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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3> 남천교

 

 

 

 

 

전주 교동의 남천교 너머 완산칠봉으로 해가 시나브로 넘어가고 있다. 남천교 위에 세워진 청연루(晴烟樓). 이는 완산팔경 가운데 하나가 ‘한벽청연(寒碧晴煙, 승암산 기슭 한벽방과 전주천을 휘감고 피어오르는 푸른 안개)’에서 비롯, ‘한벽’과 ‘청연’을 댓구로 사용, 현 송하진 전주시장이 쓴 글씨다. 다리 위쪽으로 한벽루(한벽당)가 있으니, 그 아래쪽에다 청연루를 지은 것이리라.

바로 그 옆엔 전주시 강암서예관과 전주시장의 부친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년)선생이 살았던 ‘아석재(我石齋)’가 있다. 이는 ‘물과 돌이 있는 데서 유연하게 살리라’라는 뜻을 담고 있는 주자의 시구절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유래한다.

한옥마을을 찾은 날이면 청연루가 보이는 전주천에서 일몰을 맞이하는 때가 종종 있다. 전주천의 햇살은 물 위에 물감처럼 번져가고, 낙조는 이에질세라 시시각각 색깔과 파장을 달리하며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인다. 전주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보고 싶은 날이면 남천교로 홀홀단신 떠나야 한다.

 

슬치에서 시작된 상관 계곡의 물이 의암, 은석 등 크고 작은 많은 골짜기의 물과 합류하면서 만마, 색장 등 여러 고을 옆을 거쳐 한벽당 아래로 흘러온다. 여기서 물줄기는 계곡의 바윗돌에 부딪쳐 흰옥처럼 부서지면서 거듭 굽이 틀어 남천으로 흘러간다.

남천교의 청연루에 앉아보니 전주천, 한벽교, 승암산과 동고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남천교는 전주시의 자랑거리인 한옥마을과 경기전, 승암산, 한벽당, 남고산, 전주천 등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되, 남천교의 옛 모습을 현대적인 시각에 맞게 2009년 복원 재가설한 팔짝지붕 형태의 교량이다.

남천교 왼편에 전주전통문화관과 오모가리탕집 몇곳이 보인다. 현재 전주전통문화관이 자리한 부근은 전북 지역 최초의 공동주택 교동 시민아파트로,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파트에 눈이 설었던 전주에서 초등학생들의 견학 코스로 활용되기도 했다.

바로 옆 오모가리집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지만 크게 낯설지 않아졌다. 오모가리란 본래 뚝배기를 일컫는 전주지역의 토속어로, 남천의 모래무지조림을 완산8진미로 꼽았다. 옛날의 남천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정함을 자랑했다. 모래무지는 모래 속을 파헤치면서 생활하는 삼례 한내 전주의 남천을 비롯, 서천, 남고천 등에서 많이 잡힌 가운데 버들잎에 휘늘어진 천변 평상 위에 걸터 앉아 오모가리탕에 소주를 곁들이면 풍류를 모르는 사람도 시 한수가 떠오르는 시절이 있었다.

‘염라대왕께서 “남천 모자(모래무지) 먹어봤냐?” 한다는디’ ‘호남무가(湖南巫歌)’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서면 천당으로 보낼지, 지옥으로 보낼지를 심판할 때 팔도별식 33가지를 먹어 보았느냐고 물어본다. 이를 먹어 보았다는 사람은 천당으로 보내고 못 먹어 보았다는 사람은 지옥으로 떠밀어 버리는데, 그 팔도별식 33가지 중에 “남천 모자 먹어 봤냐?”가 끼어 있다.

여기서 남천이란 전주천이고, 모자는 모래무지를 가리키는 말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염라대왕의 심판을 거쳐 천당 가기는 애시당초 글렀다 싶었는데, 요즈음 전주천엔 모래무지가 엄청 많아졌으니 참으로 다행스럽고 반갑다.

수채화가 최인수씨는 “남천의 맑은 물에서 잡아 올린 피래미며 모래무지 참게와 함께 시래기 듬뿍 넣고 팔팔 끓인 함별땅 오모가리는 수양버들 늘어진 이곳 남천 제방 평상위에서 먹어야 제 맛이 났죠. 우리는 어려서 한벽당을 함별땅이라 불렀다”고 말한다.

남천교로 이름한 것은 아래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 남천(南川)이기 때문이며, 남천은 전주천이 우회하면서 전주부성의 남쪽을 흐르므로 불리워진 이름 같다. 원래의 남천교는 현 전주교 상류 17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원래는 돌다리(石橋)였다. 이 다리는 1753년 유실되었다가 김응록, 박사덕 등이 복구 사업을 추진, 1만4,000냥의 돈을 모아 1791년 8월 공사를 시작, 12월 완공했다.

