈대를 이룬 것이라면, 이들 무명의 존재들이 주체가 된 사건들은 살과 피를 이룹니다.

그런가 하면 아리랑은 구한말에서 해방까지의 50여 년의 기간을 시간적 배경으로 취하고 있는 만큼 한 인물과 그 자식세대의 모습과 행동을 그릴 수밖에 없는 면을 보여준다. 최소 두 세대만 이어져도 가족사가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아리랑에서는 송수익이나 감골댁, 정도규 등과 같은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는 가족사 소설로서의 골격을 덮어씌우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의 수난과 민족사는 감골댁 집안, 송수익과 그 아들들, 정도규 형제 등이 이루어내는 가족사에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아리랑은 이들 몇몇 가족사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가늠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의의와 평가]

 

아리랑은 흔히 말하는 역사소설의 유형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리랑에는 과거 역사로부터 이념이나 정신을 빌려 현재나 미래를 위해 활용하고자 하는 이념형 역사소설의 요소도 있습니다. 아리랑에는 일제 식민통치의 역사를 탄압의 힘에 못지않은 반작용으로서의 저항의 역사로 보는 관점과 우리 민족의 끈질긴 투쟁정신을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저항의 정신과 민족주의 이념을 고취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아리랑은 민족주의의 새 교과서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아리랑에는 역사의 사실이나 진상을 일러주는 사실 제공형 역사소설의 요소도 있습니다. 아리랑을 통해서 그 동안 역사 교과서를 통해 미진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거나 다른 역사소설을 통해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바로 알게 되고, 일제의 헌병경찰 정치가 그렇듯 엄청나게 많은 조선인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던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토지조사 실시가 얼마나 많은 조선 지주들과 농민들을 파탄으로 몰아갔는지 실감할 수 있고, 재만 조선독립군 대토벌 작전이 어마어마한 살인행위였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아리랑에는 공적인 역사를 단순히 배경으로 놓고 그 배경 아래서 개인적인 삶의 모습을 충분히 잘 보여주는 인물과 사건들을 설정한 작가의 소설시학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아리랑은 역사소설의 여러 유형을 종합해 놓은 것입니다.

 

 

7.새만금 원주민들의 삶의 서사:조헌용의 파도는 잠들지 않는다

 

 

 조헌용의 연작소설집 파도는 잠들지 않는다는 새만금 사업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이야기입니다.

8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작가는 바다에서 육지로 변해가는 과정 중의 새만금 일대를 포착합니다. 작품을 통해 살펴본 새만금 사업의 갈등과 투쟁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보상금 갈등입니다. 보상 금액과 지급 기준, 지급 대상을 두고 가족 간, 마을 주민 간의 갈등이 반복적으로 묘사됩니다. 둘째, 바다에서 육지로 노동 환경의 변화로 인한 생존 투쟁입니다. 특히 합법/불법을 규정하는 정부와 이에 대항하는 주민 간의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 환경과 개발이라는 가치관의 갈등입니다. 이는 생존과 이상의 갈등, 세대 갈등과도 연관됩니다. 넷째, 마을의 공간 파괴와 문화 붕괴로 야기되는 갈등입니다. 마지막으로 새롭게 꿈꾸기, 마을 주민 간 연대와 희망 찾기가 갈등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8.신석정의 시비 등 계화도에서 새만금까지(노벨문학상 후보 고은 등)

 

 

이 일대는 계화도봉수대와 계화도 간척지, 간재 전우의 유허지, 해창공원의 신석정시비 파도’, 신석정문학관, 새만금전시관, 그리고 군산이 낳은 노벨문학상 후보 고은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볼거리 먹거리에 매력까지 가득한 땅 부안에 이화우 흣날리는 봄 향기가 가득합니다. 특히 부안은 당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한여인의 단행본시집 '매창집'이 발간되었고 현대에는 한국 현대시문학의 거장 신석정이 거닐었던 도저한 문맥이 흐르는 지역입니다.

