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산현감은 전라도 초입에 있어 각 고을 수령이 오고 갈 때 인사를 하는데, 이 때 잔치에 쓰일 술을 장만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끝에 호산(여산의 별명)에 나는 여러가지의 약초를 뜯어 누룩과 밑술을 더하여 100일 동안 숙성한 술이 바로 호산춘이다. 이 술은 충정도와 전라도의 경계 지점에 세워진 황화정에서 잔치를 베풀 때 쓰는 것이다.
봄춘자가 들어가는 술 이름이 많다. 서울의 약산춘, 평양의 벽향춘, 경상도의 이산춘, 전라도의 호산춘 등으로, 봄춘자가 붙는 술은 대개 3번의 덧술을 하는 청주 종류인데, 아마도 술을 먹으면 봄처럼 기운이 솟아서 붙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당나라 사공도의 글귀를 보면 '玉壺買春(옥호매춘)賞雨茅屋(상우모옥)'이란 문장이 나오는데, 이 말은 ‘옥으로 만든 병에 술을 사고, 초가집에서 내리는 비를 감상 하네’라는 뜻이다. 여기서 봄춘자를 봄으로 풀이하는 데도 있지만 춘정을 일으키게 하는 술로 풀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송순의 스승인 ‘송흠이 여산군수로 있을 때, 고을이 큰 길 옆이어서 손님은 많은데 대접할 것이 없자, 예산을 절약하기 위해 잡곡으로 특별하게 만든 술을 제조하여 대접했는데, 이것을 호산춘(壺山春)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러한 호산춘은 명문가의 집안인 가람 이병기의 생가인 진사동에서 많이 담궜는데, 나중에는 가람의 집안에서 담는 술이 여산 최고의 전통주 맥을 잇게 된다. 즉 호산춘은 옛 문헌인 산림경계, 임원십육지에서 소개되었고, 역사의 문화를 간직한 전통주가 된 것 같다.
춘향전을 보면 이몽룡은 과거 장원급제후 전라도 어사를 제수받고, 드디어 춘향이를 빨리 보고자 여산현 황화정을 거쳐 여산 동헌에 와서는 군사를 3군데 분파하고 가람 이병기 생가가 있는 마을을 지나간다. 아마도 소설이라 이몽룡이 호산춘을 먹는 대목이 안 나오지만 누구든지 이곳 가람댁을 지나가면서 술익는 냄새를 맏았 다면 그냥 발걸음을 지나가지 못한 것이다.
가람 생가에 접어들면 가람 이병기가 생활했던 수우재 현판이 보이고, 바로 옆에 호산춘을 대접했던 초가지붕의 정자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승운정(勝雲亭)이다. 승운정이라 이름한 것은 아마도 구름의 경치가 빼어나서 붙여진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정자 안에는 행서로 쓴 승운정편액이 붙어있고 바로 옆에는 주인 동조가 쓴 승운정기가 붙어있어 옮겨 본다.
“여기는 여산과 전주의 경계이며 마한 땅 고도의 첫머리인 군의 남쪽 구석의 한 자락 자투리 부분이다. 질펀한 들에는 봄과 여름 개구리 울고 두꺼비 뛰노는 곳이며, 우거진 뒷산에는 가을과 겨울, 여우랑 살쾡이가 마음 놓고 사는 데여서 사람들은 모두 다 미련 없이 버렸지만 나는 본시 이게 좋아 여기다 오두막집 짓고서 승운이라 불렀네,-----”
승운정 앞은 호산이라 불리는 여산이 친구처럼 딱 버티고 있으며, 바로 앞에는 연못과 정원이 잘 꾸며져 있으며, 바로 뒤에는 200년 된 탱자나무가 옛 과거의 기억을 말해주려 하고 있다.
가람 생가로 들어가면 가람의 문학일대기를 알 수 있는 연보와 시조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그는 1891년 3월 5일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한 후, 열아홉살에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곳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가 전주에서 생활할 때 기거했던 한옥마을 양사재 가람다실과 다가공원 가람시비는 많은 문학도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가람시조의 꽃을 피우고 그의 유택이 있는 이곳은, 여산문화의 중요한 자리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승운정에 앉아, 여산(일명 호산)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어 볼지어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 전북문화재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