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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행복산책

달빛 길어올리기

달빛을 길어올릴 수 있을까요?

 

'방안의 달빛은 밤의 촛불이요

지붕위의 구름은 아침연기요 

산은  천년의 빛으로 서있고

강은 만리의 마음으로 흘러가누나'

 

夜燭房中月/야촉방중월

朝煙屋上雲/조연옥상운

山立千年色/산립천년색

江流萬里心/강류만리심

 

이는 작자 미상의 전주에서 발굴된 시로서 작자는 가난한 선비의 아내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방중월(房中月)'로, 봄의 달빛을 통해 님그리워 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가 생각납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한지공예의 아름다움, 전통한지를 만드는 방법 등을 아주 자세하게 소개하는 까닭에 마치 한 편의 한지 다큐멘터리를 보게 합니다.

 

"달빛이 너무 탐나  물을 길러 갔다가  달도 함께 담았네. 돌아와서야 응당 깨달았네  물을 비우면  달빛도 사라진다는 것을..."

 

그래서 달빛을 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을 담아둬야 합니다.

 

'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어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절에 돌아와 비로소 깨달았으리.

병을 기울이면 달도 따라 비게 되는 것을'

 

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

幷汲一甁中(병급일병중)

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

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

 

이규보의 '영정중월(詠井中月)'이란 시입니다.

 

어떤 스님이 우물에 물을 길러 갔다가 우물 속에 비친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 병 속에 함께 길었습니다. 그러나 절에 도착해 병의 물을 기울이자 달도 함께 없어졌습니다. 손에 넣은 듯하면 빠져 달아나는 인간 탐욕의 무모함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물을 길러 갔다가 물에 비친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 '아! 좋다'하고, 황홀경에 빠져 물을 길어갈 생각도 잊은 채 달빛에 반해 있었지요.

 

절에 돌아와서는 저녁 공양도 드리고 바빠서 깜빡 잊고 있다가 "아! 내가 가져온 달이 있지!"라는 생각을 하고 달을 찾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허겁지겁 달려 가보니 둥그런 바가지가 기울어 달 또한 사라져 버렸으니 여기서 시인은 어린애같은 천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온갖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심안을 갖고 있었던 게지요.

 

어쩌면 욕망이라는 것은 병 속에 길어넣은 달빛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뭔가 대단한 것 같아서 움켜쥐려 애쓰지만, 실제로는 붙잡을 수도 없고 형체조차 모호한 것이 아닐런지요. 병을 기울여 물을 붓듯이 마음을 비우면 그만일 것을....

 

그러나 알면서도 하기 어려운 것이, 마음 비우기라는 사실 또한 분명합니다.

 

저 스님도 병을 기울이는 순간 욕망의 허무함을 깨달았겠지만, 다음날 밤에는 별빛을 병에 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어딘가에 머물러있던 '마음 비우기', 조금씩 가까이 가는 듯도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먼 것 같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마음도 없어지는 것'이 진정한 마음 비우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삶은 애시당초, 달빛 길어오르기인지도 모릅니다.

 

달빛을 길어오른 전주한지, 이로 만든 청사초롱에 한줄기 빛이 스며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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