부안에는 한국관광공사 추천 한국의 가볼만한 곳에 선정된 바 있는 석정문학관과 석정시비를 중심으로 매창공원과 시비’ ‘서림공원 문학마당 시비’ ‘부안댐 문학공원시비’ ‘새만금 전시관 신석정 시비등 많은 시비가 건립되어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에 멋진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마침 이번 봄 순례는 절창 '이화우'를 노래한 매창 관련 시비를 중심으로 답사를 했습니다.

 

                                  

400여년전 부안에 살다간 시향가득 머금은 비련의 여인 이매창이 있습니다. 거문고를 잘 타며 글이 뛰어나 개호는 매창(梅窓). 이름은 계랑(桂娘), 계생(癸生),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입니다.

부안 명기이며 시인으로서 임진란 전후에 북의 황진이, 남의 매창으로 불리웁니다. 허균(許筠)과 유희경(劉希慶)을 비롯한 여러 관리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 58편이 '매창집'에 전합니다. 부안군청 뒤 봄색 가득한 상소산 서림공원에 오르다보면 38세를 살다간 매창의 시심과 문학정신을 기리는 시비가 있습니다.

    

'梨花雨(이화우) 흣날릴제 울며잡고 離別(이별)한 님

秋風落葉(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千里(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규장각본 가곡원류에 실려있는 매창의 절창 梨花雨(이화우)’입니다. 이화우에서 추풍낙엽으로 어지며 시간적, 공간적을 뛰어넘어 임에게로 향합니다. 부안읍 오리현 매창로에 그가 잠들어있는 아담한 매창 공원이있다. 매창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에 뛰어나 죽을 때에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합니다.

그의 묘는 1983년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살아서는 몇의 연인이었지만 죽어서는 뭇사람의 연인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묘지 관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마을의 나뭇꾼들이 벌초를 하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아마 총각들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매창은 촌은 유경희와의 사랑을 통해 극적 인물이 됩니다. 18세에 28세 연상인 40대 유부남 유희경을 만납니다. 유희경은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그는 한시를 잘 지어 사대부들과 교유하였으며,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합니다. 매창이 그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으니 말하자면 조선문인협회 이사장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중앙의 대 시인과 다재다능한 매창이 만나니 한양에서 남편 월급만 기다리고 있는 처자식도 잠시 잊은 채 첫눈에 진도를 나가버립니다.

그러나, 고은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괴롭고 슬픈 무서운 지옥이 아니던가. 임진왜란이 터지고 유희경은 전선으로 나가야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은 왜 이리 골치 아픈 존재인가요. 왜적과 싸우기에 바쁜 유희경은 매창에게 정주고 떠난 임이 되고 맙니다.

매창은 유희경을 천리보다 더 먼 꿈길에서나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외진 고을의 기생이 당대의 문사들과 어울리는 시적 감각을 가진 작가라는데 놀랍습니다. 중앙 문단의 대시인 유희경과 매창의 만남은 매창의 시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을 것입니다.

 

 

 

매창이 지은 수백 편의 시들 중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시 58편이 매창집으로 발간되었는데, 매창 사후 60년후 매창이 자주 찾던 개암사에서 목판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한 여인의 단행본시집입니다.

'매창집'은 지금 매우 귀중한 희귀본으로 세권이 남아있습니다. 두 권은 서울의 간송미술관에 한권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고, 1956년에 신석정이 대역한(對譯梅窓集)이 있습니다.

이처럼 유희경을 그리며 살던 매창에게 바람 같은 운명이 다가 다가옵니다.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의 등장입니다. 허균은 지금으로 말하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지도 모를 당대 소설가입니다. 그가 세무공무원이 되어 부안에 들러 매창과 만나게 됩니다.

 도술을 부리며 율도국을 세우는 홍길동을 만들었으나 매창을 여친으로 만족해하는 허균은 잠시 공직에서 물러나 우반동 정사암에 머물며 매창과의 인연을 이어가다 다시 복직을 하여 이 역시 매창을 떠나갑니다.

