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석탑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사라져 가는 마한의 찬란한 역사를 발굴,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백제의 역사는 세간의 관심이 증대되면서 뜨고 있는 반면 마한의 역사는 크게 주목받지 못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굴러온 돌(백제)이 박힌 돌(마한)의 역사를 언제부터 먹었나. 그 시작은 바로 마한민속예술제가 사라지면서부터 비롯된다. 익산서동축제는 1969년 당시 익산군에서 시작된 '마한제'에서 유래하며, '마한민속예술제'가 2003년부터 명칭이 변경된 것. 축제의 주제를 부각시킨다는 의미에서 ‘익선서동축제’로 개명했다. 익산시가 마한이라는 포괄적인 주제보다는 백제 때 무왕이 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로 축제의 주제를 좁힌 것이다.
이는 서동으로 알려진 백제 30대 ‘무왕’의 출생지 원조 논쟁 때문이다. 이에질세라, 충남 부여군도 무왕의 전설을 바탕으로 2003년부터 ‘궁남지연꽃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서동이 태어난 곳은 익산 지역이지만 서동이 무왕으로 즉위한 뒤 활동한 곳은 부여군이라는 해석 때문이다. 결국, 익산과 부여의 ‘무왕’ 출생지 논쟁으로 인해 마한의 역사가 거의 사라져 가는 계기로 작용했다.
하지만 1981년 세워진 ‘함열 마포교 중수비’를 통해 마한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한 이래 천수 백년에 걸쳐 다리와 제방의 언덕이 무너지고, 안 무너지고에 따라 한해의 농사가 달렸다. (중략) 1830년에 이 고을 수령(홍기섭)이 막대한 재산을 내놓아 나무를 베고 돌을 다듬어 근사하게 쌓았는데, 30일이 걸렸고, 부역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다’
전주의 용머리고개 이야기에도 ‘마한의 기운이 쇠잔할 당시 민가에서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가 둘이 달린 소를 낳은 이변이 생겼다’고 소개될 정도로 역사의 잔영으로 남아있지만 백제유산에 파묻혀 마한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8년 익산에 마한관이 개관, 그 시대의 역사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용엽 국사편찬위원회 지역 사료 조사 위원은 “마한은 경기 일부와 충청도 전라도에 위치했던 고대부족사회 국가로, ‘응제시주’와 ‘동사강목’ 등 문헌 기록에 의하면 그 중심지가 익산 금마로 전해지고 있다”면서 “미륵사지 인근 사자봉에는 마한의 도읍지로 알려진 '기준성(箕準城)'터가 남아 있는 등 이를 역사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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