이때 다시 만든 다리 모양을 보고 안경다리(眼鏡橋), 오룡교(五龍橋)라고도 불렀다. 다섯 개의 창을 가진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각 창 머리에는 용머리를 새겨 놓았다. 이는 승암산이 화기(火氣)을 머금은 형세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인 만큼 음양조화의 균형을 이루게 하고 또한 전주부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을 다리에 담았다.

원래의 남천교는 ‘시냇물을 가로질러 묵직하게 걸터앉은 모습은 마치 하늘이 던져준 듯하고, 땅에서 불끈 솟아난 듯하며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것 같지가 않아 탄복을 하였다고 한다’고 한다.

이후 다시 무너진 1901년 관찰사 조한국이 평교(平橋)로 개축했지만 1907년 수해를 입어 부서지자 같은 해 백남선 등의 후원으로 재수축했다. 하지만 3년후 홍수로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다가 1957년 12월 전주천 상류에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교량으로 놓았다가 2009년 다시 개가설한 것이다.

남천교개건비가 전하고 있다. 1791년 만들어진 남천교의 개건 경위를 기록한 비석으로, 정조 18년(1794)에 건립됐다가, 철종 13년(1862)에 다시 세워졌다. 원래는 현재의 전주교와 남천교 중간에 위치에 있었으나, 전주교대 교정을 거쳐 최근에 원래의 위치로 옮겼다.

특히 전주에서 임실, 남원, 순창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천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오래 전부터 다리가 놓여졌다. 남천에는 원래 석교(돌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계묘(1783)-정미(1787) 연간의 홍수로 다리가 종종 무너져 장마때마다 사람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으며, 남천교가 무너진 뒤에는 바로 아래의 싸전다리가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게 된다.

남천교는 지난 1996년 교량 정밀안전진단 결과 ‘D’급 판정을 받은데다 최근 한옥마을 일대 관광객과 주민, 차량 통행이 날로 늘어나자 이를 철거하고 새로운 ‘명품교량’ 건설에 나서, 지금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리 길이는 82.5미터, 다리 너비는 25미터로 현재의 남천교는 2009년 옛 지도상의 모습을 본떠 건설한 것으로, 무지개 다리 위에 누각을 만들어 전주천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홍예(무지개) 다리 위에 누각이 지어진 형태의 아름다운 남천교는 북으로는 한옥마을의 은행로에 이어지며, 남으로는 서학동 전주교대 쪽으로 통하게 된다.

철부지 세 살짜리 꼬마 김호연(1897-1992)은 이 남천교를 건너 강증산을 만나러갔다는 얘기도 전하며, 완산십경에 ‘남천표모(전주천에서 빨래하는 광경)’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전만 해도 모든 빨래는 남천 등 천변에서 이뤄졌다. 특히 우수와 경칩이 지난 춘분 무렵이면 한벽당 아래에서 남천, 완산교에 이르는 전주천변은 빨래꾼들로 거의 북새통을 이뤘다. 큰 드럼통을 가마솥 대용으로 온갖 빨랫감을 잿물과 함께 삶아내는가 하면, 빨래질이 끝난 옷이나 피륙 따위를 자갈밭에 널어놓기도 했다. 물가의 좋은 빨랫돌을 차지하기 위해 높은 언성이 오고 가기도 했고, 빨래질의 손을 멈추고 따뜻한 국밥이나 국물로 점심과 새참을 드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전주천 건너편에 있는 남고산이나 승암산의 골짜기에까지 메아리져서 참으로 장쾌한 멋을 풍기기도 했다. 물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이나 천변에서 산책을 하는 모습이 많은 변화는 했지만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2010년 상반기에 방송된 KBS 드라마스페셜 4부작 ‘보통의 연애’에 바로 이 남천교의 모습이 나온다. ‘보통의 연애’는 전주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한 드라마로, 재광(연우진)이 자신의 형을 죽인 용의자의 딸인 윤혜(유다인)를 만나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그들 앞에 놓인 아픈 진실에 맞서게 되는 러브 스토리를 담고 있는 작품. 재광이 고독하게 바라본 전주천, 남자가 여자 때문에 힘들어 했던 곳이 바로 남천교다.

스위스 루쩨룬의 카펠교나 영국 런던 타워브릿지 등 세계 도시들이 독특한 하나의 교량을 상품화해 세계 각국의 관광객을 끌어들여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있는 것처럼 남천교가 그 역할을 다할 지 지켜볼 일이다.

 

 

남천교개건비

 

지난 1957년 수해 피해로 유실이 우려, 전주교육대학교로 옮겨진 ‘남천교개건비’가 남천교 옆으로 돌아갔다. 개건비는 비석의 뒷면과 측면을 깍아 만들어졌으며, 비문에는 건립 연대 및 남천교 설립을 위해 기금을 낸 군현별 명단, 다리 건립에 동원된 인부들의 명부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한양에서 차를 가져오고 서산(황방산)에서 돌을 가져다 8월에 시작해 12월에 완성했다’는 글귀도 들어 있다. 현재 개건비는 풍화작용으로 비문의 글귀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상황이지만 남천교를 재가설한 후 원래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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