최근들어 서울 도봉구는 도봉산 입구에 도봉구청장과, 부안군수가 참석한 가운데 유희경 이매창 시비를 건립했습니다. 도봉구 출신 유희경과 이매창이 서로 그리워하고 주고받은매창을 생각하며이화우 흣뿌릴제를 새겼습니다.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난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이매창)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내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유희경)

 

따라서 도봉구와 부안군의 문화교류가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매창의 묘제는 매년 음년 45일에 부풍율회 회원들에 의하여 지내고 있다. 부안은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인 묵객들이 변산과 부안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산과 구름, 멀리 서해의 간지러운 해풍이 볼을 문지르고 지나갈 때 얻은 꿈 조각들

살아서는 부안에 살라는 말처럼 부안은 변산국립공원을 낀 바다와 평야 그리고 산과 섬이 어우러져 경관이 빼어나고 풍요롭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부안은 시대는 다르지만 두 남녀 천재 시인을 탄생시켰다. 황진이와 쌍벽을 이뤘다는 이매창과 목가시인 신석정이 부안읍 출생입니다.

   

 

 

 

신석정(申夕汀)은 구한말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던 1907년 부안읍에서 출생합니다. 그의 나이 18, 수평선 너머로 뉘엿거리는 해를 바라보며 벅차오른 시심으로 첫 작품 기우는 해를 조선일보에 발표, 찬사를 얻으며 시인으로 세상에 나서게 됩니다. 1930년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전문강원의 석전 박한영의 문하에서 1년간 불전을 공부합니다.

이 시기에 박용철. 정지용, 한용운, 춘원 이광수, 김억 시인들과 교류합니다. 그러기도 잠시, 무정한 서울이 싫었는지 고향 마을에서 농사와 문학적인 삶을 병행하기로 귀향을 합니다. 그러나 당시 농촌 현실은 그의 이런 낭만적인 삶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낙향해 살았던 청구원에서 불후의 명작 첫시집<촛불>(1939)<슬픈목가>(1947)를 세상에 내 놓으며 빅 히트를 치게 됩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첫 시집을 내며 청구원주변의 산과 구름, 멀리 서해의 간지러운 해풍이 볼을 문지르고 지나갈 때 얻은 꿈 조각들이라고 말합니다. 석정시인은 자연의 영향 때문인지 전원적 목가적인 낭만주의 시를 많이 썼고 늘 고향을 지키며 살았고, 늘 문학을 꿈꾸며 문학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첫 시집 <촛불>을 간행에 이어 <슬픈 목가>, <빙하> 등의 시집들을 간행하였고, <매창시집>,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 유고수필집으로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과 유고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 등의 시집도 간행합니다.

 

 

또한 20094월에 <신석정 전집5>을 국학자료원에서 출간했습니다. 석정이 떠난 후 1978년에 전주 덕진 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으며, 19918월에는 그의 고향인 부안군 변산면 해창 석정공원에 파도시비가 세워졌습니다. 그 후 파도시비는 2009910일 지금 새만금 홍보관 내 서두 터 정원으로 옮겼습니다.

 

파도는 이제,  시낭송가들의 필수 애송시가 됐습니다.

 

 갈대에 숨어 드는 소슬한 바람 9월도 깊었다

 철그른 뻐꾸기 목멘 소리 해가 잦아 타는 노을

 안쓰럽도록 어진 것과 어질지 않은 것을 남겨 놓고

 이대로 차마 이대로 눈 감을 수도 없거늘

 산을 닮아 입을 다물어도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 오는 날을

 소나무 성근 숲 너머 파도소리가 유달리 달려드는 속을

 부르르 떨리는 손은 주먹으로 달래 놓고 파도 밖에 트여 올 한 줄기 빛을 본다 (‘파도전문)

 

 식민지 상황의 궁핍하고 부자유스러운 공간 속에서 시인에게 어머니는 유일한 도피처였습니다. 이런 내면의 갈구함이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 형태가 시로 승화됩니다. 석정의 시들은 서정성과 반복적인 언어 사용으로 호소력이 있어 낭송하기에도 좋습니다.

 석정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채 해방을 맞이할 때 까지 절필을 합니다. 5.16군사 정권을 비판하는 시를 발표해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부안읍 선은리에 낙향해 살았던 청구원 복원에 이어 201110월에 개관한 석정문학관이 세련된 인테리어와 현대식 미디어 아트가 동원된 공간으로 넓은 마당과 함께 호남지역 새로운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 되고 있습니다.

 석정의 묘소는 행안면 역리 야산에 위치하며, 마을 초입 벽에 데뷔작<기우는 해>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쓴<가슴에 지는 낙화소리>시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나의 제안:아리울 테마 파크 조성

  Ariul World Literature Park(아리울 세계 문학 테마파크)에 앞서 말한 작품들을 소재로 각각 테마 공원을 조성했으면 합니다.

기억의 프리즘이 낳은 새만금 민족지:임영춘의 갯들’, 새만금방조제 이야기:임영춘의 들판’, 새만금과 최치원(금돈시굴 재현), 봉래산(부안) 기행(허생전, 원효방의 찻집), 군산의 토포스:채만식과 탁류, ‘아리랑을 통해 본 새만금:조정래의 아리랑, 새만금 원주민들의 삶의 서사:조헌용의 파도는 잠들지 않는다, 계화도에서 새만금까지(노벨문학상 후보 고은 등), 그리고 세계노벨문학상, 세계시인공원 등이 각각의 테마 파크로 이들 작품 속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아주 흥미를 끌 것입니다.

, 문학레스토랑, 문학 체험장 등의 시설과 동화나라 문학나라, 문학타워, 문학돔(문학 스파, 문학 하우스), 문학광장 등 관광, 문화시설, 문학까페, 문학 갤러리, 문학 샵, 파머스 마켓 등 판매, 전시시설, 그리고 솔라파크(주차장)와 웰컴스테이션(관리사무소, 매표소, 종합안내소) 등의 서비스, 관리 시설 등을 조성했으면 좋겠습니다.

상징물로 초대형 빨간 우체통을 만들어 놓고 편지를 보낼 수 있도록 하며, 새만금국제도서전과 현장 문학 답사를 통해 중국인 등 외국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한다면 머지 않아 이곳 출신의 고은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날도 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 우표와 엽서 발간은 물론 시화 작품들도 판매할 수 있게 하며 어떨까요,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고은생가, 신석정문학관과 신석정생가, 허생전의 변산, 원효방, 채만식의 탁류 현장(째보선창 등)을 걷기 여행 관광코스로 지정하고 답사를 완료한 사람들에게 농어촌관광공사 명의의 인증서를 주도록 했으면 합니다.

일년에 한번 이면 이곳에서 새만금 국제도서전을 개최하며, 음악회, 시낭송회, 시화전 등이 일년 내내 이뤄지게 한다면 또 다른 새만금의 역사를 쓸 수 있습니다.

바지락캐기 체험, 환경정화 활동, 고기잡았다 놓아주기, 연날리기 대회, 방학을 이용한 문학 캠프파이어 등 계기성 행사를 통해 이서구의 예언이 맞음을 실현해 보았으면 합니다.

 

새만금 심청체험관 조성(예시1)

한 용역 결과에 의하면 심청전의 심청이 빠진 인당수가 부안 인근으로 나와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심청이 되는 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느끼는 심청체험관을 만들면 이곳이 더욱 더 명성을 날릴 것입니다.

새만금에 심청 이야기를 따라 전시를 관람하고 즐겁게 체험하면서 옛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 사상, 지혜, 용기가치관을 자연스레 체득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 형식으로 전개되는 전시 방식을 취했으면 합니다. 전래 이야기 심청전을 소재로 어린이과 어른, 관광객들이 마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심청의 어린시절 생활, 인당수와 용궁, 시각장애 체험, 궁중 공간 등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조선 후기 서민 가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직접 신을 벗고 들어가 집안 구석구석을 구경하게 된다. 마루에서는 물레와 씨아를 돌려보고 다듬이질을 해볼 수 있습니다.

안방에서 서랍과 반짇고리함을 열어보며 어디에 사용했던 물건인지 추측해보기도 합니다. 심청과 심봉사의 옷을 직접 입어보고 커다란 터치스크린을 통해 다리미와 인두로 다양한 옷을 다려봅니다.

부엌에서는 맷돌과 절구질을 해보며 오늘날 우리의 생활과 비교해보기도 합니다. , 공양미 300석이 과연 얼마 만큼인지 재어 보며 전통시대와 현대의 도량형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체험공간도 마련했으면 합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따라 다음 전시로 이동하면 어린이관람객은 공양미 300석에 팔린 심청이 되어 바다를 건너 인당수로 향하게 됩니다.

마치 뱃머리에 오른 듯한 출렁이는 영상과 거친 파도소리가 바다에 뛰어들기 전 심청의 마음을 느끼게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내어 인당수에 빠져보는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또한 심청이 집을 떠난 뒤 홀로 남게 된 심봉사가 되어볼 수도 있습니다. 체험을 통해 어린이들은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나와 다른 이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해보게 됩니다.

전시는 인당수 체험 공간을 통해 바다 속 용궁으로 이어집니다. 조상들이 상상한 신비한 바닷 속 용궁모습이 인터렉티브 영상으로 재현됩니다.

바다 속 용궁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커다란 연꽃입니다. 연꽃을 타고 물속에서 물 밖 공간으로 이동하면 왕비가 된 심청이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열리는 맹인잔치에서 게임을 통해 심봉사를 찾으면 잔치에 모인 모든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습니다.

, 이곳에서 악기연주의 체험을 할 수 있고, 왕과 왕비의 복식을 직접 입어보고 어좌에 앉아 왕과 왕비가 된 기분을 한껏 내어볼 수 있습니다.

이곳의 브랜드 가치를 더욱 더 높이고 풍부한 관광체험 거리의 마련으로 꿈과 희망이 넘치는 활기찬 새만금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새만금국제도서전:새만금이 낳은 고은, 노벨문학상 기약(예시2)

 

 

 

세계 각국의 도서와 국내 유명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게 새만금국제도서전입니다. 국제 도서전을 우리 출판물의 해외 진출 교두보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서울국제도서전이 독자, 저자, 출판인, 출판 관련업계 종사자들이 서로 소통·교류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인프라 구축 후에 가능하며 한국의 고은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만드는 일이며, 이는 새만금이 만든 인물이란 등식을 가능케 합니다.

도서전은 국내는 물론 미국, 프랑스, 독일, 아랍에미리트 등 20여 개국 500 개의 출판사가 참여해 인문 사회, 문학, 과학, 예술, 철학, 아동 도서 등 전 분야의 도서를 소개하고 하는 장이다. 동시에, 해외의 저작권 에이전시들이 참여하여 저작권 비즈니스를 위한 활동을 펼칩니다.

새만금국제도서전에서 만나고 싶은 작가와 출판사설문 조사 결과 상위 20위에 랭크된 출판사가 도서전시, 작가 초청행사, 특별전시 등으로 모두 참여하몬 볼거리가 더욱 다양할 것입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와 함께 시각장애인의 정보격차 해소를 위해 스마트폰 전용 '행복을 들려주는 도서관' 어플리케이션 전시 및 시연회를 가지면 더욱 좋습니다.

'우리의 찬란한 기록문화유산전'을 특별전으로 마련하고 팔만대장경판을 직접 탁본하는 체험시간도 진행되도 좋으며, 이와 더불어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는 전자 출판 시장의 현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전자출판관(E-SQUARE)을 운영하며, 관람객이 본인의 블로그나 미니 홈피에 게시된 글을 전자 출판 파일로 변환하고 직접 편집, 디자인해 보는 체험 행사도 준비하면 좋습니다.

이밖에 아동관에서는 어린이는 물론 성인에게도 매력적인 일러스트레이션, 만화, 팝업북을 주제로 한 특별 전시와 부대 행사가 풍성하게 마련하자는 게 제 아이디어입니다.

, 이 전시는 한국 문단에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김진명, 은희경, 김인숙, 조경란 작가 등을 비롯해 장차 한국 소설 문단을 이끌 구병모, 김애란, 정유정 등 역량 있는 작가들이 참여하여 독자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며 아울러,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와 더불어 작가 친필 사인 도서도 함께 증정한다.

이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전주의 혁신도시에 최근에 입준한 만큼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에필로그

 

  아름다운 해안 경관으로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았던 새만금 일대가 이제는 새만금 간척사업의 본격적인 전개로 해상 그린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습니다. 허생이 일군 무인도 유토피아에서 조선후기 기층민을 대변하는 도적들은 사회변혁이나 유토피아 건설에 주체적인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허생 또한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현실을 모순이나 부조리를 극복하여 보다 건전하고 발전된 사회를 지향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요컨대 허생의 무인도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밀려난 사대부들의 관습적 행보처럼 일시적인 도피와 은둔의 속성을 띠고 있습니다.

 모쪼록 새만금 간척사업이 허생의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공존과 상생의 사업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Ariul World Literature Park(아리울 세계 문학 테마파크)가 부족한 컨텐츠를 채워주면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등 56감을 충족시켜주는 랜드마크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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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새만금. 조용한 뱃고동을 울리며 안개와 바다를 가르고 있습니다. 짙은 해무 속에 가라앉은 새만금의 풍경들이 점점으로 다가옵니다. 회색 빛 바다는 무채색의 화폭을 연출하고 있는데, 하늘은 쪽빛을 잔뜩 머금고 있습니다.

이곳 새만금은 갯벌과 포구와 유람선의 낭만이 있고,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천혜의 볼거리가 보석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저는 또다른 상상을 해봅니다.

새만금에 조선된 해저도시엔 상어가 유유히 앞을 지나갑니다. 해저도시 내에서의 에너지 조달은 인공태양을 만들어 제 때에 에너지가 공급될 수 있도록 하고 조력, 풍력, 파력을 이용해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구요. 정보위성은 해상에서의 위치 파악도 가능하도록 해 주었죠.

군에서 주로 사용하던 잠수정은 유용한 교통수단이 되었습니다. 해상공원은 이미 조성이 되었구요. 얼마 있지 않으면 해상공항의 건설을 앞두고 있습니다.

새만금의 해저도시는 돔형으로 지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론 돔형을 선호하는데, 해저란 곳의 특수성, 즉 수심에 대한 압력의 반비례 버칙에 의거 힘을 가장 잘 분산시키면서도 정점을 살려 지탱해주는 돔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네요.

새만금의 해저도시는 캡슐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여행 때보다 더 더욱 신경이 곤두섭니다.

이윽고 캡슐 의자에 않아 모니터 보드를 켰습니다. 저는 제일 먼저 가고 싶었던 새만금드림랜드를 선택했습니다.

우선, 인터넷으로 표를 받고 가입 인사를 거친 후 인공센서가 부착된 문을 통과해야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돈은 인터넷은행에서 보내고 아주 간단하게 절차를 마친 뒤, 저는 새만금드림랜드의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지금부터 잠수가 시작되니 창문을 열지 말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캡슐이 점점 바다 속으로 내려갑니다. 창문으로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을 쳐다봅니다. 신기한 물고기도 많고 여러 가지 해조류도 같이 있었습니다.

직접 나가 수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해저문을 통과합니다.

옛날 건축물과 너무 비교되는 해저도시에 감탄할 때 쯤 검문원이 다가와 신원조사를 요청했답니다. 화상으로 인사를 한 후 모니터에 내 손을 올려놓자 컴퓨터에 내 손바닥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히고 옆엔 저의 신원조사서가 올라왔답니다.

저는 캡슐로 이리저리 마구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조금 힘들긴 해도 신기하기만 한 해저도시에 어느 새 푹 빠져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긴 해양터널 중 하나로, 200미터에 달하는 새만금 국제 해양터널을 걷다 보면 깊은 바닷속의 환상 여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 새, 푸른빛 자연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됩니다.

다음에 모습을 보이는 에코테인먼트 파크(Ecotaintment Park)’는 단연 흥미의 대상이로군요.

쉽게 말하면, 신개념 놀이공원으로 해양 동물원, 해저놀이기구 등이 있는 곳이랍니다. 해양 동물원에는 심해 깊은 곳에 살고 있는 바다 속 친구들을 불러내서 볼 수 있고, 또 육지의 동물원에서만 살던 기린이나 말, 호랑이 등을 이 환경에 적응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난 번에 할머니 한 분이 바다 속에 새가 날아 다닌다고 신기해 하셨던 기억이 나는 군요. 그들이 물고기처럼 물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니고, 일조량이 부족한 물 속 동물원에서 힘들지 않고, 육지 생활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일례로, 새만금의 풍력을 동물원에 보내는 시스템 말이죠.

해저놀이공원에는 저 깊고 깊은 심해까지 내려갔다오는 롤러코스트가 최고인데요. 과거에는 수압으로 견디지 못했을 깊이에도 사람이 그냥 공포감 없이 즐기면서 경험하는 놀이기구랍니다. 여러분들도 와서 캄캄한 줄 알았던 바다 깊은 곳의 짜릿함반드시 체험해보세요.

하지만 바다에서 재배한 유기농 재료로 만든 음식을 파는 오션팜랜드(Ocean Parmland)’는 시간이 부족해 들리지 못한 만큼 이 다음에 와서 저녁 식사 때 찾을 계획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SF소설이나 영화에만 등장하던 해저호텔에서 쉬었다 가는 모습도 보이네요.

마지막으로 새만금 국제 수중 우체국에 들렸습니다. 이 우체국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방수 처리된 우편엽서를 미리 준비한 후 잠수해야 합니다.

우체국 직원은 이용객들에게 방문 기념 스탬프를 찍어줍니다. 새만금 국제 수중 우체국은 산호군락과 해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물고기떼에 둘러싸여 있군요. 이 곳은 맑고 투명하며 용암 때문에 생긴 수중터널과 거대한 바위동굴, 해저벼랑, 산과 계곡 등 해양 풍경을 한껏 즐길 수 있답니다.

, 난파선이나 물에 잠긴 비행기, 침식된 범선 등 새만금의 해양 세계는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답니다. 지금 서울에 있을 아내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낸 후 새만금 해상도시로 나왔습니다.

 

 시나브로, 새만금의 아미새 한 마리, 그 소리 아카펠라처럼 청아한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입체감을 뽐내며 호흡하는 대나무 줄기, 칼날처럼 날카로운 댓잎 끝은 신들도 탄복하여 풍죽, , 나무, 늙은 매화에 걸린 달과 새에 이르기까지 수복강령을 주문(呪文)하네요.

 소설가 최명희의 혼불에 등장하는 단어인 꽃심이 그러하듯, “표현하고 싶은 그 무엇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사람들에게는 눈이 트이고 귀가 열리는 단어로 영원히 살아갈 것”(285)을 희망하고 싶을 뿐입니다.

특히, 에메랄드빛 바다와 어우러진 선홍빛 꽃들이 섬으로 떠 있는 새만금은 한 폭의 풍경화를, 또는 정겨운 수묵담채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따뜻한 햇살을 받아 여기저기 피기 시작한 꽃망울은 화사한 봄기운을 선사합니다.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온 저는 늦겨울에 피는 꽃을 보며 다시 신혼으로 돌아간 듯, 때 이른 봄의 정취를 맘껏 즐겼습니다.

 ‘꽃심이 있는 땅새만금을 떠나 다시 배에 몸을 싣고 저는 일터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별빛의 영롱함에 고개 숙이니 숨어 있던 그리움 하나, 은은한 달무리 비집고 가슴 한 켠 외로운 떨림으로 떨어집니다. 저도 모르게 흥건히 취해가고 있습니다.

 조심조심 두 손 모아 치성을 드리오니 천지신명을 향한 무심(無心)과 무욕(無慾)’의 희망 비나리 입니다. 여기는 꽃의 심()’,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운을 다해 꼿꼿이 버텨온 땅 국제해양도시 아리울새만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